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169)
지옥에서 독식-169화(169/346)
169화. 새로운 질서 (5)
“예, 예! 맞는데요. 어쩐 일로?”
송지민은 헌터니 던전이니 하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긴 하지만 강현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뉴스에 여러 번 나오기도 했었고, 뭣보다 동생인 송여운도 엄청나게 과장해가며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의 묘사에 따르면 강현무는 인간이라기보다 괴물 내지는 마왕 비슷한 것이었지만, 찾아온 현무는 그냥 몸 좋은 일반인처럼 보였다.
“작품 좀 보러 왔지요.”
현무는 송지민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티켓을 내밀었다.
티켓을 받아든 송지민은 뒷장에 동생의 손글씨로 자신의 연락처가 씌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팀원들한테 티켓 뿌릴 거라면서 한 움큼 가져가긴 했는데, 설마 강현무처럼 유명한 사람한테까지 뿌릴 줄이야.
“예, 예에. 어서 오세요.”
송지민은 어떻게든 미소 지으려 노력하며 현무를 안내했다.
강현무는 전시회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타난 큰 손이었다. 작품 하나라도 팔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송지민은 현무에게 작품들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작품 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송지민에게, 헌터들에 대한 이미지는 송여운에 대한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예술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설령 관심이 있다한들 이미 큰 수익을 벌어들이는 헌터들은 대부분 유명한 작품들을 구매하곤 한다.
현무는 어떨까 기대했지만, 그 역시도 역시 알 듯 모를 듯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파도…… 파도 맞죠? 이게 화가의 우울과 좌절을 표현한 거라구요?”
“네. 대양에서 잔잔히 끓어오르던 파도가 자신도 모르는 새 해변으로 치달아 제 몸을 잘게 부수는 감정의 격정적인 순간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는데요…….”
“화가가 대체 무슨 좌절을 겪었길래요?”
“일반인과 고립되어 고정된 미술 향유층의 취향에만 천착하는 추상 미술에 대한 도전과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한계점을 뚜렷이 느낀…….”
송지민은 해설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현무가 바라보자 송지민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건 제가 그린 게 아니라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도 딱히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 제가 억지로 말을 이어가고 있는 느낌이라 죄송스럽네요.”
“티가 났나요?”
“네. 조금 많이.”
평소대로였다면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여운이 준 티켓 때문에 억지로 왔을 것이 분명한 현무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요일지도 모른다.
“잘 됐네요. 그럼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죠. 그냥 설명 없이 진행하면 낯부끄러울 것 같아서 조금 들어보려고 했는데…… 이 작품은 송지민 씨 작품이 아니라구요?”
“예? 예. 제 작품은 이쪽에…….”
송지민은 한쪽 벽에 가리킨 그림과 조각상들을 가리켰다.
“원래 조소도 했었는데 철학과랑 조소과는 취직하려면 고대 그리스로 가야한다고 들어서…….”
“그렇군요.”
현무는 송지민의 작품이 시작되는 끝부분부터 끝까지 쭉 손짓하며 말했다.
“전부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죠?”
“예?”
“가격이요. 이런 미술 작품을 사는 건 처음이라. 가격표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어, 어어, 그게…….”
보통 전시회에서는 창작자가 나름대로 가격을 붙이기도 하고, 대상에 따라서는 재료값만 받기도 한다.
많은 경우 구매자가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오자 송지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부 구매한다고?
“삼…… 삼십?”
“삼십억이요?”
이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송지민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상상으로나마 해봤던 숫자를 실제로 듣자 얼어붙었다.
송지민은 작품당 30만 원이라고 정정하려 했지만 현무는 이미 품속에서 백지수표를 꺼내들고 적어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2 뒤에 0이 9개 박혀있는 수표를 받아든 송지민은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혹시 동생이 장난치는 건가? 이게 진짜 돈 맞나? 온갖 생각들이 오갈 정도였다. 그때 현무는 밖을 향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 입은 남녀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조심해서 옮겨. 귀한 작품들이니까.”
흰 장갑에 포장용 장비까지. 그냥 짐 옮기기 위해 온 일용직들이 아니라 고가 미술품만을 관리하는 경력자들이었다.
그중 마지막에 들어선 사람은 묵직한 가방 두 개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현무는 가방을 전해 받고 송지민의 앞에 펼쳤다. 무수한 5만 원 권 현금 다발이 한 가득씩 들어있었다.
