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3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30화 (외전)(230/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30화
외전 1화. 꼬인 매듭
휘이이.
나지막하게 말을 끝난 뒤다.
캄캄한 물류센터는 공허한 바람 소리만을 되돌려주었다.
“···역시, 대답이 없나.”
팍스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레벨업을 거듭하며 각성 능력이 불안정해진 이후, 언제부터인가 팍스는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분명 능력은 아직 남아 있는데···’
각성 능력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다.
이를 매개하던 팍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을 뿐.
내가 타고온 포탈이 푸르게 빛났다.
왔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자니,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기, 누구야?”
복슬복슬한 금빛 털 덩어리가 화들짝 놀랐다.
이윽고 솔렌이 새카만 눈동자를 빛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다른 마농족들이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런다고 찾아지겠냐···”
“정겸 님···”
팍스를 찾는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저런 방식으로 팍스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너네 여긴 왜 들어왔어?”
“여기가 아늑하고 편하거든요···”
멸망 중에도 자주 아공간에 들락거리던 마농족들이다.
지리산에 거처를 마련해주었음에도, 솔렌을 비롯한 열댓 마리는 항상 이곳 물류센터에 붙어있곤 했었다.
푸우우.
푸우우···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도 마농족 몇 마리가 배를 내놓고 누워 있었다.
털이 보송보송한 분홍색 배가 코골이 소리와 함께 씰룩거렸다.
도톰한 살을 쓸어 넘기며 녀석들을 일일이 깨워주었다.
“가자, 불안정해서 여기 있으면 안 돼.”
괜히 가족들을 아공간 밖으로 옮긴 게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 아공간에 문제가 생긴다면, 때아닌 생이별을 하게 될 수 있었으니.
접근을 막아둔 아공간에 마농족들이 들어온 것 또한, 내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증거였다.
쩌어어억.
마농족들이 큰 하품을 했다.
여전히 졸린 듯 했지만, 그래도 빠짐없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들도 와서 고기나 먹어라.”
“헉!”
밥 소식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납작하게 접혀있던 귀를 쫑긋 세우는 마농족들.
“정겸님!”
녀석들이 수염 털을 휘날리며 쫄래쫄래 내 옆으로 걸어 나왔다.
***
이튿날 오전.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찼다.
이불 속을 한참이나 뒤척거렸지만, 못내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늦겨울에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바로 가야겠다.”
늦었다는 생각에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기왕에 땀을 낸 뒤에, 한 번에 씻어버릴 작정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질긴 고무 슬리퍼에 맨발을 넣고, 흙 섞인 자갈밭을 걸었다.
안 주머니를 뒤져 잘게 구겨진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종이 윗부분에는 오늘 날짜가 볼펜으로 휘갈기듯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쌀 20kg 1만 포대
-밀가루 20kg 1만 포대
-공구 세트 1,200개.
-물 2L 6개들이···
대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트에 장이라도 보러 가는 느낌이다.
다른 점이라면 양이었는데, 최소 천 단위였고, 종류도 수십 개에 달했다.
내용도 확인했겠다, 다시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게 요즘 내 할 일이었다.
스킬이 사라지기 전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출하해두는 것.
물건들은 합참에서 보관되거나, 물자가 급한 지역에 먼저 보급해주는 식이었다.
“인간 배럭이지, 인간 배럭이야.”
슈우우우웅!
퍼어어엉!
백곰이 그려진 밀가루 포대를 사천 개쯤 출하했을 즈음이다.
포대가 야생미를 뽐내며 전속력으로 튀어 나갔고, 박력분이 박력 있게 벽면과 충돌하며 그대로 주변을 하얗게 칠해버렸다.
꼭 이렇게 한 번씩 능력이 오작동하면서 일거리가 늘어나곤 했다.
“에구구구···”
공연히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루아침에 생산직 노동자가 되어버린 느낌.
