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the fact that a new actor is a tycoon RAW novel - Chapter (171)
171막, 남겨진 일기 (完)
171막, 남겨진 일기 (完)
15화.
종영까지 하루가 남은 시점이었다.
사락.
9시부터 미리 서재에 자리 잡은 이철호 회장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집중해서 읽고 있는 와중에도 이따금씩 시선은 서재 한 켠으로 이동했다.
“···쯧.”
곁눈질하듯이 쳐다본 그쪽에는 여느 때처럼 KBC 채널이 켜져 있었고.
자연스레 시계 맡으로 보낸 눈길로 아쉬운 듯 읊었다.
“···아직도 삼십 분이나 남았구먼.”
몇 달 전부터 평일 이맘때만 되면 서재를 찾게 된 이철호 회장이었다.
처음 한 주 간은 일도 미뤄둔 채 시청을 사수하던 그였지만 둘째 주부터는 아니었다.
하루 일과를 미리 끝내놓는 건 물론 비서실장에게 따로 지시해 전 날 밤 야근까지 감행한 이철호 회장.
덕분에 깔끔하게 확보된 이 두 시간은 그에게 있어 소중한 힐링 타임이었다.
“흐음.”
이내 책장에서 벗어난 마음은 그를 또 다른 상념으로 유인해냈다.
얼마 전부터 꾸준히 염두에 두고 있던 생각.
“슬슬 드라마도 끝나고 나면······.”
자리를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지친 녀석도 위로할 겸.
지난 크리스마스, 막내아들이 남겼던 말은 여전히 이철호 회장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저는······ 이렇게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나눠먹는 거면 충분하니까요』
신형, 연희, 현수.
세 자식을 저택에 부르기로 마음먹은 이철호 회장은 지그시 감아보였다.
주름진 눈가를.
그 너머로는 여러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철호 자신의 젊은 얼굴도 함께였다.
『제발, 우리 아내···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죽은 아내의 그림자를 지워내지 못했다.
『똑같은 네 동생일 뿐인데 어째서 그러는 거냐?』
『맏형으로서 네가 양보해야지. 오히려 막내를 못 잡아먹어서야······』
지워내지 못한 그림자는 편애가 되었고 편애는 집착이 되었다.
『못난 놈』
『죽은 네 엄마를 생각한다면 네가 어찌···』
해선 안 될 말을 스스럼없이 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허나 늦은 깨달음은 어정쩡한 관계만을 가속시킬 뿐이었다.
단 한 번.
한 번만이라도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실수를 되짚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애진즉 겨울을 떨쳐내고 따스한 봄을 누리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 순간, 회한에 젖은 눈가로 다시금 세상을 바라봤다.
그녀의 그림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허탈한 사죄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어쩌겠소, 내가 그만한 위인일 것을. 미안하오.”
언젠가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녀를 마주하게 될 그 날.
부디 그녀를 볼 낯이 있기를.
이철호 회장으로선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 * *
16화.
마지막 촬영분이 방송되는 종영 날.
“자아, 우리 구명석 국장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일동 박수!”
“으와아아아!”
“국장님 사랑합니다!”
스태프와 출연진을 비롯한 백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회식 자리.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국민 드라마의 탄생과 그 마지막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한편 구명석 국장을 유난히 반기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은 구명석 국장에게 있어서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절호의 기회였다.
덕분에 마케팅은 물론 예산과 편성, 그 외 모든 부분에서 구명석 국장은 드라마에 총력을 기울여주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밀어준 것이었다.
그런 구명석의 등장에 모두가 박수세례를 날리며 한 번 더 잔을 부딪혀댔다.
“국장님, 이쪽입니다 이쪽!”
한편 상석으로 이끌려간 구명석 국장의 앞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준 메인 작가와 주연배우, 피디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쇼 국장님, 영광입니다!”
“허허, 영광은.”
그 중 남자 주연을 맡았던 한 배우와 눈이 마주친 구명석 국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꺼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구국장님.”
“별 말씀을, 당연히 축하해주러 와야지 않겠나? 이배우랑 차작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놨는데.”
그리 말하며 테이블을 스윽 훑는 구명석 국장에 눈에 들어온 건 겸양따윈 모르는 어느 스타작가였다.
홀짝.
괜히 얼마 안 찬 잔으로 목을 축인 차지윤은 눈동자를 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 구국장님이 힘써주신 덕분이죠, 뭐······.”
“허허! 차작가가 그리 말해주니 이거 감동이구먼?”
그러고선 한 명 한 명을 마주하면서 축하의 말을 돌렸다.
“홍예린 배우도 아직 신인이라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네. 웬만한 여배우랑 견줘도 손색없겠어 이제?”
