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16)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16화(216/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16화
재구성 (2)
촤아아악!
개조된 그라디바 한 조각이 물결을 갈랐다.
이곳은 바다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다차원의 텅 빈 공간이었을 뿐.
하지만 <불안>에 다다르자, 선체는 검은 안개를 물결처럼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팍스FC의 제작자들의 솜씨는 상당했다.
개조된 그라디바 조각의 상판은 갑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수백 명의 팍스맨들이 초조한 눈빛으로 풍랑처럼 다가오는 <불안>을 마주 보았다.
팍스맨, 권인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밖에서는 항상 이런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건가?”
지구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다.
간간이 괴물이 나타나긴 했어도 상대하기 버거운 적은 아니었으니.
팍스FC의 지원 덕에, 적어도 한국만큼은 안전한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권인혁은 고마움을 느꼈다.
풍족한 보급품으로 딸과 아내를 먹였다.
팍스FC의 포탈이 보호해 준 덕에 두 발을 뻗고 잠들었다.
하지만 정작 대표는 매일 같이 지구 밖에서 침략자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들은 터였다.
“얼추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래서였다.
함께 싸워달라는 팍스FC의 모집에 기꺼이 응한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겸이 자신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참 신기하지.’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군대도, 국가도 믿을 수 없었다.
군대는 사람을 부려 먹고, 국가는 세금을 받아 갔다.
국민은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닌 존재였다.
하지만 팍스FC와 정겸은 달랐다.
자원을 베풀면서도, 십 원 한 장 요구한 적이 없었다.
돕고 돕는 관계.
권인혁은 이 멸망한 세계에서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투 준비!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권인혁은 서둘러 자세를 갖췄다.
흉흉한 검은 안개가 사뭇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스릉!
칼을 뽑아 들었다.
팍스FC로부터 지원받은 운광검.
이제 밝게 빛나는 검신으로 저 ‘불안’과 맞서 싸울 것이었다.
‘형상화되기를 기다리라고 했던가.’
마르케스의 흑마법사로부터 설명을 전해 들었던 터다.
여기 이 그라디바가 팍스맨들의 의식을 악몽으로 채울 것이라고.
그 불안을 이겨내 주는 것이 다가올 싸움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다가올 전투를 예감하며, 권인혁은 검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조종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입!
슈우우우우욱!
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안개를 헤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안개는 두꺼운 비가 되어, 선체를 해일처럼 집어삼켰다.
두두두!
타다다닥!
철벅! 철벅!
마르케스의 흑마법사의 말대로였다.
팍스맨들과 접촉한 <불안>이 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으니까.
빗소리가 진흙 소리처럼 변했고, 진흙 소리가 곧 발걸음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카아아아아아악!
“···리얼하기도 하군.”
괴물이 고성을 뱉었다.
권인혁이 가장 많이 잡아 보았던 오크.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워했던 엘리트 오크였다.
후욱!
순간,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권인혁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자기 손을 들어보았다.
들이닥친 두려움 때문에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쿠아아아아악!
까아아앙!
오크가 달려들었다.
재빨리 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서서히 밀리는 게 느껴졌다.
다리 사이를 통과한 그림자가 사방을 벽처럼 둘렀다.
“형상화······! 이걸 말했던 건가!”
그림자가 공간을 만들었다.
아내와 딸이 있는 현관을 등지고 계단에서 괴물을 막아 세웠던 그때.
권인혁의 기억을 읽은 그라디바가 그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촤하아악!
촤아악!
눈앞의 오크를 베었다.
하지만 베어도 베어도, 오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권인혁의 불안을 좀먹으며 서서히 그를 덮쳐올 뿐.
“젠장······. 젠장······.”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미칠 듯이 불길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검을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턱!
카아아아악!
무언가가 오크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 정체는 익숙한 생김새의 택배 상자.
조금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었던 권인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팍스FC가 지원을 보낸 것이다.
분명 그때도 이런 식으로 목숨을 건졌었다.
오크의 뒤통수를 때린 상자가 덜컹 바닥에 떨어졌지만, 권인혁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택배가 왔다는 사실일 뿐,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두려움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하압!”
쩌어엉!
더이상은 밀리지 않았다.
이것은 실제 전투가 아닌, 정신적인 싸움.
불안을 극복한 이상, 오크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택배 상자를 보았을 뿐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택배 상자가 평범한 일상을 떠올려줄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래, 그랬었지.”
팍스 FC는 그에게 멸망을 무찌르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멸망한 세상을 거슬러, 사라진 일상을 되찾으라 말했을 뿐.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는 결코 멸망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겠다.
“그러면 되는 거지, 팍스?”
권인혁은 그렇게 스스로 되뇌었다.
***
팍스맨들을 실은 배가 전진했다.
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검은 안개가 걷어지고 있었다.
그라디바의 영향을 받은 팍스맨들이 그 <불안>을 떨쳐내고 있는 것이었다.
“강한 사람들이었구나.”
배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조차 없을 것이다.
짙은 안개가 선체를 완전히 휘감고 있는 상태이니까.
아무런 실체가 없는 <불안>이었지만, 팍스맨들의 활약에 따라 서서히 타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안개를 지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팍스맨들이 실체화시켜 준 <불안>.
그때, 놈을 로켓으로 타격하면 될 테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는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그라디바는 총 네 개.
그중, <중독>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중독이라······.’
무슨 중독인지는 모른다.
술이나 약물일 수도, 혹은 어떤 습관이나 기벽 같은 것일 수도.
팍스맨들에게 맡겨볼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한차례 그라디바의 기운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휩쓸고 지나가는 <불안>과 달리, <중독>이라 상상 이상의 정신력과 후유증을 야기하기 마련이었으니.