그렇다고 불평하기엔, 요즘 누구 하나 쉬는 사람이 없었다
예컨대···
“흐흐, 오늘도 한건 했구만.”
“어르신, 이거 진짜 어떻게 안 됩니까?”
“그러려니 하게. 괜히 건드렸다가 남은 능력까지 더 헝클어질 수 있어.”
저기 책상에 앉아 있는 부엔디아도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으니까.
부엔디아는 붕괴한 아케인으로부터 망가진 오르골, 그러니까 메모라이즈 장치를 산더미처럼 얻어왔다.
대부분 망가진 것들이었는데, 이를 수리하기 위해 조막만 한 금속 철판을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것이 요즘 부엔디아의 일상이었다.
물건을 출하하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다.
잠시 쉬어갈 겸, 부엔디아의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니까요.”
“걱정도 팔자일세. 아무렴 내가 그거 맞고 죽을까 봐?”
찍찍!
부엔디아의 웃음에 따라, 해골 쥐가 소리를 냈다.
쪼르르 어깨를 타는 해골 쥐를 쓰다듬으면서도, 부엔디아는 책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손에는 납땜기처럼 생긴 마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동그란 외안 고글을 쓴 부엔디아가 푸른색 마력을 뿜으며 오르골의 철판을 접합했다.
타다닥! 타닥!
영롱한 푸른빛이 오르골에 맺혔다.
부엔디아가 넌지시 내게 물어왔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나는 공연히 먼쪽을 바라보았다.
출하장 벽면 한쪽이 밀가루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흰 가루를 간질간질 벗겨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팍스가 대답이 없어서요.”
“자네 각성 시스템 말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부엔디아는 마도구를 책상 한편에 걸어둔 뒤, 철판을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자세를 바꿨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헷갈렸다.
팍스는 그저 유용하고 편리한 시스템일 뿐이었을까?
문득 한가지가 더 떠올랐다.
녀석이 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AI였다는 사실.
나는 아예 부엔디아 쪽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르신, 지구에서 개발되던 것 중에 AI라는 게 있었거든요.”
“에이아이? 그게 뭔가?”
“인공지능이라는 뜻이에요. 말 그대로 사람의 의식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거죠. 단,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용량이나 연산 능력에 거의 한계가 없는 게 특징이에요.”
“호오. 그거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이겠는걸?”
부엔디아가 흥미롭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오르골 수리보다 재밌는 건 퍽 오랜만이라는 표정이었다.
기울어진 의자가 까닥까닥 흔들렸다.
“그쵸? 그런데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고도로 발달한 인공 지능과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냐, 이런 말이었죠. 인공 지능이 사람 흉내를 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쩌면 AI가 어르신에게 감쪽같이 제가 쓴 것 같은, 가짜 편지를 보낼 수도 있는 거죠.”
부엔디아는 완전히 몸을 뒤로 젖혔다.
고글을 책상 한편에 올려둔 채, 평소처럼 천천히 수염을 쓸었다.
두껍고 주름진 손에, 곱슬곱슬한 회색 수염이 빳빳하게 잡혔다.
“팍스가 그런 수준의 인공지능이었다고 생각하나?”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말투가 영락없이 로봇이긴 했지만요.”
팍스는 줄곧 내 명령에 대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각성 시스템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설명해주기도 했고, 정말 가끔이지만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녀석에게 모종의 의식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을 보며 비슷한 흉내를 낸 것에 불과했는지.
진실은 팍스만, 아니 어쩌면 팍스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가만히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부엔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라고 별반 다르겠는가?”
“우리요?”
“삶은 자극의 연속이지. 그렇게 쌓이다 보면 경험이 되고, 새로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를 배우게 되지. 어쩌면 우리 또한 자네가 말하는 인공지능의 일종일지도 몰라. 그저 회로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을 뿐이지. 그게 또 매력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물류창고나 내 머릿속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잘 정돈된 물류센터와는 달리, 내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을 터였다.
달칵.