“과, 과찬이세요 국장님!”
실제로 캐스팅 건부터 많은 이슈를 몰고 온 홍예린에게 전해진 부담은 누구보다 가장 강했을 터였다.
허나 오히려 완벽한 케미를 선보이며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홍예린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인사를 돌리자 슬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송국 관계자 한 명이 은근슬쩍 다가와 청했을 만큼.
“국장님! 조금 있으면 마지막 광고인데, 그쯤 거국적으로 건배사 한 번 해주시면 어떻습니까?”
“내가 말인가?”
“예, 예?”
그런 관계자의 말을 물린 구명석 국장은 도리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 건 이 자리에서 가장 공이 높은 사람이 맡아야지. 어찌 내가 맡겠나?”
그러한 눈길이 향한 방향은 다름 아닌 이번 드라마의 일등공신이 앉아있는 방향이었고.
“이신우 배우.”
“네, 네?”
직접 여배우 캐스팅에도 힘을 실은 걸 떠나 누구보다도 이번 드라마에 영향을 준 게 바로 이신우라는 구명석의 생각이었다.
“거국적인 건배사, 부탁하겠네.”
그건 다른 이들도 당연히 마찬가지였고.
“아하하! 맞습니다 이배우님이 맡아주셔야 딱이겠네요!”
“찬성입니다 찬성!”
갑자기 쥐어진 마이크-를 가장한 술병-에 곤란해하는 이신우.
그럼에도 모두의 시선은 어렴풋이 그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덕분에 허공을 헤매던 이신우의 시선이 슬쩍 메인작가를 바라봤다.
명백한 구원 요청에 차지윤 작가도 입을 떼길.
“저도 꼭 듣고 싶은데요? 이신우 배우의 건배사.”
오히려 그녀의 말을 신호탄으로 스태프들이 들고 일어서버렸다.
“푸하핫! 자자, 슬슬 마지막 광고 스타트합니다!”
“다들 주목! 이배우님께서 건배사 하십니다!”
“우와아아아!”
“이신우! 이신우!”
결국 도주 경로를 잃어버린 이신우가 피식 웃길 잠시 후 마지막 광고가 시작되었다.
종영을 맞이할 마지막 화까지 1분 전.
“······그동안 다들 촬영 도와주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감사했습니다. 좋은 분들과 좋은 기회 나누게 되어서 기쁘고···.”
“어어, 광고 끝나는데?!”
“짧게 한 마디! 마무리!”
갑작스런 건배사에 주섬주섬 심경을 고백하던 이신우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너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 이신우의 전산 능력이 천천히 망가져가길.
후끈하게 끌어올라온 분위기를 어떻게든 터뜨려야 한다는 조바심에 결국 저질러버린 이신우였다.
“제, 제 사비로 스태프분들 전원 포함 유럽 여행! 6박 7일로 쏘겠습니다!”
“키야아아아!”
“이신우! 이신우!”
“신우씨 사랑해요!”
곧이어 광기의 도가니로 휩싸인 스태프들 사이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주 전부터 상승곡선이 꺾인 채 상하로 줄타기를 하던 시청률.
“몇 프로야? 몇 프로!”
“빨리 집계 안 해?!”
오르락내리락하던 시청률은 드디어 명백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14화 27%에서 15화 29%로.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화.
30.8%를 기록하면서.
* * *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독립영화나 공동 주연을 맡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온전히 내 손으로 쟁취해낸 것 같은 성취감.
모든 주목을 받아낸 끝에는 달콤한 만족감이 놓여있었다.
비록 홍예린의 몫도 적진 않았지만 그녀도 결국은 내가 직접 뽑아낸 결과였으니까.
걱정스러웠던 것과 달리 너무나 폭발적인 흥행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주늑이 들게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그만두실 겁니까 이제?”
“네?”
물어본 이는 따스한 커피를 타온 유성태 사장이었다.
원래는 지나갈 인연이었으나 이제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어버린 사내.
“정상에 오르고 나면 꼭 지친 몸을 뉘이며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말씀하시는 게 그래보여서.”
“푸훗, 설마요.”
지난 몇 년 간 많은 것을 쌓아왔다.
모두 내가 원하던 것들이었다.
덕분에 후련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게 사실이었다.
“아직 한참 남았죠.”
하지만 아직이었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갈증은.
고대했던 열망은 여전히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으니까.
굶주렸던 그만큼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신우씨라면.”
한편 농담이었음을 밝히며 소파에 앉은 유성태 사장은 넌지시 내게 경고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쉬셔야 합니다.”
“풋, 그래야죠.”