하여, 특별한 이들에게 <중독>을 상대해 달라 부탁한 참이었다.
“중독을 느끼고······. 그대로 이겨내면 된다는 거지요?”
설명을 들은 운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기본적으로 운기조식에 능통한 무림인들.
몸에 쌓인 독소를 몰아내는 것은 물론, 의지력에서도 도가 튼 사람들이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대협!”
운양은 그렇다 쳐도, 다른 무림인들은 꽤 오래간만이었다.
중국에서의 전투를 잊지 않았던지, 한 명 한 명이 다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김솔과도 친분이 두터운 그들이었는데, 권룡이 특히 반갑게 김솔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상황이 급한 만큼, 길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개조된 그라디바에 우르르 올라타는 무림인들을 배웅하며, 김솔이 내게 물었다.
“나는 안 가도 되냐?”
“너는 게임 중독이라 안 돼.”
“에잉.”
촤아아아아악!
무림인들을 태운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라디바의 기운을 쫓아 서서히 멀어지는 선체.
펄럭이는 도포 자락 때문인지, 그 모습이 호수에 띄운 나룻배처럼 보였다.
***
“검은 안개······. 틀림없이 저것이겠군.”
갑판에 올라선 운양이 작게 중얼거렸다.
서서히 <중독>에 다다르고 있는 무림인들.
어느덧 선체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스며오고 있었다.
휙!
운양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우르르 몰려 있는 무림인들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다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베이징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정겸에게 무공서를 주겠다는 말에 펄쩍 뛰었던 무림인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정겸을 위해 사지에 뛰어들고 있었다.
다들 아는 것이다.
그가 몇 번씩 지구의 멸망을 막아냈다는 것을.
몇 번씩이나 앞장서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정겸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수고를 티 내는 법이 없었다.
화아아아악!
배가 안개를 스치고 들어갔다.
본격적인 그라디바의 영향권에 들어선 것.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일제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쓰읍.”
“하아.”
규칙적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독기가 무섭게 숨에 매달렸지만, 정화되는 속도가 한결 빨랐다.
숨소리로 시간을, 나부끼는 도포 자락으로 거리를 재어가며, 무림인들은 점점 더 깊게 안개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허어!”
운양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를 내뱉었다.
백주가 담긴, 새하얀 술병이 즐비하게 그의 주변에 늘어서 있었으니까.
그라디바가 <중독>의 환각을 펼쳐놓은 것이었다.
평소 즐길 만큼은 마시는 술이다.
그래도 취기를 다스리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저 술이 이토록 두렵게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과연, 이런 게 중독이라는 건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작은 병 하나하나에 강렬한 쾌락이 담겨 있다는걸.
남은 일생을 흔쾌히 내어줄 만큼의 압도적인 쾌락이었다.
쉬이익······.
검은 안개가 지나갔다.
술병이 하나둘 늘어만 갔지만, 차마 손을 댈 생각은 못 했다.
다만······.
‘조금은 이대로 있어도 되지 않을까?’
유혹이 너무나 강렬한 탓이다.
넘어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유혹 자체를 좀 더 오래 음미해 보고 싶었다.
저기 놓인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안개를 타고 넘어오는 은은한 향을 느끼는 것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작은 물건 하나가 그의 발아래 툭 하고 떨어졌다.
“음?”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후라보노 오리지날 츄잉껌 9p, 가격은 810원입니다.]“하하······.”
운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껌 상자를 뜯으며, 친근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협, 청구하시는 것도 아니고······. 가격은 왜 띄워주시는 겁니까?”
지익!
껌 세 개를 꺼내 입에 밀어 넣었다.
뻣뻣하게 얼어있던 껌 조각이 입 속에서 부서졌고, 이내 부드럽게 뭉치며 알싸한 박하향이 코를 찌르듯 들어왔다.
질겅질겅.
이걸로 유혹이 물러갈 리 없었다.
그래도 운양은 정겸으로부터 든든한 응원을 받은 것만 같았다.
달달한 박하향을 맡으며, 운양은 주변에 놓인 술병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부엔디아의 설명이었다.
중독의 기운을 충분히 담아내는 한편, 다시 그것을 이겨내고 떨쳐내야 한다는 것.
운양은 고개를 돌려, 힘써 유혹에 저항하는 무림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약물.
도박.
관능적인 여인의 형상까지.
운양은 오래지 않아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건 깊게 들여다보아 좋을 게 없었다.
사람이 충동을 느끼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충동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
이럴 땐 다 같이 의지를 북돋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신 차려!”
번뜩!
눈빛이 흐릿하던 무림인 몇이 고개를 들었다.
몇은 이미 정신을 차렸는지, 운양처럼 껌을 털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을 포위한 술병들을 노려보며, 운양은 낮게 자세를 잡았다.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슈우우욱! 슈우우욱!
술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달그락거리며, 위협적으로 운양을 감쌌다.
하지만 운양은 쩍쩍 껌을 씹으며, 피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나를 무너뜨리겠다고?’
쾌락은 우상이었다.
하지만 그 우상을 비웃자, 이겨냈다는 새로운 쾌락이 전신을 휘감았다.
당장에라도 술병을 집어 들 것만 같던 무력한 두려움이 바람처럼 씻겨 내려갔다.
“쓰으읍······. 후우우······.”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입안 가득 우러나오는 박하 향기에,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운양은 문득 생각했다.
상황이 급해 정겸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이 모든 멸망을 잠재우고 난다면 그와 천천히 차 한잔 기울일 수 있을까?
그때 맡게 될 은은한 차향이 기다려졌다.
스릉!
검을 빼 들었다.
흐물거리던 안개가 이제는 단단하게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운양은 부드럽게 발을 디뎠다.
그리고······.
쉬익!
길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