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96)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96화(96/240)
096화 무소유 (3)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힐러와 의사들이 보충될수록 한층 더 탄탄한 의료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을 터.
사상자들이 즐비한 아포칼립스 세상답게, 의료 서비스는 식량만큼이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좋은 수단이었다.
치료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회복된 각성자들은 자연스레 팍스FC의 훈련 프로그램을 밟았고, 그렇게 키워낸 팍스맨들은 고스란히 팍스FC의 충성스러운 전력이 되곤 했으니까.
“······지금 같은 시기면 더더욱.”
더군다나 우리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르나울이 준비하고 있을 대대적인 ‘개척 사업’.
나 또한 그에 맞는 방대한 세력을 구비할 필요가 있었으니.
더욱이,
‘그것뿐만이 아니지.’
지방의 군소 단체들을 흡수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의의가 있었다.
아공간에 저장한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
일본 지부의 상급 기관답게, 새로운 ‘존재 등록 신청서’를 출력할 수 있었으니까.
팔랑.
나는 가만히 팍스가 출력해준 문서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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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6위계)
귀하의 존재 등록을 환영합니다.
신청에 앞서, 아래 항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존재 등록 발급 준비물 : 본인을 대표로 하는 소속 단체.
존재 등록 발급 조건 : 100개 이상의 산하 단체 (각 1,000명 이상)
본인 : (자필 서명)
▣ 다차원 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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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요구된 조건은 100개의 산하단체.
팍스FC 아래로 100개 이상의 단체를 거느려야 했고, 하나같이 1,000명 이상의 소속원을 필요로 했다.
“마농족, 시카고, 프라하, 엘븐하임······.”
현재 팍스FC 산하에 소속된 단체는 서른 개가량.
적은 수는 아니지만, 요구된 100개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물론 소속원들을 잘게 쪼개어 인위적으로 단체를 개설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 수십만에 달하는 마석을 소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역시 그보다는······.”
어차피 눈앞에 표적이 있었다.
대구에서만 열다섯 개의 대형 병원을 병합했다는 수망교.
그 밖에 놈들이 산하에 두고 있다는 십수 개의 군소 단체를 포함한다면, 수망교만으로도 최소 서른 개 이상의 단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유독 한국에서 이렇게 우후죽순 단체가 형성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내가 뿌린 씨앗이긴 한데······.”
겸손도 과하면 병이라고, 지금 한국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다.
지역마다 설치된 포탈에서 갖은 물자들이 지원됐고, 팍스FC와 연계한 지역 대표들이 잊을 만하면 괴물을 토벌하고 다녔으니까.
이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기는 지났다.
각성자들은 파티를 이뤄 주도적으로 사냥에 나섰고, 그만큼 적지 않은 마석을 손에 넣고 있었다.
1만 개의 마석이 소모되는 단체 개설.
수십 개의 단체를 거느린 수망교의 발흥에는 알게 모르게 내 지분이 상당 부분 녹아들어 있는 셈이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뿌린 씨앗이었지만······.
“이제 거둬들일 때가 됐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 했던가.
지금은 한국에서의 내홍을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외세와의 싸움을 대비할 때.
집 안 정리의 일환으로, 산하단체를 잔뜩 거느린 수망교부터 고스란히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쭈?”
타이밍 좋게,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은.
***
문제가 발생한 지역은 역시나 대구.
환자 이송을 위해 출동했던 큰누나가, 누군가와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아니, 글쎄 이 미친놈들이······.”
우뚝 멈춰 서 있는 팍스FC의 앰뷸런스.
환자를 눕힌 들것 앞에, 흰 가운을 입은 사내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환자를 내놓으라고 하잖아.”
큰누나가 부르르 목소리를 떨었다.
한편, 사내들의 가운에는 푸른색의 꽃 모양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일견 선하면서도, 묘하게 광기가 떠올라 있는 얼굴.
개중 한 명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유성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나왔습니다. 환자는 저희 쪽에서 데려갈게요.”
유성 병원.
수망교에 소속되어 있던 병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대형 병원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고집을 부리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뭔 개소립니까? 애초에 우리 쪽에 구조요청을 한 환자인데.”
응급까지는 아닌,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환자.
하지만 들것에 누운 그의 손에는 분명 팍스FC가 보급한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애당초 구조 요청이 없었다면 우리가 차를 몰고 나타날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저세상에 처박힌 수망교도의 논리였다.
“이 사람을 포탈의 제물로 사용할 생각이잖습니까?”
“······뭐?”
“히, 히익!”
제물이라는 말에 누워 있던 환자가 경악했고,
이때다 싶었는지 수망교도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저 포탈을 타고 넘어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요. 당연하겠죠. 포탈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할 테니까요.”
놈의 뚫린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모론.
당연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환자들은 강남 세브란스로 이송됐고, 의료진들은 엘븐하임에서 포로들을 치료하고 있었으며, 각성자들은 팍스FC의 훈련 시설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한다 한들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꽤 교묘하게 찌르고 들어오네.’