1인 기획사를 만든 뒤부터 충실히 내 곁을 지켜준 유성태 사장.
그의 노고만큼이나 나를 향한 걱정을 못 느낀 건 아니었다.
크게 터뜨린 만큼 적당한 휴식기가 필요하기도 하겠지.
한편.
“그나저나 신고식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신고식이라면···.”
가볍게 이야기가 정리되자, 유성태 사장은 잠시 후 주제를 돌렸다.
앞서 꺼낸 1인 기획사도 이제 3인 기획사. 아니, 정확히는 어엿한 배우 소속사로 탈바꿈한 상황.
조정훈을 영입한 뒤 작은 회식을 한 것처럼 이번 홍예린도 회식을 한 차례 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렇네요. 조만간 괜찮은 곳으로 한 번 해보죠.”
“좋은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한 번.”
그 후로 어느 정도 나머지 말을 정리하곤 슬슬 나도 몸을 일으켰다.
“아 참, 약속 있으시다고 하셨죠?”
“네, 잠깐 볼 사람이 좀 있어서.”
밝히진 않았지만 그 대상은 사실 유성태 그도 알고 있는 이였다.
도유정.
숙취가 깨도 한창 깼을 그녀에게 보낸 연락에 답장이 와있었다.
* * *
자신의 침대 맡에서 눈을 뜬 유정은 곧 5가지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쳤다.
가장 먼저, 부정(Denial).
“꾸, 꿈 아닌가? 설마, 아무리 취했어도 그랬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인 분노(Anger).
“아니, 언니! 그 정도로 취할 때까지 안 말리고 뭐했어! 대체···.”
세 번째 협상(Bargaining).
“그, 근데. 이신우 배우님도 많이 취했잖아? 까먹지 않았을까? 기억 안 날 수도 있잖아···.”
네 번째로는 우울(Depression)이었다.
“···망했어, 다 망했다고! 이건 고백도 뭣도 아니고··· 그냥 징징댄 거잖아. 아아······.”
그러게 차라리 진즉에 고백을 하지.
왜 마음만 졸이다 사고를 치냐는 한주희의 핀잔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위기를 초래했다.
결국 눈시울을 붉힐 지경까지 이르던 유정에게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무, 무, 무슨 의미야 이거? 어? 왜 나한테 전화를······.”
“나한테 물어볼 시간에 전화를 받았으면 됐잖아 이 멍청아!”
덕분에 마지막 통첩처럼 전해진 이신우의 문자는 이러했다.
할 얘기도 있고 오늘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겠느냐고.
“···.”
똑바로 꾸밀 생각도 못한 채로 숙소 근처로 나선 유정은 기다렸다.
정작 살짝 붉어진 눈시울에 수수한 차림이 오히려 뭇 남성의 심장을 녹일 만한 비주얼을 자아냈지만.
‘무슨 생각이지? 왜? 설마, 막 부담스럽다고 앞으로는 거리를 두자고 하려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유정은 얼마 안 가 딸꾹질을 하게 됐다.
“기억 나요?”
“끅!”
배우가 아니라 가수인 만큼 놀란 티는 전혀 숨기지 못했음에도 시치미부터 떼는 그녀였다.
“뭐, 뭐가요?”
“그 날 술자리에서 저한테 물어본 거 말이에요.”
“···.”
물론 오리발도 거기까지였다.
눈가는 당연하고 온통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던 유정이 고개를 푹 수그렸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비언어적 표현으로 대답을 들은 이신우가 피식이며 덧붙인 건.
“왜 앵글이 빗나갔겠어요.”
“에, 에?”
“왜 빗겨나가게 찍었겠냐구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이신우가 확답했다.
“안 했다구요. 그냥 하는 척만 한 거지.”
“···.”
기쁨.
수치스러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 유정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새에 이신우가 웃으며 물었다.
“푸훗,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아.”
빨갛게 익다 못해 아예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리카락을 빙글 돌리며 꼰 유정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게 차라리 진즉에 고백을 하지. 왜 마음만 졸이다 사고를 치냐?’
쯧쯧거리며 혀를 차던 한주희의 핀잔이 뇌리로 스친 건.
‘으휴, 차라리 그냥 한 번 들이박아보지!’
꿀꺽.
무언가를 결심한 도유정이 서둘러 대답했다.
“···궁금해하면 안 돼요?”
“네?”
도리어 이신우를 당황시키면서.
“내가 좋아하는데.”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당돌히 되묻는 도유정.
“좋아하는 사람이 진짜 키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
마주선 이신우를 빤히 응시하며 묻는 도유정이었다.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그 덕에 꽉 쥔 주먹을 숨기며 용기낸 말.
