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152)
지옥에서 독식-152화(152/346)
152화. 붉은 과육 (1)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현무는 미소를 띤 채 서지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예.”
볕이 환한 대낮에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밤중, 인적이 드문 사유지의 산 중턱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지.
기척도 없이 어느새 현무의 손에는 검은 손 단검이 쥐여져 있었다. 검은 칼날은 달빛조차 먹먹하게 집어삼켰다.
현무가 서지후에게 권속이 되기를 제안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었다.
서지후의 성장 속도가 하도 느리니 현무가 푸념하듯 제안했던 것이긴 하다.
간편하고 빠르게 레벨이 오른다는 말에 솔깃해진 서지후는 관심을 가졌지만, 일단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말에 대답은 보류했다.
당연히 그런 전제조건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지후는 오늘 이렇게 찾아왔다.
“괜찮겠어? 내 권속이 된다는 게 그냥 한번 죽고 만다는 건 아니야.”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박휘소 씨처럼.”
서지후는 현무의 자질구레한 업무들을 대신 수행하면서 박휘소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현무는 반쯤 서지후를 권속으로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지후가 정말 그 의미를 알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건 그냥 가입절차고. 네 목숨, 네 신념, 네 자유의지까지 전부 나한테 맡긴다는 거야. 기본적으로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내가 필요하면 네 밑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다 나를 위해 쓰게 만들 거다. 영원히.”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거군요. 딴말하기 없깁니다.”
현무는 기가 차는 듯 웃었다.
“나한테 불만 한 마디만 했다간 연봉을 올려서 닥치게 해주지.”
“감사합니다.”
자진해서 죽어주겠다는데 현무로선 말릴 이유가 없다.
현무는 천천히 칼끝을 들어올렸다.
서지후는 긴장한 표정으로 단검을 바라보았다. 찌를까? 아니면 벨까?
죽어보는 건 처음이라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죽을 때 추잡한 모습을 보인다는 지식이 떠올랐다. 속을 비우고 오길 잘했다.
현무의 입이 뻐끔 열렸다.
다음 눈을 떴을 때, 서지후는 자신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밤이었다.
달이 많이 움직이지 않은 걸 보니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현무가 쪼그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지후.”
“어…… 끝난 겁니까?”
“그래.”
“생각보다 좀 싱거운데요. 닭의 피를 뿌리거나 피로 가득 찬 욕조에 머리를 담갔다가 빼거나, 달을 향해 제물을 불태우며 춤을 추거나 그런 걸 기대한건 아니지만…….”
“그래? 난 자질구레한건 질색인데, 그럴싸한 의식이 있으면 소속감이 좀 더 커진다고 하긴 하더라. 그럼 한 번 구상해 봐.”
서지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려한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산속에서 낙엽투성이가 되어 5분 만에 끝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동시에 오싹함이 느껴졌다.
자신은 현무가 뭔가 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레벨이 낮긴 하지만 능력자인 자신도 이지경이라면, 일반인은 어떨까?
“어때, 뭐가 변한 게 좀 느껴지냐?”
현무의 말에 서지후는 몸 상태를 살폈다. 뭔가 변화한 것이 느껴지긴 했다. 몸이 훨씬 가볍고 기운도 충만했다.
“넌 레벨이 낮아서 증가폭도 좀 될 거다.”
서지후는 자신의 레벨을 확인해보았다.
레벨 24. 태백 던전에서 2레벨이 오른 걸 감안해도 17레벨이나 상승했다.
터무니없는 상승치였다. 현무도 그걸 확인했다.
‘역시 생각대로 이름을 부르는 상대라면 증가폭이 상승하는군.’
일반적인 모기나 고블린 같은 것들은 권속으로 삼는다고 해서 레벨이 크게 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박휘소나 키르손, 서지후 같은 경우는 달랐다. 이른바 ‘네임드’라는 종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귀속되어, 더 많은 힘을 받는 자.
게다가 자신의 레벨이 상승하면서 덩달아 권속들도 함께 레벨이 오른다니, 얼마나 치사한가.