그들이 대구에 없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놈들은 한 방울의 진실 섞인 거짓으로 대구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증거가 없는 한, 의혹은 해명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덜컹······!
환자가 겁의 질린 표정으로 들것에서 내려왔다.
다리를 절뚝이면서까지 내려온 것을 보니, 완전히 패닉에 빠진 상태.
수망교도가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자신들의 교리를 읊어댔고······.
“당신들은 마석을 긁어모으며 강해지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평화, 치유입니다. 다 함께 소유를 내던지면······.”
“얼, 얼른 갑시다!”
되레 환자가 수망교도를 재촉했다.
그들은 즉시 차에 올랐고,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우리 쪽에게서는······.
“······죽이면 안 되겠지?”
“······.”
분노한 김주연 씨께서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안 되지. 환자가 괜히 도망갔겠어?”
“제물? 그런 헛소리를 믿는다고?”
“믿지는 않아도 걱정은 되겠지.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세상이니까. 좀 허름해도 동네 병원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땅도, 자원도 아닌 사람.
놈들을 잡아 죽인다면 팍스FC의 악명만 높아질 게 분명했고, 그런 방법으로는 힐러와 의사들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뒤를 캐봐야지. 저렇게 남 호박씨나 까는 놈들치고, 깨끗한 놈 못 봤으니까. 마침······.”
나는 척하니 손을 가리켰다.
“저분이 뭔가 알고 계실 것 같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허름한 셔츠를 입은 남자.
나도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큰누나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김 간호사.”
.
.
.
그의 이름은 이국중.
과거 뉴스에도 자주 나오곤 했던 의사였는데, 큰누나와는 해외 의료 봉사를 통해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팍스FC를 찾아온 건데······ 이렇게 김 간호사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정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국중은 대구에서 큰 수술을 집도하던 중 멸망을 접했으며,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성 병원 소속의 의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팍스FC를 찾아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약이 필요해요.”
“약이요?”
“김 간호사도 알고 있겠지만······ 힐러들이 치료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외상뿐이에요. 여전히 당뇨나 혈관 질환 같은 건 의사들의 영역이고, 약으로 치료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한데, 이 근처 병원에서는 약품이 씨가 마른 상황이에요.”
환자들을 치료할 약이 필요하다는 것.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공간에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복사해온 전문의약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망교가 환자들을 속이고 있어요.”
“······속인다뇨?”
“약이 없어 사실상 치료가 중단된 환자들이 태반이에요. 하지만 수망교주는 여전히 치료가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요.”
“아니, 그게 속인다고 속여져요?”
“원래는 못 속이죠. 각성 능력이 없다면.”
이국중은 수망교주가 ‘마취’와 관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통증을 무마해주는 식으로 환자들의 치료를 가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마당에 CT가 있겠어요, 초음파가 있겠어요? 그저 통증이 사라졌으니 나은 거구나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수망교 소속 병원에 가면 병이 잘 낫더라, 수망교주 말만 잘 들으면 되더라 하며 돌아다니는 거예요. 고통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요.”
사실상 진통제만 들입다 부어버리는 격.
놈들의 종교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멸망을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식의 패배주의적 사상.
밑도 끝도 없이 명상과 평화를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마비를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내가 교수에게 대답했다.
“약이야 공급해 드려야죠. 하지만 환자들에게 약을 쥐여주려면 병원들부터 먼저 점유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병원들이 팍스FC 소속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인 이국중 교수.
그가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무단으로 점거한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환자들은 물론이고······. 힐러나 의사 중에서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아유, 걱정 마세요. 평화롭게 해결할 겁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물자 보급, 구조 활동, 거기에 인재 양성까지.
아낌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팍스FC였지만, 세계를 이끌 진정한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딱 하나 더 필요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팍스FC만의 철학이 있어야지.’
아등바등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눈앞의 멸망을 주도적으로 타개하고, 사태의 원흉인 상공회의소와 맞서 싸울 의식.
무한 보급의 수혜에 기반한 ‘풀소유’의 의식이 필요했으니까.
조금은 막연한 이야기였을까?
큰누나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되도 않는 누명을 씌우고 있다며? 우리도 해명할 건 해야지.”
하나하나 설명하면 될 것이다.
아공간 포탈은 사람을 물지 않는 착한 포탈이며, 우리는 쌀과 연탄을 나눠주는 자선활동을 하고 있고, 팍스맨들이 외계인들을 무찌르는 애국지사들인 반면 수망교는 외세에 들러붙은 매국노 찌질이 사기꾼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런다고 믿어줄까?”
큰누나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실로 ‘몸에 와닿게’ 전해줄 거거든.”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 말을 전하는 건, 다름 아닌 버프/디버프 능력을 갖춘 리디아가 될 테니까.
병원 사람들에게 풀소유와 무소유를 둘러싼, 천당에서 나락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급류를 몸소 체험하게 할 작정이었다.
“뭐, 다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문명생활의 보배.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를 따라 요동치는 디버프와 버프의 파도.
그건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에 가깝지 않을까?
“좋든 싫든 우리 팍스FC를 사랑하게 될 거야.”
무소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