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95)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95화(95/240)
095화 무소유 (2)
아쉽게도 당장은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은 비단 바르나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띠링!
[‘아발론’의 좌표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통폐합을 위해서는 좌표를 고정하거나, 가변 규칙에 적용된 수식을 계산해야 합니다.]환각을 다루는 바르나울.
놈들의 식민지답게, 아발론은 흑마법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AI 팍스가 계산을 통해 아발론의 위치를 추적할 예정이었지만······.
“최소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하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탓에, 팍스 또한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헤집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지형학적인 문제는 물론, 상공회의소가 설정한 차원의 성장 등급 차이까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이것저것 쌓여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발론을 지구로 말입니까······?”
“세상에······.”
가능성 하나만으로, 기사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지구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을 바르나울.
그리고 놈들의 식민지인 아발론을 찾고 있는 우리.
과연 어느 쪽이 먼저 선빵을 때릴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당분간 시간이 유예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물론······.
“······뒤처리가 남아 있긴 하니까.”
그렇다고 한가한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이제야 사태 수습을 위한 첫 삽을 떴고,
유럽에서는 아직 한창 포로들을 구출하고 있는 상태.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나도 할 일이 많았다.
아직 남아 있는 유럽의 게이트 핵.
포로들을 구하는 한편, 그 자리에 아공간 포탈을 설치해주어야 했으니까.
심호흡과 함께 어깨를 붕붕 돌리며,
나는 기사들을 대동한 채,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페르메곤의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아공간 포탈이 대신했고, 수용소에 갇혀 있던 수만 명의 포로를 해방했다.
더불어,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따로 모아, ‘포탈 운송’을 이용해 엘븐하임으로 이송했다.
작은 대륙만 한 크기의 엘븐하임.
수천 명의 사람쯤이야 너끈히 수용할 수 있었으니까.
세계수가 논밭처럼 늘어선 엘븐하임에서, 나는 큰누나 김주연 씨와 인사를 나눴다.
“이게 다 환자야?”
“그럼 다 환자지. 니가 다 수입해오고 있잖아.”
숲에는 수천 개의 병실용 침상이 늘어서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환자들.
유능한 간호사, 김씨스터즈 1호께서는 이곳에 대규모의 병원 시스템을 구축했고, 팍스FC의 힐러들과 드루이드들을 배정해 숨 가쁘게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현대 의학과 각성 능력, 거기에 자연력까지 더해진 최첨단의 치료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다리 절단 환자! 지혈부터!
-복부 관통상입니다! 핀드릭 선생님을······!
팍스맨들의 이마에 맺힌 땀은 도무지 마를 기색이 없었다.
“뭐가 이렇게 바빠?”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힐러들의 수는 한정돼 있는데, 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치료를 안 할 수도 없고······.”
인명 구조라는 대의적인 목적 외에도, 환자들을 구조하고 치료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직접적으로 팍스FC의 도움을 입은 사람일수록 이후 팍스맨에 지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내 전력이 늘어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으니까.
-으으······.
-아파······. 누가 좀······.
하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중환자들에게 밀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경상 환자들.
몸을 쿡쿡 찔러오는 통증 탓에 하나같이 끙끙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큰일이야. 죽는 사람까지야 많지 않겠지만······. 다들 장애나 후유증이 남을 텐데.”
푹 한숨을 꺼뜨린 큰누나.
하지만 불현듯 들려온 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치익······. 치익······!
“······뭐지?”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소리의 근원지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스피커.
큰누나가 엘븐하임에 병원 시스템을 구축하며 설치한 중앙 방송 시스템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는 엘븐하임의 갈라돈 의회입니다.
“엘리?”
다름 아닌 갈라돈 의회의 의장, 엘리였다.
그제야 숲 너머 봉우리에 설치된 조악한 간이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땜빵으로 얼룩진 천을 옮기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엘프들.
엘리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들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조금이나마 치료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 엘븐하임에서 깜짝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공연이 여러분에게 용기를 더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극······?”
“어머나······.”
치료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엘프들이다.
아무래도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보며, 줄곧 마음이 쓰였던 모양.
문득, 엘리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엘프들은 문화예술을 사랑해요. 음악을 노래하는 것도, 그런 음악과 함께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나누는 것도 좋아하죠.
“마음이 정말 고맙고, 따듯하네······.”
바로 그 연극을 선물로 준비해 온 엘프들의 친절.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 큰누나는 이미 감동한 표정이었다.
한편,
“케루가 주인공인가? 에단도 있고······.”
해안가에서 처음 만났던 엘프들.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무대 위로 올라왔고,
엘리의 나지막한 내레이션과 함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소년 엘프, 로난은 고아로 태어났어요. 결국 양육시설로 보내졌지만, 로난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와 괄시뿐이었죠. 하지만 태생 너그러운 성격이었던 로난은 친구들의 가방을 들어주고,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고, 부드러운 빵을 사다 주며 원만한 관계를 이어 나갔답니다.
“음······.”
