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177)
지옥에서 독식-177화(177/346)
177화. 검은 옷을 입은 자 (4)
먼 거리였지만 불타는 공성전차 덕분에 계곡은 환했다. 검은 옷을 입은 박도령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특이하게 검고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현무는 처음에는 코트인가, 했지만 곧 그게 한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거…… 두루마기인가?”
박도령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다. 전통문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자이거나, 골 때리는 괴짜 컨셉충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지태는 얼굴을 찡그린 채 박도령을 노려보기만 했다.
공성전차가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박도령은 민첩하게 포격을 피하고, 동시에 손에서 무언가를 날려 보냈다.
그것이 번뜩인 순간, 요새에서 박도령을 향해 활을 날리던 해골 병사들이 박살 나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지옥 다트?’
아니. 현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가진 무기 중 가장 흡사한 지옥 다트를 떠올렸지만, 번뜩이던 빛을 볼 때 박도령이 던지는 것은 금속성의 무언가였다.
단도라면 납득할 만했다. 꺼내는 동작조차 없이 연사로 던지고 있긴 했지만.
그때 박도령도 현무와 이지태를 발견했다. 박도령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걱정하거나 반가운 표정은 아닌 게 분명했다.
박도령은 망설이지 않고 계곡과 계곡 사이를 도약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끌고 오는군.”
현무가 중얼거렸다. 이지태는 쯧 소리를 내며 파천검을 늘어뜨렸다.
박도령은 가볍게 현무와 이지태 앞에 착지했다. 박도령은 두루마기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얼굴에는 검은 두루마기와 대비되는 하얀 탈을 쓰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돕는 게 어떤가?”
가면 아래로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뻔뻔스레 꺼낸 말에 이지태는 할 말을 잃었다.
현무는 말다툼할 정도로 상냥하지도, 배려심 깊지도 않았다.
대신 독혈을 듬뿍 바른 지옥 다트를 손안에 숨겨 들었다.
그 순간 박도령의 손안에서 검날이 번뜩였다.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유리 파편 같은 모습의 단검이었다.
단검이라기엔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박도령은 그걸 능숙하게 쥐고 집어 던졌다.
도포 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쪽으로 날아오던 포격을 정확히 명중시킨 것이었다. 주변이 열과 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
“할 말이 많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대화하기에 여의치 않은 것 같네만.”
박도령은 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도령 말대로 계곡 반대편에서 공성전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지태도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는 공성전차를 무시하고 서로 싸웠다간 자멸할 뿐이었다.
“일단 원한 관계는 미뤄두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겠습니다.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겁니다, 박도령.”
“원한 살 일이라면 오히려 자네가 하지 않았나?”
박도령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지태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말없이 물러났다.
이지태는 현무도 돌아보았다. 현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모인 것은 국내 탑 티어 헌터들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관계는 속임수와 혐오, 증오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적나비 씨는 일단 후방을 맡아주십시오. 계곡으로 다른 몬스터들이 오는지 봐주시면 됩니다.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예!”
사실상 물러나 있으라는 뜻이었다. 적나비가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
자신의 주제를 아는 적나비는 이지태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강현무 씨는…….”
현무는 이지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도약해 공성전차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지태는 한숨을 쉬며 박도령을 바라보았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불쾌한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알아서 하십시오. 걱정 안 해도 될 사람이니.”
“강현무와는 잘 아는 사이인가?”
박도령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지태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지태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박도령은 말을 이었다.
“놈을 주의하게. 놈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놈이 아니니까.”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닐 텐데요.”
“하긴, 귀하신 도련님께서 뭘 알겠어. 누나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겠지.”
누나를 언급한 순간 이지태는 벌컥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박도령은 그런 이지태를 두고 다시 훌쩍 뛰어올랐다.
절벽을 밟고 도약하는 박도령을 보며 이지태는 분을 삭였다. 이번 레이드가 끝나고 나면 확실하게 따져 물을 것이다.
그와 박도령 사이에는 풀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
공성전차 공략은 현무가 계곡의 우측, 박도령이 좌측, 이지태가 중앙을 맡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현무는 곧바로 공성전차를 공격하기보다, 계곡 전체에 거미줄부터 뿌렸다. 자신이 발을 디딜 자리를 만드는 동시에, 공성전차의 움직임을 저지할 만한 쇠사슬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박도령…….’
계곡 건너편, 깨알같이 보이는 박도령의 검은 실루엣이 공성전차 너머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무는 미처 안경을 꺼내지 못했지만, 박도령의 레벨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LV 60)]박도령은 세간에 알려진 바대로 4성이 아닌 5성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가 동맹의 숨겨진 5성급 능력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레벨 60이라면 이지태보다도 높은 레벨이었다.
‘그렇게 강한데도 왜 동맹은 박도령이 아니라 이지태를 대전사로 선택한 거지?’
하기야 강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을 동맹으로 뽑았다면 류수아도, 적나비도 동맹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이젠 상관없지만.’
박도령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건 박도령이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현무에겐 그렇게 보였다.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때까지 고문하고, 얻어내지 못하면 죽인다. 그뿐이었다.
박도령의 손에서 무언가가 번뜩일 때마다 공성전차에 있던 해골 병사들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망령 기사조차 단검이 무수히 꽂힌 채 움찔대다 쓰러졌다.
‘저 단검이 다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아이템이나 스킬이겠지 싶었다. 파괴력, 사거리, 탄속 모두 마탄 이상이다.
