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31)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31화(231/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31화
외전 2화. 외상, 그 이후
저벅저벅.
젖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안내하는 것은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이었다.
그새 제법 친해진 모양이다.
엘프 장로 윌그라임이 앞서가는 핀드릭에게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조금 전 나를 마중하러 왔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 족장 때문에 늦었잖아요.”
“어허, 돌아간다고 결코 늦는 게 아니랍니다.”
핀드릭이 사슴뿔을 매만지며 능청을 떨었다.
시공간 개념이 자유로운 드루이드들이다.
미국에 있는 대수림이 본거지인 그들이었는데, 최근에는 포탈을 통해 이곳 엘븐하임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고 들었다.
‘슬슬 북적해지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엘븐하임의 심장인, 갈라돈으로 향하는 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팍스맨, 유럽 출신의 피난민들, 아발론 사람들은 물론, 경제사범 수용소에서 탈출한 죄수들까지 둥지를 트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윌그라임이 기다란 귀를 매만지며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 일입니까? 오겠다고 미리 연락까지 주시고.”
“최근에 많이 못들렸던 것 같아서요.”
“하긴, 평소에는 소리소문 없이 왔다갔다 하시곤 했었지요.”
내가 그랬었나?
막무가내로 오가기는 했었다.
대뜸 지원을 요청하기도, 불쑥 피난민들을 던져놓고 가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윌그라임은 서글서글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사실, 저는 정겸 대표가 그런 식으로 오는 게 더 좋습니다.”
“하하···”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상공회의소의 이간질 탓에, 어쩌면 처음 적으로 만날수도 있었던 엘븐하임.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황폐한 멸망 중에서도 선물같은 일이었으니.
갈라돈 의회에 다다랐을 즈음, 내가 윌그라임에게 말했다.
“보급품도 좀 놓아주려고 왔어요. 요즘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윌그라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침 딱 필요한 게 있다는 표정이었다.
***
윌그라임을 따라 나선 곳은 광활한 평야로 이루어진 농지였다.
복사된 세계수가 커감에 따라, 자연스레 엘븐하임 전역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 되었는데, 지금은 아예 동아시아 최대의 경작지가 되어 있었다.
“많기도 해라.”
배추, 무, 양상추, 양배추, 당근, 감자, 오이 등등.
지구, 특히 한국에서 자라는 작물이라면 없는 게 없었다.
윌그라임이 부탁한 것은 일종의 수로 공사였다.
논 주변으로 촘촘하게 관개 수로가 놓여 있었는데, 언덕을 파이프로 뚫어 물길을 낸 곳도 있었다.
건축 각성자들이 에메스 산 자재를 이용해 만든 것이었는데, 설치까지는 그렇다 쳐도, 파손되거나 노후된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바르나울의 저주가 부속 틈새에 끼어들어간 것들이 더러 있어서 말이지요. 수질도 오염되고··· 토양에서 자연력이 뻗어나가는 데에도 방해가 돼서.”
내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어차피 모두 한때 내 아공간에서 나왔던 것들.
<상품 회수>로 망가진 파이프들을 끌어당겨주면 그만이었다.
“상품회수.”
파바바바박!
노후된 파이프가 땅을 부수며 올라왔다.
저수조와는 연결을 끊어둔 덕에 물길이 치솟거나 하지는 않았다.
핀드릭이 자연력을 불어넣어, 파해쳐진 흙을 가지런히 정리할 뿐이었다.
하나하나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작지가 워낙에 넓은 탓에,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제법 일이었다.
해가 중천에서 슬그머니 내려앉았을 즈음, 윌그라임이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했다.
“역시 대표님이 있으면 일사천리라니까요.”
도움이 됐다는 뜻이다.
그럴 때면 언제고 뿌듯함과 함께 작은 불안이 찾아온다.
언젠가 내가 쓸모 없어지면 어쩌지하는 막연한 불안감.
문득, 그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팍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활약을 하게 될 줄은.
나는 군대에 갓 전역한,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지구를,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세상이 도로 평화로워진다면, 나는 평범하고 지루해진 내 역할에 실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주워섬기고 있을 즈음, 윌그라임이 작은 그릇 하나를 가져왔다.
반짝거리는 유약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드세요. 새참입니다.”
조심스레 그릇을 받아들었다.
워낙 뜨거운 탓에, 소매를 덧대 잡아야했다.
안에는 노랗다 못해 황금빛으로 빛나는 단호박죽이 들어있었다.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이제 이런 것도 만들줄 알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합니다. 이제 나름 엘븐하임의 소울푸드라고요.”
엘프들의 음식이 아니다.
팍스맨들이 오다니며 지구의 작물로 된 요리를 전수해준 것.
고기를 먹지 않는 엘프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영양 간식이 또 있겠나 싶었다.
후후, 김을 불어 죽을 넘겼다.
달큰한 호박향이 퍼지며 서늘한 코끝을 녹였다.
단숨에 비운 그릇을 내려놓았는데, 윌그라임이 그 옆으로 걸터앉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영락없는 퇴역 군인의 얼굴이시구료.”
어쩔 수 없이 픽 웃었다.
서글프게도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으니까.
모든 싸움이 끝났다.
치열하게 멸망과 싸워왔지만, 지금은 모두가 새로운 삶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세상은 아직 회복중에 있었고 멸망의 흔적 또한 남아 있었기에, 나는 그 흔적을 고집스레 붙잡으며 매일같이 벽에 전력으로 물건을 투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군인이라···’
집에 돌아온 군인은 외상 후 장애를 겪는다.
이불 속에서도 손가락이 까딱 방아쇠를 당기는 것.
어쩌면 무심결에 물자를 전속력으로 날려버리는 나 또한, 비슷한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받으세요.”