“레벨이 상승했으니까 이제 숨어있는 것 말고도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스킬 위력도 강해졌을 테고.”
“좀 더 다양한 전략이 가능해지겠군요. 흠, 집에 가서 로베스피에르에게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그건 또 뭔…….”
“제가 키우는 햄스터 이름입니다.”
햄스터한테 그런 이름 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혹시 자유주의자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이런저런 짓을 하며 쾌감을 얻는 변태 같은 취향인가?
현무는 서지후의 왼손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왼손에 있는 문양과 비슷한 것이 좀 더 짧지만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현무는 그 손바닥 위에 책 한권을 툭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아아, 이것은 마법서라는 거다.”
서지후는 현무의 말투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책을 펼쳐보았다. 잠깐 눈동자가 몽롱해지긴 했지만, 곧 초점이 잡히면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카자트에게서 빼앗았던 마법서였다.
현무 역시 마법이해를 습득함으로서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난이도: 지옥에서 쓸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난이도: 쉬움에서는 다르다.
4성 던전에서 카자트가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듯이, 서지후가 이걸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팀 서너개 급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읽고,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완전히 마스터 해놔.”
현무의 입이 열리고서야 서지후는 간신히 마법서에서 눈을 떼냈다.
“……상당히 귀해 보입니다만. 혹시 이게, 제가 가진 스킬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서지후도 자신이 ‘마법 이해(일반)’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개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아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는데, 현무가 대뜸 마법서를 구해온 것이다.
위력은 알 수 없지만 스킬이 다양해진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네 인생은 앞으로 나한테 저당 잡힌 셈이니 선물로 준 거다. 이걸로 밤낮없이 나를 위해 봉사하라구.”
“큭…… 아무래도 평생 강현무 지부장님 밑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철밥통 엘리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갑자기 손해 본 기분이 드는군.”
현무는 등을 돌리며 서지후에게 턱짓했다.
“아무튼 잘됐다. 조만간 1분기 결산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박휘소도 와있으니 나머지도 부르면 되겠군. 올라와서 커피 한잔하고 가라.”
***
째깍, 째깍.
요한은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3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이한 시간 흐름을 믿을 수가 없었다. 3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강현무가 마실 것을 가지고 온다며 나간 지 3분 동안 이 테이블을 둘러싼 사람들은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요한은 시선을 돌려 왼쪽에 앉아있는 서지후를 힐끔 보았다.
서지후는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할 말이 있으면 보고서나 데이터로 때리는 걸 좋아한다.
그는 그렇다 쳐도 오른쪽에 앉아있는 중절모를 쓴 노신사야말로 자물쇠 같은 인간이었다.
실내인데도 장갑과 코트, 모자까지 푹 눌러쓴 노신사는 자신을 ‘박휘소’라고만 밝힌 뒤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숨 막히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중앙의 테이블 외에 어두운 곳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것들이었다.
검은 고블린과 은발의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얌전히 있을뿐더러 박휘소의 지시에 순순히 행동하는 것을 보고 ‘테이밍’ 스킬과 비슷한 게 아닐까 여겼다. 그렇다 쳐도 소년의 정체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조용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그 역시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대화를 꺼내려 해도 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우중충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박휘소와 서지후가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도 함께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4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철컥. 그때 문이 열리고, 현무가 들어섰다.
“자, 영감님은 홍차, 지후는 찬 물, 사제님은 포도주입니다.”
현무는 순서대로 탁탁탁 앞에 잔과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서지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현무를 바라보았다.
“주시는 대로 먹겠습니다만, 저희 중 아무도 딱히 주문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요?”
“내 선입견이 반영된 결과니까 그냥 먹어. 이미지에 맞게.”
심지어 박휘소는 홍차가 전혀 맞지 않는 건지 냄새만 맡고 내려놓았다.
하지만 현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요한도 포도주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사제님은 왜 포도주 안 마셔요?”
“금주 중입니다.”
“왜…… 아.”
요한은 중독 증세가 완전히 사라진 김에 아예 의존성이 있는 모든 것을 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었다.
