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131)
지옥에서 독식-131화(131/346)
131화. 오래된 당신에게 (5)
허수아비는 색깔도 없이 하얀 모습이었지만, 현무 자신의 모습을 본 땄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탐을 꺼내든 모습도, 오셰트의 육손 손아귀도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외형만 따라한 것 같군.’
허수아비와 일체되어있는 것을 보니 진짜 아이템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무는 조심스럽게 탐을 들어 허수아비를 겨냥했다.
그 순간, 허수아비는 아주 약간의 오차도 없이 현무의 동작을 따라했다. 거울을 보는 듯한 모습에 현무는 놀랐다.
한 걸음 물러서자 허수아비도 그 동작을 따라했다.
“뭐야, 이거…… 설마 ‘자기와의 싸움’ 같은 컨셉이냐?”
뭐 하자는 거지? 이런 컨셉은 너무 많이 우려먹어서 더 이상 내보내기도 민망한 그런 이벤트 아닌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성장이 정체되어있던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마침내 폭풍 같은 성장을 거두는…….
그러나 현무는 딱히 성장 정체랄 만한 것도 없었고 자기 확신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현무는 약간 같잖다고 느꼈지만 무작정 탐을 휘두르는 대신, 다른 허수아비들의 기색을 살폈다.
허수아비들은 단순히 길을 터는 것을 넘어서 싸우기 충분한 간격을 벌리고 있었다.
물론 격전이 벌어지면 이 정도쯤은 좁겠지만, 링의 협소함도 감수하고 싸울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야, 거기 너. 지금 보고 있냐?”
현무는 어슬렁거리며 아마도 허수아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이것들로 날 죽여. 왜 굳이 저 잘생긴 인형을 만들어서 내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건데? 목적이 뭐야? 정신적 데미지?”
지직. 스피커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침묵 뒤 기계음이 들려왔다.
“통행료.”
“뭐?”
“통행료다. 충분히 가치 있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으니까 지불 능력을 증명해 봐.”
“그게 웬 산적 두목 같은 소리야?”
현무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스피커가 뚝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철컹,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현무를 향해 돌아섰다.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았지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현무는 입술을 씨근거리며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현무는 자신의 모습을 딴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움직였다. 역시나 허수아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칭으로 움직였다.
바둑을 둘 때 무조건 대칭으로만 두는 상대가 떠올랐다.
거울과 싸우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의 싸움은 바둑이나 거울과는 다르다.
현무는 곧장 탐을 휘둘렀다. 허수아비도 마주 탐을 휘둘렀다.
콰자자작! 하지만 허수아비가 휘두르는 칼날의 속도는 현무보다 한 템포 느렸다.
현무가 어슬렁거리는 사이 뿌려둔 거미줄이 정확히 놈이 칼을 휘두르는 궤도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미줄은 맹약의 구속으로 변화하여 칼날을 잡아당겼다.
현무의 탐이 허수아비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콰직, 콱! 현무의 탐도 쇠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느려졌다.
다른 허수아비들이 갑자기 끼어들어 탐을 잡아챈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허수아비들의 개입에 현무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퍽. 현무의 얼굴을 한 허수아비가 현무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시작으로 몰려든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현무를 발로 차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빠져나가려 해도 빈틈이 없는 포위망이었다.
현무는 아주 나쁜 말들을 많이 외친 뒤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온몸이 멍이 들고 삭신이 쑤셨다. 하지만 심각한 상처도 없고, 죽지도 않았다. 언제든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무는 누운 채 소리쳤다.
“뭐하는 짓인데!”
“내가 다른 스케어크로우들이 끼어들지 않을 거라고 한 마디라도 말했었던가?”
뻔뻔한 허수아비의 말에 현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만 했을 뿐, 언제도 정정당당한 1:1 승부를 하자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럼, 뭐. 통행료라는 게 다 박살내고 오라는 뜻이었냐? 가장 확실한 통행료긴 하네.”
그거라면 차라리 단순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수아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통행료는 정정당당한 1:1 승부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개소리지?”
“불공정한 승부라는 건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텐데. 나는 스킬도 못 쓰고 아이템도 없어.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정당당한 승부를 해라.”
“그게 뭔데?”
“페어 플레이를 하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허수아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현무는 풀이 죽었다.
정정당당이라니. 그런 건 3살 때 쯤 죽여 버렸던 것 같은데.
정의나 공평함 같은 것은 무엇보다 조기교육이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은 한 번도 공정한 적이 없는데 언제 자신이 정정당당한 싸움을 배워봤겠나.
‘예르단을 소환할까?’
현무는 지금쯤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예르단을 떠올렸다.
예르단의 힘이라면 가볍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허수아비들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르단이 이 모든 허수아비를 다 뚫을 수 있을까?
‘힘들 것 같군.’
더 큰 문제는 이다음에 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의 전력은 허수아비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좋아.”
현무는 탐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오셰트의 육손 손아귀도 해제했다.
지배나 독혈은 소용없을 테고, 거미줄을 뽑아낼 수도 없으니 맹약의 구속을 사용하는 것도 한정적이다.
‘남은 건 배틀 헬퍼 뿐이군.’
이 정도는 들키지 않겠지? 현무는 맨손으로 자세를 잡았다. 현무의 허수아비도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자세를 잡았다. 현무는 허수아비와 처음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맨손으로 싸웠었다.
허수아비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현무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네깟 놈들 천 번은 상대해봤다고 말했을 텐데?”
***
“허억, 허억…….”
현무는 숨을 몰아쉬며 허수아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수아비는 가증스럽게도 현무가 숨 쉬는 동작까지도 따라 하고 있었다.