단검을 꺼내 드는 동작조차 없이 바로 손안에서 생겨나니 엄청난 속도로 연발이 가능했다.
‘대인전 특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군.’
공성전차를 상대로는 큰 타격을 줄 수 없겠지만, 꾸준히 모여드는 언데드 몬스터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 되었다.
플루드 때문에 모여드는 언데드들이 공성전차에 합류할수록 전황은 점점 어려워질 테니까.
중앙에서는 이지태가 열심히 공성전차의 군마와 바퀴를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궁극기를 발동한다면 공성전차에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겠지만, 궁극기를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면 그 전에…….’
이지태가 끼어들기 전에, 현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현무는 이지태의 말에 순응하지 않았다. 이지태의 방해 없이 박도령을 죽이기 위해 듣는 척했을 뿐이었다.
공성전차 문제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당장 현무에게 중요한 건 박도령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박도령과 이지태가 공성전차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을 때, 현무는 거미줄을 밟고 튕기면서 공성전차의 뒤쪽으로 우회했다.
서서히 박도령을 공격할 만한 각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박도령이 갑자기 공성전차의 앞쪽으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현무와 박도령 사이에는 공성전차가 끼게 되었다.
이것 봐라, 하는 순간 박도령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순간 느껴지는 섬찟함에 현무는 거미줄의 반동을 이용해 가까스로 몸을 튕겼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단검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검이 스친 뺨에 선혈이 솟구쳤다. 배틀 헬퍼를 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머리가 꿰뚫릴 수도 있었다.
“이 개자식이.”
현무는 자신이 먼저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것도 잊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박도령은 짐짓 실수했다는 듯 현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맞았으면 된다는 건가? 허튼 생각 말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경고성이라기에는 살의가 넘치고도 남았다. 현무는 사납게 미소 지었다.
“재밌는 새끼로군. 분명 비명 소리도 재밌겠지.”
그때 공성전차에서도 뒤늦게 거미줄을 타고 있는 현무를 발견하고 포격을 시작했다.
화살과 포환이 날아들자 현무는 가볍게 회피하고 공성전차 상반부 총안 쪽으로 도약했다. 해골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지만, 현무는 놈들을 붙잡아 총안 밖으로 끌어당겼다. 빠져나오지 못한 몸뚱이는 안에서 그대로 부서지고 척추만 뽑혀 나왔다.
‘이대로 시간 지나면 공략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전에 박도령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현무는 공성전차를 좀 더 위험하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현무는 탐을 치켜들고 힘껏 총안 안쪽을 향해 꽂아 넣었다. 맹렬한 불꽃이 공성전차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공성전차 곳곳에서 열기와 함께 폭발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공성전차가 미친 듯이 폭주하며 사방을 향해 불꽃을 뿜어대자, 이지태와 박도령의 움직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무는 박도령을 주시했다. 역시 놈은 이지태를 신경 쓰고 있다. 이지태가 위기에 처하면 놈은 반드시 약점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때, 현무는 갑작스러운 위화감을 느꼈다.
날카로운 살기가 심장을 저며왔다. 현무는 즉시 위험을 알아차렸지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위험의 방향을 잘못 포착한 것이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진 탓이었다.
적은 틀림없이 박도령, 아니면 전차 안쪽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공격이 들어온 방향은 전혀 예측 못 했던 방향, 이지태도 박도령도 없는 반대 방향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처참한 파육음과 함께 오른쪽 허파가 꿰뚫린 순간이었다.
허파를 꿰뚫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유리 파편 모양의 단검.
박도령의 무기였다.
“빌어먹을.”
현무는 허탈하게 웃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놀라울 정도로 공들인 덫이었다. 심장을 맞는 것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치명상이었다. 그럼에도 현무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하현, 북쪽 기준 2시 방향. 가서 죽여버려.”
현무는 하현에게 의지를 보낸 뒤, 길게 심호흡했다.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이내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최후의 1인’ 칭호 특전으로 재생을 시작합니다.]***
공성전차가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열기를 버티지 못한 이지태가 거리를 벌렸다. 맹렬한 불꽃이 계곡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지태는 열기를 식히던 도중, 현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박도령도 이지태와 맞춰 뒤로 빠졌다. 이지태는 박도령을 무시하려 했지만 공성전차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강현무의 기척이 보이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현무 씨는 못 봤습니까?”
“못 봤는데.”
박도령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안 좋은 예감이 엄습했다. 이지태는 공성전차가 폭주하던 시점에 맞춰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눈앞의 전투에 한참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게 현무에 대한 예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지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둘러 강현무를 찾으려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비록 박도령이라 해도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분신 스킬은 왜 안 쓰고 있습니까?”
“반대편에서 이 해골 놈들이 더 합류 못 하게 애쓰고 있지. 너희들 오기 전까지는 나 혼자 싸우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여긴 왜 온 겁니까? 당신은 이렇게 정면승부를 즐기는 타입이 아닐 텐데요.”
“나는 적나비 때문에 온 것뿐이야. 내 먼 친척 동생이거든. 그런데 왜? 지금 저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날 추궁하는 게 더 중요한 건가?”
이지태는 박도령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마따나 지금은 박도령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추궁은 공성전차를 박살 낸 다음에 얼마든지 해도 되는 거니까.
이지태는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이 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바로 끝내버려야겠습니다.”
이지태는 무거운 눈으로 박도령을 노려보았다.
“당신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