현금을 보자 송지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방 하나당 5억씩. 총 10억입니다. 아직 사회초년생이시라기에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송여운 씨의 누나답게 담대하게 부르시네요.”
“어, 어어!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오해는 없습니다. 송지민 씨.”
현무는 가방을 송지민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묵직한 무게에 송지민의 허리가 휘청였다.
“들고 가시기 불편하시면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 제 작품에 대해서 모르시잖아요!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고! 그런데 왜 이렇게 비싼 값을 주고 사신다는 거죠? 도, 동생 때문인가요? 여운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송여운 씨는 별 일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그냥 잘 챙겨주기나 하세요.”
그때 현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 제가 작품의 진가도 모르는데 무작정 수집하는 졸부 같아서 예술가의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하십니까?”
“네?”
“하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화가의 자존심과 맞바꿀 수는 없죠. 제가 천박한 사고방식으로 훌륭한 화가의 환심을 사려한 것 같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고…….”
불과 5분전까지 자신의 작품 진가를 봐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송지민은 현무의 손을 덥석 잡아 쥐었다.
“아뇨.”
갑작스럽다는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아직 학자금 대출도 다 갚지 못한 송지민에게는 당장의 빚은 물론 노후까지 보장될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오히려 제 부족한 작품을 이렇게 높이 쳐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무는 씩 미소 지었다.
“거래가 성립되니 기쁘군요.”
“어, 하지만 왜 제 작품을 이렇게 사는지 정도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현무는 물끄러미 송지민을 바라보았다.
“혹시 거미 좋아해요?”
“예? 거, 거미요? 전 다리 여섯 개 이상 달린 건 쳐다보지도 못하는데요?”
한동안 복잡한 표정을 짓던 현무는 송지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뭐, 앞으로 흥할 조짐이 보여서 그렇다고 해두죠. 송지민 씨는 안심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세요. 만약 각성하더라도 헌터니 뭐니 하는 거에 관심 갖지 마시고, 쭉 거미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아, 그리고 작품 만들 때마다 연락주세요. 그쪽이 부르는 가격에 사줄 테니까.”
현무는 송지민을 또 한 번 뜨악하게 만드는 말을 남겨놓고는 한가득 실은 미술품과 함께 사라졌다.
순식간에 비어버린 전시장에는 송지민과 현금이 가득 든 가방만이 남았다.
***
사망설까지 돌았던 강현무가 활동을 재개하자 헌터계는 물론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했다.
강현무는 이미 헌터들뿐만이 아니라 산업계와 정치계에도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산업계는 전능련에서 생산하는 고품질의 아이템들과 극히 은밀하게만 공급된다는 고순도 수정이끼들로 장악 중이다.
정치계는 정권 실세인 박규와의 연줄은 물론, 서울시장 후보까지 쥐락펴락하는 영향력에 병 지휘권까지 가지고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현무가 어느새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현무가 50일 가까이 실종되었다가 나타나자마자 한 행동이 미술품을 사들이는 것이 되자, 관심은 급격히 송지민이라는 예술가에게로 쏠렸다.
“뭐하는 사람인데?”
“예술가라니까, 누나.”
태성 그룹 본사, 최상층 펜트하우스.
원래 목적은 접객용이지만 사실상 태성그룹 지배자의 개인 사무실이자 주거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었다.
은밀히 사내 직원들 사이에서는 옥좌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이 사무실의 주거 공간은 다름 아닌 서른 중반의 여성이었다.
여성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누가 그걸 못 알아들은 줄 알아? 뭐하는 예술가길래 그 강현무라는 사람이 관심을 갖냐 이거지.”
이지태는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의 친누이, 이서연을 바라보았다.
“갓 미대 졸업한 사회초년생이라고 들었어. 작품이 남아있나 확인해봤는데 강현무가 산 것 말고도 다른 옥션 관계자들이 싹 쓸어갔더라고. 몇 천 씩 웃돈 줘가며 사갔다는데.”
“대충 살펴봤군. 학교에 졸업 작품이 남아있긴 하더구나. 혹시나 싶어서 사오긴 했지만 그 정도 가치는 없는 그림이던데.”
이서연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강현무라는 사람, 속이 깊은 듯하면서도 은근히 뜻 모를 짓만 하는군. 이런 타입은 신경 쓰고 있으면 휘말리게 되는데. 너처럼 말야.”
“누나.”
이지태는 화를 삭이며 이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서연은 책상을 탁탁 두들기며 이지태를 향해 쏘아붙였다.