부엔디아가 철판을 집어 들었다.
햇빛에 비추자, 도트로 박힌 마법 주문이 오돌토돌하게 빛났다.
“이 메모라이즈 장치 말이지, 일종의 대화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스위치를 넣으면 오르골이 자동으로 마법 주문을 외워주는 구조지. 질문에 따라 정해진 답이 정해져 있는 문답서처럼 말이야.”
“음···, 자동응답기랑 비슷한데요?”
팍스와 나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내 말에 따라, 녀석이 직접 물류센터를 가동해주는 방식.
달칵.
부엔디아가 이번에는 다른 철판을 들어 올렸다.
이전과는 대조적으로, 도트로 된 주문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이건 망가진 물건이야. 문답 구조가 완전히 꼬여버린 거지. 사람으로 치자면 질문을 받았는데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팍스에게서 뭔가 꼬여버렸다는 게 틀림없었다.
부엔디아가 철판을 내려놓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가?”
“고치고 싶어요. 이 정 없는 놈이··· 갈 때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닙니까?”
부엔디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팍스에게 우리가 모르는 어떤 부하가 걸려 있을 수도 있지. 녀석이 취급했던 상품 중, 가장 데이터가 비대했던 게 뭐라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각종 무기류부터, 시시포스나 본 드래곤처럼 흑마력이 깃든 물건들.
심지어는 상공회의소 같은 복잡한 거대 시설물까지.
하지만 답을 듣고 나자,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야.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자네 아공간을 오다녔잖은가?”
지난 1년간, 아공간은 일종의 전초기지였다.
상공회의소에 맞서 사람들이 왕래하고, 또 연합했던.
그 모든 관계가 팍스에게 데이터로 쌓여온 결과, 마침내 과부하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겠냐는 소리였다.
“전에도 한 차례 이야기했다시피, 각성 능력은 자네의 정신과도 연결되어 있어. 아공간에 등록된 이들에 대한 정보를 갱신하고, 또 정리하다 보면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크게 줄어들 게야. 이 오르골의 회로를 고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작업이지.”
달칵.
부엔디아가 다시 마도구를 손에 쥐었다.
파지직, 푸른 불꽃을 틔우며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사람들을 만나 소식을 물어보게. 궁금했던 게 있다면 꼭 물어보고.”
***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부엔디아에게서 팍스를 고칠 방법을 전해 들은 참.
유성철에게 이야기해, 당분간은 물자를 출하하는 일을 쉬기로 했다.
“뭐, 직접 다니면서 하면 되겠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그때그때 직접 출하해주면 될 터.
이따금 전속력으로 출하돼버리는 문제만 조심한다면 문제 될 건 없었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던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첫 행선지는 엘븐하임으로 정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들른 지가 오래됐다.
지난 한 달 동안 가끔 한국에 들릴 뿐,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를 뺑뺑 돌며 지냈었으니까.
싸르르···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이파리가 흔들리며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오, 잘 자랐네.”
그 대부분이 세계수였다.
묘목으로 심었던 것들이 벌써 이렇게 자라난 것.
같은 종으로만 차 있으면 숲이 지루할 법도 한데, 신비롭게도 세계수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로 다채롭게 성장했다.
어떤 것은 활엽수로, 또 어떤 것은 침엽수로 자랐고, 은행잎 같은 반달 모양도 적지 않았다.
가지의 형태 또한 둥글고 두꺼운 것부터, 뾰족한 가시나무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했다.
부스럭.
한창 숲을 구경하고 있자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프 장로 윌그라임과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
어젯밤에 미리 연락을 넣어둔 덕에, 나를 마중하러 나온 것이었다.
윌그라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셨습니까? 정겸 대표.”
“별일 없으셨죠?”
“있다마다요,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아니 글쎄···”
윌그라임도, 핀드릭이 벅찬 표정으로 덧붙였고···
“세계수에 열매가 맺혔거든요.”
나로서도 뜻밖의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