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38)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38화(238/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38화
외전 9화. 대화
거울에 물건을 던져넣기만 하면 된다.
대기하고 있던 AGV 로봇이 물건을 받아 진열장에 채워 넣는 것.
물건이 진열장에 들어간 이후로는 당연히 무한히 복제도 가능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난데없이 AGV 로봇이 출현한 것일까.
거기다 알 수 없는 동력으로 스스로 움직이기까지.
한 가지 단서라고 할 것은 투명한 진열장, 그리고 그 안에 진열돼 있던 입체 도형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정황상 진열장과 도형들이 내 물류센터의 시설로 탈바꿈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 거울 속은 내 능력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아공간이다.
그럼에도 물류센터의 시설이 들어섰다는 것은······.
“팍스.”
녀석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팍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자동화된 것은 ‘입고’ 뿐이었지만, 불완전하게나마 아공간은 차츰차츰 물류센터를 닮아가고 있었다.
마침 안 그래도 여기를 새로운 물류센터로 만들 계획이었다.
이참에 나도 시원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도와주지.”
지이잉!
수차례 포탈이 열었다.
그러곤 아공간에 있던 시설들을 하나둘 차례대로 꺼내놓기 시작했다.
더 많은 AGV 로봇과 선반과 부자재, 휴게실이나 직원 식당 같은 시설까지.
포탈의 크기가 허용하는 만큼 나누어 가며, 내 아공간에 있던 물류센터를 천천히 조립해 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작업을 이어가던 중, 나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각성 능력을 이용하는 것인데도 체력 소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옮겨야 할 양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 번에 다 하기는 어렵겠는데?’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움직여도 바깥세상은 그대로 멈춰 있다는 것.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는 감각은 상상 이상으로 꽤나 숨 막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줄곧, 팍스는 이런 시간 속에 살고 있었는지도.
“얼추 비슷해지기는 했는데······.”
기본적인 시설은 모두 구현했다.
선반은 여전히 텅텅 비어있지만, 물류센터의 초기 시설은 갖춰놓은 상태.
문득, 훌리오를 살리기 위해 <본사>에 녀석의 기억을 재현했던 프랑코 백작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 또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물론···
‘그래도 다르지.’
백작은 훌리오를 유년 시절의 기억에 유폐시켰다.
훌리오의 순수함에 다른 불순물이 닿지 못하도록 차단했던 것.
그와는 달리, 나는 물류센터가 복원된다고 해서 팍스가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아공간을 들락거렸다.
부엔디아는 그것이 팍스가 고장 난 원인이라 말했지만, 어쩌면 그 또한 녀석의 성장에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여러모로 상황이 변했다.
다행히 팍스가 한차례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상황.
“그러면······.”
부엔디아와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
이튿날 아침.
부엔디아를 만나기 위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괴물들에 의해 반파되다시피 한 곳이었다.
합참의 <복원 사업>에 포함된 덕에 건축 각성자들에 의해 말끔하게 복원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른 아침부터 축구 경기가 잡혀 있었다.
관람석으로 들어선 나는 적당히 몫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많이 보러 오네?’
이른 아침인데도 경기를 보러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전 8시 10분이라는 시간이 표시된 점수판 위로, <경제사범 조기축구 리그>라는 기괴한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대체 몇 개를 합친 거야.’
수용소 조기축구로 리그 경기를 펼친다니.
하기야, 다들 어지간히 심심했던 것이다.
멸망은 빠르게 정리되어 가고 있었고, 넉넉한 보급품 덕분에 배를 주릴 일도 없었으니.
명실상부한 혼란기임에도, 적어도 한국만큼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합참이 그대로 살아있는 덕에 치안이 확실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재건 사업과 구호 활동을 위주로 한 일자리도 서서히 확충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새로운 삶에 빠르게 적응해 가는 것이었다.
와아아! 함성이 들려왔다. 터벅터벅 초록색 잔디밭을 중심으로, 양쪽 출입구에서 경제사범들이 걸어 나왔다.
형형색색의 유니폼에는 등번호가 죄수 번호 대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음 주에는 엘프들로 구성된 팀이 출전한다고 한다.
상대는 유성철이 감독을 맡은 군인 팀이었는데, 후문으로는 그 와중에도 나를 팀의 구단주로 발표했다고.
‘하여간 감투 엄청나게 좋아한다니까.’
정확히는 남에게 씌우는 걸 좋아한다.
더 정확하게는 나한테. 모르는 사이 탑처럼 쌓여있을 감투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경기를 관람했다.
삐익!
휘슬과 함께 킥오프가 이루어졌다.
각성 능력 사용이 금지된, 순수 피지컬 경기.
팀은 사기횡령팀, 그리고 조세포탈팀으로 나뉘었다.
후자에서 포탈은 포탈(逋脫)이 아닌 포탈(Portal)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기횡령팀은 유난히 헛다리에 능숙했고, 조세포탈팀은 공간을 가르는 스프린트가 특기였다.
‘이게 뭐야.’
부엔디아는 여기서 심판으로 나섰다.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수염을 휘날리며 뛰는 부엔디아.
탄탄해 보이는 팔다리를 드러내며 건강한 노년을 뽐냈다.
탓!
타다닥!
공이 바쁘게 필드를 누볐다.
아마추어라 그런지 솔직히 실력은 다들 고만고만했는데, 정작 이 경기의 묘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삐익!
몇 차례 공이 오가던 중, 휘슬이 울렸다.
사기횡령 팀이 평소처럼 후방에서 공을 돌리던 때.