윌그라임이 이번에는 후식을 꺼내들었다.
빨강과 노랑이 섞인 과일이었는데, 사과랑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윌그라임이 그 정체를 알려주었다.
“세계수 열맵니다. 싱싱해요.”
“이걸 먹어도 돼요?”
그는 손등을 가볍게 내저었다.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제스쳐.
아삭 소리와 함께 과육을 베어물었는데, 맛은 생각보다 특별할 게 없었다.
생긴 건 사과인데 포도맛이 났다.
그런데 식감은 또 파인애플에 가까웠다.
“나무마다 맛이 다 달라요. 그때그때 먹는 재미가 있지요.”
아까울 것 없다는 듯 열매를 넘겨준 윌그라임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릇에 뱉어둔 씨앗은 알뜰하게 챙겼다.
‘하기야···’
자그마치 ‘세계수의 씨앗’이다.
멸망한 세계라면, 저 작은 씨앗 하나가 세계를 구할 단초가 될 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은 여름철 마당에 뱉은 수박씨처럼,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뿐이었지만.
***
저녁에는 한 오두막으로 초대를 받았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은은한 불빛과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와하하!
엘븐하임에서는 매일같이 작업이 이루어진다.
농사를 짓고, 시설을 복구하고, 수림을 가꾸는 등등, 하나같이 직접 몸으로 뛰는 일.
그래서인지, 밤마다 이렇게 노란 불빛을 피워놓고는 하루의 피로를 녹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쪼르르륵.
자리에 앉자, 누군가 내 앞에 놓인 잔에 쪼르르 술을 담아주었다.
손바닥 반의 반만한 작은 잔에, 지구인들에게서 어슬프게 배운 알싸한 담금주가 채워졌다.
-나와, 나와!
-휘이익!
자신 있는 엘프들은 한 명씩 나가서 묘기를 부린다.
응원에 의미로, 곳곳에 둘러앉은 엘프들이 악기를 연주한다.
실제로 있는 악기는 아니었는데, 마력과 자연력을 엮은 실을 허공에 걸어 퉁기는 방식이었다.
화살이 없다는 점만 빼면, 위계 화살을 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둥둥.
둥둥.
이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음의 높낮이가 거의 없고, 그저 둥둥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생각해보니 음악에는 영 소질이 없던 엘프들이었다.
나는 엘리의 끔찍한 노래 솜씨를 아직도 잊지 못하니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소리를 느끼고 즐기는 방식이 우리와 다를 뿐일지도 모른다.
길쭉한 귀를 가진 엘프들은 강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음악소리처럼 듣는다고도 하니까.
“잘 오셨습니다, 대표님.”
이번에는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이 내 옆에 앉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말린 세계수 잎을 몇 개 꺼내들고는, 파이프에 빻아 넣고는 능숙하게 불까지 지펴 넣었다.
후우우욱.
새하얀 연기가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담배연기와 달리, 탁하기는 커녕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세계수 열매 말이지요.”
이제야 열매에 대해 뭔가 이야기하려는 모양이다.
두어번 숨을 빨아들인 뒤에야, 핀드릭은 말을 이었다.
“저는 일평생 세계수에 열매가 맺히는 걸 본적이 없습니다. 아니, 들어본 적 조자 없지요. 엘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백년을 사는 엘프들이니··· 세계수의 실과는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의문이었다.
대체 왜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
세계수는 왜 꽃을 피우고, 또 열매를 맺기 시작했을까.
핀드릭이 마저 말을 이었다.
“고민하던 중,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1년간, 엘븐하임에 굉장히 많은 손님이 오고갔다는 걸요.”
알다시피, 그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됐었다.
“아시다시피, 원래 세계수는 엘븐하임에 단 한 그루만 존재했습니다. 엘프들도 세계수를 보호하고 신성시했었죠. 하지만 정겸 대표가 그 세계수를 길가의 돌맹이처럼 흔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세계수는 세계수가 아니라, ‘세계수들’이 되었고, 엘븐하임은 엘프들 외에도 셀 수 없이 다양한 종족이 섞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세계수는 분명, 자기 뿌리 위를 걸어다니는 다양한 종족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탁탁.
핀드릭이 작은 상자를 꺼내 재를 털었다.
“그중에는 엘프들처럼 세계수를 우러러보는 이도 있었겠지만, 그저 아무렇지 않게 산보객처럼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제 추측은 이렇습니다. 세계수가 다른 삶의 전략을 채택했다고요.”
“다른 삶의 전략이요?”
“원래 세계수는 늙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외부로 공급하지요. 세계수는 세계에 존재하는, 스스로 완전무결한 생명 중 하나입니다. 그런 세계수가 열매를 맺었다는 건··· 다른 걸의미하지 않죠. 자손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열매는 씨를 뿌리기 위함이다.
그 열매를 먹은 동물들이 나무의 씨앗을 다른 곳에 퍼뜨려주니까.
“세계수가 진화를 택한 겁니다. 기존의 완결성을 포기한 거죠. 더 약해질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관계성.
문득 팍스가 떠올랐다.
녀석이 일으킨 과부하 또한, 아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일으킨 자극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팍스가 사라짐을 택했다면, 세계수는 진화를 택함으로써 새로운 사라짐을 택한 것이었다.
‘이런 걸 알아보라고 한 걸까.’
지금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지식이다.
내 정신은 각성 능력, 그리고 사라진 팍스와도 연결되어 있을 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라던 부엔디아였지만, 이 지식이 팍스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대표님은 이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핀드릭이 내게 물었다.
세계수가 열매를 품고, 팍스가 자취를 감췄다.
나 또한 멸망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복학해야죠.”
그래도 여전히 하고 싶은 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