차츰 굳어가던 이신우의 표정이 돌연 부드러워진 건 그러한 찰나였다.
“킥.”
“···뭐, 뭘 웃어요?”
애써 낸 용기를 바로 시들어버리게 만드는 이신우.
“그래서 아쉬워한 거예요?”
“···뭘요?”
별안간 돌아오는 질문에 주춤거리는 도유정을 향해 이신우는 기세등등하게 되뇌었다.
그녀가 술자리에서 토로했던 불만을.
“자기랑은 안했지 않냐고. 하는 척만 하지 않았냐고.”
“···그만.”
“네?”
결국 글썽이는 눈으로 백기를 드는 도유정이었다.
“그만! 더하면 저 도, 도망갈 지도 몰라요?”
아니, 다급히 경고하는 도유정의 모습은 일말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신우의 입가에 미소를 더 깊게 패이도록 만들었지.
“우리 만날래요? 앞으로도 자주.”
반대로 귓불까지 빨개진 도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아주 힘겹게나마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만 물어보라니까.”
단어 그대로 좋아죽어가는 도유정이었다.
* * *
최종 시청률 30.8프로를 거둔 드라마가 끝난 지 일주일이 된 시점이었다.
서울 중심의 거대한 저택.
이철호 회장이 그곳으로 네 자식들을 모두 불러모은 건.
공교롭게도 먼저 저택에 도착한 건 기특한 막내아들이었다.
“드라마 잘 봤다 신우야.”
“···감사합니다 아버지.”
“재밌더구나.”
기쁘게 웃는 이철호 회장의 얼굴은 이신우로서도 저릿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한편.
“어, 신우 너 먼저 와있었구나?”
“누나 왔어?”
둘째인 이연희를 따라 얼마 안 가 셋째 이현수도 저택에 도착했다.
정겨운 인사는 없지만 이전의 불편한 시선은 보다 누그러져있었다.
“형도 안녕?”
“···흥.”
콧김을 내쉬고 슬쩍 피하는 이현수의 뒤편 저쪽에선 또 한 사람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이철호 회장은 슬며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신형이도 왔구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녀석, 죄송하기는···.”
터벅터벅 걸어간 이철호 회장은 괜찮다는 듯 장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네 명의 자식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럼 슬슬 옮기자꾸나. 다들 출출할 터이니.”
발걸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가벼웠다.
살얼음판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모래사장보다는 딱딱한 걸음이었다.
그 끝에는 미리 준비해놓은 만찬이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가장 먼저 상석에 앉은 이철호 회장을 시작으로.
이연희.
이신우.
그리고 연신 눈치만 보던 이현수가 자리가 앉고 나자.
마지막으로 이신형이 막내의 맞은편에 마주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철호 회장이 곧 연한 미소를 지었고.
“들자꾸나.”
그와 함께였다.
“잘 먹겠습니다 아버지.”
굳게 닫혀있던 입을 뗀 이신형이 형제들을 천천히 돌아본 건.
“너희도 맛있게 먹어라.”
바로 왼쪽에 붙어앉은 셋째부터 대각선에 앉은 여동생까지.
“연희랑 현수···.”
인사를 건넨 이신형은 슬며시 맞은편의 막내를 쳐다봤다.
그리고 덧붙였다.
“신우 너도.”
“···응 형도.”
어색하게나마 받아친 이신우를 따라 이연희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어벙한 표정을 지은 이현수는 그런 맏형과 막냇동생을 번갈아봤고.
달그락.
단란하지만은 않은 식사가 이어졌다.
말소리보다도 부딪히는 식기의 소리가 컸지만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문득 성냥팔이 소녀의 일화가 머릿속을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성냥팔이 소녀를 외면했어요. 성냥팔이 소녀는 혼자였어요.」
지독히도 외로웠던 생(生)이었다.
홀로 견뎌낸 비극.
그 비극을 기록해온 일기장을 덮기로 했다.
오랜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웠던 할머니의 품에 다시 안긴 소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슬며시 짓고 만 미소가 움찔거렸다.
비록 단란하지만은 않은 식탁일지라도. 여전히 걸림돌이 남아있는 현실일지라도.
썩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성냥 대신 자신을 불태우며 바라왔던 그리운 맛을.
– ···
그 즈음, 잠잠한 휴대폰으로는 한 통의 부재중 기록이 남고 있었지만.
닐 크레이그.
딸아이의 성공적인 데뷔에 힘입어.
할리우드를 연이어 강탈할 블록버스터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그에게서.
이 또한 남겨진 일기가 될 터였다.
누군가에게 깊은 추억으로 남을 새로운 일기가.
-신인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