-마침내 로난이 110살 성년이 된 어느 날, 시설의 원장이 로난에게 지금까지의 양육 비용을 청구했지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오른 로난이었지만, 지금껏 그를 키워준 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답니다. 시설을 나오자마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로난은 그날 코가 깨져 버렸지요.
“······?”
“······??”
심상치 않은 전개.
큰누나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로난은 갈라온 의회에서 지급된 보조금으로 작은 원룸을 구했어요. 하지만 며칠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로난은 중고 수레 매매단지로 가, 수입산 수레를 60개월 풀 할부로 구매했지요. 원래 보러 갔던 수레와는 다른 물건이었고, 왼쪽 바퀴가 찌그러져 있기도 했지만 로난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엘븐하임에 카지노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목구멍이 턱 하니 막혀오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서사.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 또한 서서히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으으······.”
“끄으으윽······! 끄으······.”
악몽을 꾸듯, 신음하는 환자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모두들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룰렛에 남은 재산을 모조리 털어 넣은 로난은 마침내 신체 포기 각서를 쓰게 되었어요. 그날 로난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고, 행인과 시비가 붙은 끝에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답니다. 구치소에 여자친구가 찾아왔어요.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 70년 동안 함께 했던 엘프였죠. 하지만 그녀는 사실 로난의 절친한 친구와 몰래 45년째 사귀고 있었다며 로난에게 이별을 통보했······.
“끄르르르륵······.”
“끄르륵······.”
끔찍한 반전이 대단원에 이르렀고, 환자들은 거품을 물며 눈알을 뒤집었다.
“······중단시켜.”
“예, 주군.”
카멜롯의 기사들이 무대로 날아들었고,
컴컴한 무대 뒤, 숨어 있던 각본가 윌그라임이 두 팔이 잡힌 채 끌려 나왔다.
“나, 나는 고통의 심오함과 상처를 보여주려······.!”
짧은 두 발을 버둥거리며, 결백을 주장하는 윌그라임.
보나 마나, 세계수 양육법을 인간들에게까지 적용하려던 게 분명했다.
사도 마조히즘의 극을 달리는 그의 ‘명작’ 덕분에, 환자들의 숨이 일제히 끊어질 뻔했다.
입안 가득 고구마 단내를 풍기며, 큰누나가 내게 물었다.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래야지······.”
환자들로 가득한 엘븐하임.
아쉽게도, 엘프들의 공연으로는 그들을 치료할 수 없었다.
“힐러들을 더 모아올게.”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인력 확충이었으니까.
***
나는 곧장 유성철을 만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전국에 설치된 아공간 포탈을 관리하는 합참 본부.
각성자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추세임에도, 정작 팍스맨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이제 한국에는 더 이상 힐러들이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팍스FC 힐러들이라 해봤자 수백 명이 고작인데요. 그것보다는······.”
휙 하니 고개를 저은 유성철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국에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네요.”
자그마치 마석 1만 개가 소모되는 단체 개설.
놀랍게도 그 큰 금액을 지불하는 각성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김 대령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한국의 모든 지역을 커버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산간 지역은 물론이고······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생존자 집단도 셀 수 없이 많죠.”
곳곳에 포탈을 설치했고, 스마트폰까지 뿌려 물자를 보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팍스FC의 영향 밖에 놓인 지역들이 즐비한 상황.
가족이나 지인, 주거지와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무수히 많은 집단이 형성됐고, 유성철의 말처럼 단체를 개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수망교(修望教)’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대구 쪽 대형 병원들을 통합한 놈들인데······ 팍스FC가 군과 손을 잡고 사람들을 포탈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더군요.”
아예 대놓고 팍스FC와 척을 지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그런 헛소리를 믿는다고요?”
“의외로 먹히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인신공양이 벌어진 사례가 적지 않았거든요.”
오래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1군단장.
그 같은 녀석이 하나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일종의 신흥 종교 같은 집단입니다. 인간의 삶에 재물은 헛된 것이고······. 모두의 소유가 사라진 지금이 무소유의 때라느니, 상공회의소가 진리의 메신저라느니 하는······.”
아무래도 미리 조사를 해둔 모양이었다.
수망교에 관한 정보를 줄줄 늘어놓던 유성철.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다 김대령과 국군의 허술한 관계를 지적하는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군의 소속이 된 다음, 그 소식을 국방일보에 대서특필해야······! 국민들도 비로소 김 대령님의 진심을 깨닫고······.”
“아뇨, 그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게거품을 문 유성철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내가 다시 물었다.
“아무튼, 거기에 힐러들이 많다는 거죠? 의사들은 더더욱 많고요.”
“······그렇죠. 대구에 있는 대형 병원 15개가 모두 수망교 소속이니까요.”
그들 모두가 수망교도일 리는 없었다.
개인의 사상보다는 생존이 우선시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테니까.
더욱이 지금은 수망교가 대놓고 팍스 FC에 견제를 놓고 있는 상황.
힐러들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세력 균형을 다져줄 필요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무소유’의 교리를 주장하는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전해주어야 할 것은······.
“새로운 깨달음을 줘야겠네요.”
무소유에 맞선 풀소유였다.
무소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