술을 마시다보면 자연스럽게 약물 생각도 다시 날 수 있으니까. 결국 현무가 가져온 것을 입에 대기라도 한 것은 서지후 뿐이었다.
“뭐, 상관없죠. 중요한건 결산 회의니까.”
현무는 테이블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자, 그럼 이걸로 팀의 개요가 대략적으로 잡힌 것 같군요.”
팀의 개요? 의아해하는 시선이 스치는 사이 현무가 박휘소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영감님, 지금까지 하던 대로 언더그라운드를 장악해주세요. 하지만 좀 더 공격적으로.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까지 확장하고, 가능하면 일본과 중국까지 세를 터주세요. 조만간 국력과 헌터들이 쭉 북쪽으로 빠질 테니 기회가 생길 거예요.”
“인력 소모가 클 것 같습니다만.”
“고블린이나 랫맨은 얼마든지 지원해줄게요. 그거면 어지간한 헌터들보다는 나을걸요. 예르단한테도 이것저것 가르쳐주시면서 부려먹고. 그거면 막힐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현무는 이미 꼼꼼하게 생각해뒀던 건지 막힘없이 지시했다.
“그리고 서지후는, 오대성 전 단장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었나? 그래. 나 대신 전능련 장악과 신진 양성에 힘쓰도록 해. 뭣보다 중요한 건 다른 클랜에 가입한 헌터들도 전능련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는 거다. 전능련이 일개 하나의 클랜이 아니라 범국가 단체가 되도록 만들 거야. 오대성은 간판 역할로 쓰기에 좋은 사람이지. 어지간한 헌터는 전부 전능련의 우산을 쓰게 만들어.”
“그 많은 헌터들을 감당할 예산이 있을까요?”
“우리 돈으로는 못하지. 하지만 눈먼 나랏돈이 있잖냐?”
현무는 껄껄 웃었다. 그는 박휘소의 홍차 잔과 서지후의 물 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끌고 왔다. 그리곤 그걸 한쪽으로 쭉 밀면서 말했다.
“평양 수복계획이 시작되면 태성이 돈을 쏟아 붓겠지? 그래도 태성 혼자서는 못 올라갈 거야. 군대도 올라간다. 그런데 그 군대를 통솔할 대 몬스터 전문가들도 있어야겠지? 우린 그 역할을 먹는다.”
그러면서 서지후의 물 잔에 홍차를 부어버렸다. 물 잔은 홍차의 색으로 곧 탁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태성과 국가가 함께 밀고 올라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론 태성과 전능련이 올라간다. 우린 국가권력을 대행할 것이고, 머지않아 국가 그 자체가 될 거야. 쉽진 않겠지만, 어렵지도 않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현무의 태도에 서지후마저도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현무가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요한만 어리둥절해 했다.
현무는 싱긋 웃으면서 요한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요한 사제님.”
“예?”
“요한 사제님은…… 음,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있어주세요.”
“……예.”
“농담이고 사제님은 군 경험이 있고 지원이 능하니 병사 훈련, 그리고 가끔 작전을 수행해주셨으면 합니다. 군사 훈련을 받은 대 능력자 타격 팀. 끝내주잖아요.”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현무가 진지하게 말한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요한은 그가 무엇을 승낙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한이 앞으로 키울 병사들은 능력자들을 상대할 킬 팀이었다.
현무의 칼끝은 몬스터와 국가에만 향해있지 않았다. 같은 능력자들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동맹처럼 적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을.
“지부장님은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서지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현무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자기계발 및 체력단련.”
***
【난이도: 지옥
종말의 별에 진입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왕림하셨나이까.”
쉘터에 들어서자마자 카자트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받아주고 지나가려던 현무는 카자트의 기색이 평소와 살짝 다른 것을 느꼈다.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기색이었다. 현무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냐, 무슨 일인데?”
“그것이…….”
그때 덥석, 현무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들러붙었다.
레니안이었다.
레니안이 노래하듯이 속삭였다.
“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