반칙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부엔디아를 바라보았다.
부엔디아가 한 선수를 향해 절레절레 카드를 내밀었다.
“어딜 누굴 속여넘기려고. 축구화 밑에 근력 강화, 경고 1점일세.”
“젠장! 귀신같은 영감탱이!”
심판을 속이는 것까지 게임의 일환이었다.
분하다는 듯 축구공을 내던지는 선수와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선수들.
같은 팀 동료들도, 관객들도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였다.
삐익!
한참이나 공방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점수 결과는 5 대 6.
치열한 난타전이었는데, 후반 추가 시간에 생긴 PK가 결승 골로 이어졌다.
사기횡령 팀의 선수가 특유의 야바위 킥으로 조세포탈 팀의 키퍼를 말끔하게 속여넘긴 것.
생각 외로······.
“재밌네.”
제법 나쁘지 않은 볼거리였다.
***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에서 만난 부엔디아.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말이지. 죄수들과는 막역한 사이기도 해서, 보다시피 심판으로 이렇게 어울려 주고 있네. 그건 그렇고······ 여긴 어쩐 일인가?”
부엔디아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해 주었다.
포탈 관리국에 놓인 거울에서 숨겨진 아공간을 발견했다는 것.
몇 차례 실험을 거듭하던 중, 물류 선반과 AGV 로봇이 생겨났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참에 물류센터의 시설들을 그 안으로 옮겨두었다는 것까지.
부엔디아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호······. 그런 곳이 있었다고?”
“예, 팍스가 어째서 다시 움직인 걸까요?”
“아무래도 그거겠지. 새로운 사물을 입고해 준 것 말이야.”
비델족의 넝쿨, 그리고 마농족의 발광석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관계와 경험이 축적된 사물이 입고됨에 따라, 그것이 팍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
부엔디아는 특히 팍스의 성장에 주목했다.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건 다름 아닌 ‘대화’를 통해서일세. 아이들은 부모의 언어를 축적하고, 해석하고, 또 판단하면서 성장해 나가지. 어쩌면 물건을 입고하고 출고하는 과정이······ 팍스에게는 일종의 대화에 해당하는지도 몰라. 실제로 자네도 팍스와는 줄곧 그 주제로 대화했잖은가?”
확실히 그랬다.
내가 팍스와 주고받았던 대화.
그 대부분이 물건을 입고하고 또 출하하는 등의, 물류센터 능력에 관한 것들이었으니까.
팍스는 지금 ‘입고’만 가능한 상태다.
부엔디아의 말대로라면 이제 귀가 뜨인 셈.
비유하자면 이제 막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갓난아이와도 같은 상태였다.
“우리에게 있어 ‘말’에 해당하는 것이 녀석에게는 ‘사물’인 거겠지. 보아하니 지금처럼 물건을 주고받는 게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은데······.”
‘좋은 자극이라······.’
문득 아공간의 멈춰 있던 시간이 떠올랐다.
물건이 입고되고, 출고될 때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까지.
어쩌면 물건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줄곧 멈춰 있던 녀석에게 새로운 시간성을 부여해 주는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킨 부엔디아가 천천히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 잘 될 걸세.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그 말대로였다.
슈퍼마켓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거울 속에 물건을 입고하는 일은 계속될 테니까.
언젠가 돌아올, 팍스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
나는 차원 정거장의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합참의 유성철과 건축 능력을 지닌 아버지를 대동한 것.
정거장이 설치될 레텔의 테레브, 그리고 베로니카 공녀도 흡혈귀들을 이끌고 자리했다.
본격적인 청사진을 그리는 때였다.
십자선이 오간다는 발상 자체는 간단했지만,?어디에, 어느 수준의 규모로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했다.
전반적인 계획은 대동소이했지만, ‘슈퍼마켓’이 들어설 관리국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한 가지 의견을 덧붙였다.
“관리국에는 광장을 설치했으면 합니다. 슈퍼마켓이 들어설 거울 주변으로요.”
“잠깐만요, 정겸씨. 거기는······.”
그러자, 화들짝 놀란 공녀가 걱정을 덧붙였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광장의 특성상, 보안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
“복제 능력이 있는 거울이에요.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악의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굉장히 치명적일 거고요.”
공녀가 제안한 것은 소수의 인원에게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입고, 출고 절차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슈퍼마켓’의 혜택을 최대한 안전하게 누리자는 것.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렇게 계획을 세웠었으니까.
하지만 부엔디아와 이야기해 본 끝에, 나는 생각을 새롭게 고쳐먹었다.
“정겸씨가 말씀하신 ‘슈퍼마켓’은 차원 정거장의 핵심 시설이에요.?누군가 위험 물질을 던져 넣기라도 한다면 내부가 오염될 수도 있어요.”
팍스에게 있어 입고와 출고가 대화의 일종이라면······.
그 또한 녀석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다양한 사람들과 쌓게 될 무궁무진한 경험.
그 경험의 기회를 내 멋대로 박탈해 버릴 순 없었다.
나는 프랑코 백작과 다른 길을 걸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넣는다고······ 아무거나 다 들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반응이란 ‘주고받는’ 것이다.
상호작용의 방법 중에는 수용도 있지만 거절도 있는 법.
팍스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녀석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한편, 또 무언가는 튕겨낼 것이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나도 틈틈이 들어가 있을 작정이었다.
아직 다 옮겨놓지 못한 물류센터 물건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녀석과 마저 나눠야 할 이야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