벌써 4시간 째. 현무는 아직도 허수아비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처음 30분 동안, 현무는 허수아비를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허수아비는 확실히 현무보다 많이 두들겨 맞긴 했지만, 애초에 주먹으로 망가질 놈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싸움이 대등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시간 째에 이르자, 현무는 허수아비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하게 되었다.
놈은 여기저기 피복이 벗겨지고 골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현무는 허수아비를 노려보다가 포션을 꺼내 마셨다.
허수아비는 그 동작마저도 따라하는 흉내를 내더니, 기껏 벗겨놓았던 피복과 상처들을 순식간에 복구 시켰다.
“이 자식, 정정당당한 승부 하자며!”
“뭔가 문제라도?”
애초부터 정정당당할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현무는 인간이다. 눈을 맞으면 앞이 안 보이고 코피가 나면 숨쉬기 힘들어지며, 뭣보다 맞으면 아프다. 고통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하지만 허수아비는 전혀 그런 반응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정정당당한 승부가 되는 건데?”
“나는 말했다.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라고. 네가 포기해서 나보다 약해진 것을 왜 내가 맞춰줘야 하지?”
장난하자는 거냐.
이쯤 되면 녀석이 시간을 끌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게 아닌가 싶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현무는 10초동안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애초부터 정정당당한 싸움 같은 건 없었다고. 그런 걸 믿은 자신이 바보라고.
그리고 분석에 들어갔다.
‘이녀석…… 전투 스타일이 점점 나랑 비슷해지고 있어.’
처음에는 기본적인 허수아비의 전투 방식을 따라갔다.
수십 가지 실전 무술과 더러운 수싸움. 현무에게는 향수마저 느낄 정도의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공방을 주고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현무의 전투 방식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흉내를 넘어서 응용, 진화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현무는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배틀 헬퍼?’
허수아비 따위가 전설 스킬을 가지고 있을까 싶었지만, 못할 건 또 뭐있냐 싶었다.
여긴 난이도: 지옥인데.
이렇게 빠른 속도로 상대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은 배틀 헬퍼 밖에 없다.
현무는 기가 막혔다. 상대 몰래 배틀 헬퍼를 써서 압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대방도 똑같이 배틀 헬퍼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현무의 전투 스타일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학습하면서.
싸움 방식은 똑같은데, 능력치는 더 우월하면서, 신체적 조건 또한 인간인 현무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억울한 것은 현무는 상대로부터 배울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조금 나아진다 해도 허수아비는 근소한 차이로 계속해서 앞서나갈 테니까.
“하…… 좋아. 배틀 헬퍼는 허락된다 이거지.”
하지만 현무는 이거야말로 기회라고 여겼다.
“그럼 이것도 준비하고 있었냐?”
현무는 너무 노골적이게 될까봐 절제하고 있던 특성을 끌어올렸다. 현무의 손등 위로 보랏빛의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틀 헬퍼: 강기 특성 발현.]현무는 즉시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수아비는 표정이 없어서 당황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현무를 향해 마주 손을 뻗은 녀석에게 강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놈은 현무의 손을 옆으로 퉁겨내고 다른 한 손을 뻗으려 했다.
강기에 부딪친 팔이 되려 부러지기 전까지는.
허수아비의 피복이 박살나 벗겨지면서 골조가 완전히 드러났다.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축 중 하나가 부러지면서 손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현무의 손의 궤적을 빗겨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현무는 멈추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쾅! 허수아비는 망설임 없이 현무가 강기를 두른 두 팔의 궤도에 팔을 던져 넣었다. 두 번째 팔도 박살 났지만 이번에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두 팔을 무력화시킨 현무는 끝이 보이는 듯 했지만, 동시에 초조감이 들었다.
‘다른 허수아비들이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여기까지는 허용선인데.’
놈의 움직임은 주저함이 없고, 포기한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세 번째.
탁, 콰각! 허수아비는 현무의 주먹을 발로 차 넘기는 동시에 몸을 띄워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아예 맞지도 않고 넘어간 것이다.
놈은 새로운 방식의 공격에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에 이르러서는 주먹을 스칠 수도 없었다.
허수아비는 팔이 망가졌기에 회피 일변도로 일관했지만, 팔을 둘러싼 피복은 회복되고 있었다.
현무는 잇소리를 내며 다시 허수아비를 몰아붙였다. 한심하게 빗나간 공격에 허수아비가 안쓰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더 한심하군. 힘이 좀 세졌다고 방식이 더 단순해져서야 쓰나?”
“누가 단순하다고?”
현무는 마침내 원하던 자리에 섰다.
처음 싸움을 벌였을 때 거미줄을 뿌렸던 자리. 그곳에서 현무는 맹약의 구속을 발동시켰다.
허수아비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미 몸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두른 상태였다.
쇠사슬들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수아비를 구속했다.
“망할 자식.”
쇠사슬에 강기를 불어넣는 순간, 콰직거리며 허수아비의 몸체 안으로 쇠사슬들이 파고들어가며 몸을 우그러뜨렸다.
현무는 주저 않고 허수아비의 얼굴을 후려쳤다.
현무가 아이템을 쓰기 무섭게 다른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현무는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예르단!”
시커먼 어둠을 가르고 예르단이 튀어나왔다.
맹포한 포효와 함께 가장 가까이 있던 허수아비를 들이받자, 예르단과 벽 사이에 낀 허수아비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구조물이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작에 이럴걸, 개 같은 수작에 농락당해서…….”
현무는 탐을 꺼내들고 강기 탓에 너덜너덜해진 허수아비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현무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던 허수아비는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한쪽뿐인 붉은 빛이 깜빡거리며 명멸했다.
“좋…… 아. 통과…… 다. 통행료는 충분히…… 지불됐다.”
“까고 있네.”
현무는 그대로 쇠사슬을 휘둘러 다른 허수아비를 향해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