“강현무한테 관심 갖고 투자하자고 한건 너야. 그런데 성과는커녕 점점 알 수 없는 짓만 하잖아. 내가 너 헌터 놀이하는 거 봐주고는 있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앞으로는 못 봐줘.”
“놀이?”
이지태는 대한민국 1위의 헌터이자 강현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유일의 5성급 능력자였다.
전 세계에서도 5성급 던전을 공략한 팀은 열 팀도 안 된다. 그런데 이서연은 그걸 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놀이지. 그러면.”
이서연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너 같은 능력 가지고 있었으면 그런 식으로 안 해. 넌 꿈도 못 꿀 성과를 거두고 있을 거다. 넌 네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도 몰라. 정의로운 역할 놀이에 심취해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놀이라고 안 부르겠어? 이미지 마케팅에 도움이 되니까 그냥 두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만두게 했을 거다.”
이지태는 입을 꽉 다물고 이서연을 노려보았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강현무가 낫군. 적어도 그는 자기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쓰는데? 누구랑 다르게 쓸데없는 자기만의 규칙에 얽매이지도 않고.”
이서연은 능력자가 아니다. 하지만 언제든 각성할 수 있음에도 안하고 있을 뿐이었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각성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태성의 실질적 지배자 자리를 차지했다.
본래 장자 계승 전통이 뚜렷한 태성은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삼녀에 불과한 이서연의 계승서열은 막내인 이지태보다도 아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선대 경영인이었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이후, 1년 만에 둘째는 마약 밀수 혐의로 감옥에 갔고, 맏형은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후 이서연은 부사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실질적 경영자가 되었다.
가장 큰 수혜자였지만 그 어디에도 이서연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지태는 만약 자신이 헌터 클랜 단장으로서만 활동을 고집할 뿐, 태성 그룹 경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공언하지 않았다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물론 육체적으로 날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을 사회적으로 몰락시키는 방법은 다양하다. 인간은 혼자 사는 생물이 아니니까.
이지태는 이서연에게서 무슨 예감을 느끼는지 알아보려 했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의식불명 상태인 맏형보다 속을 알기 힘든 사람이 바로 이서연이었다.
이지태는 변명하듯 말했다.
“태성은 이미 한국을 장악 중이야. 강현무가 아무리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고 있다 해도 의미가 없을 텐데?”
태성 그룹은 현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현무가 하려하는 것은 이미 태성이 수십년 전부터 지속하고 있는 행위였다.
어느 정권, 어느 세력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더라도 태성은 굳건히 그림자를 드리울 것.
하지만 이서연은 조금도 느슨하게 방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강현무가 태성의 대안이 될 여지를 주면 안 되지. 대안이 될 가능성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 편으로 만들어놔야 해.”
이서연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축하해! 그런 면에서는 네 말이 옳을 수도 있겠구나. 네 망상 같은 예언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군. 하지만 이제 네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겠다.”
이서연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호환마마 클랜에 연락했어. 전능련이 이제 2위로 올라섰으니, 무게추를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박도령한테 연락했다고?”
이지태는 눈썹을 치켜뜨며 성큼 이서연을 향해 다가갔다.
“했지. 그러면.”
이서연은 입가를 비죽 올리며 대답했다.
“네 자존심 때문에 태성이 더 이상 손해 볼 수는 없어. 북벌에 호환마마도 태성측 동맹으로 참전할 거야.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었으니 기지개 좀 켜고 싶겠지. 안 그래도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지태는 이를 빠득 갈며 이서연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이서연을 한 번에 박살낼 수 있는 힘과 증오가 그의 손끝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이서연은 그의 진득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음울한 눈으로 이지태를 바라보았다.
이지태에겐 익숙한 시선이었다.
동정 어린 눈빛.
이서연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이지태의 얼굴에 훅 뱉었다. 담배 연기가 얼굴에 부딪쳐 흩어졌다.
“서른이나 먹었으면서 아직도 애처럼 구는구나. 지태야.”
“…….”
“그래. 이렇게 애가 착해빠졌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강현무의 상대가 안 돼. 네가 늘 나한테 지는 거랑 똑같은 이유야.”
이서연은 이지태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당장 이서연을 피곤죽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담긴 손이었다.
하지만 이서연은 그 손에 담뱃불을 지져 꺼뜨렸다.
그녀는 이지태의 손 안에 담배꽁초를 꾹 쥐어준 뒤 말했다.
“가서 버려.”
이지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의 누나의 뜻대로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 날, 호환마마의 박도령 단장이 은거를 깨고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