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178)
지옥에서 독식-178화(178/346)
178화. 검은 옷을 입은 자 (5)
“도움? 네 궁극기를 쓰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당신도 궁극기를 쓰라는 말입니다.”
“아…… 과연, 전혀 신뢰받지 못하고 있군.”
박도령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지태는 이미 궁극기를 사용했다. 하루에 연달아 궁극기를 사용하면 마나 소모량이 심해져 무방비한 상태가 될 수도 있었다.
이지태의 말은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너도 그만큼 힘을 빼라는 뜻이었다.
이지태가 궁극기를 쓴다면, 시간은 좀 걸려도 공성 전차를 혼자서 제압할 수 있다.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겠지요.”
이지태는 무방비해진 상태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두고 싶진 않았다.
박도령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뭡니까?”
“이 싸움이 끝나면 나도 꽤나 지친 상태가 될 거야. 그럼 그 뒤에 나를 보호한다고 약속하게.”
박도령의 말에 이지태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라면…….”
“잠깐이라도 좋아. 직후만 아니면 되니까.”
이지태는 박도령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설마 무방비해진 틈을 타 자신이 공격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하지만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현무는 보이지 않았고, 위화감은 여전했다.
이지태가 입을 열기 전에 박도령이 먼저 말했다.
“괜한 말을 했군. 꽉 막힌 네가 너답지 않은 행동을 할 리가 없지.”
박도령은 긴 말 필요 없다는 듯 공성전차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지태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듯한 박도령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지만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지태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궁극기 ‘광휘의 날개’를 발동시켰다.
휘황찬란한 빛의 날개가 계곡을 확 밝혔다.
“어딘가에 강현무 씨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십시오.”
“그 놈을 굳이 걱정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군.”
몸 전체를 태우는 듯한 촛대 같은 꼴로 타오르던 공성전차는, 이내 이지태를 향해 미친 듯이 포격을 쏘아대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박도령은 그 위로 힘껏 도약해, 공중에서 팔을 펄럭 펼쳤다.
그리고 계곡에, 두 종류의 파괴가 현신했다.
***
계곡 중턱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인영은 건너편 수백 미터 거리를 스코프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계곡 아래쪽에선 언데드들이 서성이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검은 인영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침묵의 행진은 계속됐다.
꾸준히 기척을 숨긴 채 엎드려 있던 검은 인영은 스코프 속에서 타겟을 발견했다.
타겟은 한참을 정신 사납게 뛰어다녔다. 그러다 놈이 정지한 순간, 검은 인영은 팔을 뒤로 젖혔다가 힘껏 금속 파편을 던졌다.
맞았다.
던지느라 맞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느낌이 왔다. 스코프를 통해 놈이 추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아니, 뭘 잡으라는 건지 정도는 말해줘야지. 이 시커먼 건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검은 인영은 기겁했다.
이렇게 인기척 없이 빠르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현무밖에 없다고 판단한 검은 인영은 빠르게 계곡 아래쪽으로 몸을 던지며 버튼을 눌렀다.
매복하고 있던 곳에서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매복의 흔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어쭙잖은 짓을 하는구나.”
하지만 또 어디선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폭발했던 계곡 위쪽에서 돌과 먼지들이 쏟아지면서 시야를 가렸다.
언데드들이 있었지만 검은 인영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검은 인영은 침착함을 되찾고, 상대가 현무가 아니라 여자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적나비? 아니면 전능련 헌터 중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던 건가? 그 중 이런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 헌터가 있었던가?
순간 먼지 구름이 갈라졌다. 검은 인영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쭉 뒤로 밀려났다.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격이 맞닿는 순간의 살기만 전해졌을 뿐, 지금도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현무, 이 자식 밑에 들어가니까 영 약해졌단 말이야.”
검은 인영은 침착하게 상대를 찾으려 했다. 방금 공격이 상대방의 전력이라면, 상대의 능력치는 자신보다 약간 낮은 정도였다.
검은 인영의 능력치는 레벨 60대에 속했다. 분신을 하나도 나누지 않고,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검은 인영은 자신의 모습을 나누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검은 인영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자신이 상대방을 못 찾는다면, 상대방도 자신을 못 찾게 하면 그만이다. 나무는 숲 속에 숨긴다.
“심심한 재주를 부리는군.”
그러나 검은 인영이 만들어낸 분신들 중 오른 쪽에 있던 놈들이 어느 한순간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둔중한 충격이 오른쪽 허리를 강타했다. 날카롭게 베여 들어가나 싶던 순간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구나.”
재차 들어오는 찌르기. 옆구리를 파고들어온 공격에 검은 인영은 휘청거렸다.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반격을 위해 손을 잡아채려 했지만, 손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사람이었다면 내장을 뽑힐 수도 있는 공격이었지만, 검은 인영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공격자도 그게 아쉬운 듯 했다.
“귀찮은 체질이군. 조금 더 즐겨볼까 했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처형 놀이라도 하는 건가?”
그 순간 먼지 안개 너머에서 갑작스럽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때까지 아무도 느낄 수 없던 것과는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곧 안개 너머로 실루엣이 드러났다.
강현무.
지치고 피로한 상태로 보였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노골적인 살의와 분노가 검은 인영을 찌르듯 덮쳐오고 있었다.
“현재 난이도에서 이만큼 빡치는 상대를 찾은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검은 인영에겐 강력한 자율권이 주어진 상태였다. 검은 인영은 실시간으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주어지면 그 명령 수행을 위해 시전자가 아는 지식과 판단 안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지금 검은 인영에게는 그렇게 주어진 정언 명령이 있었다.
바로 강현무를 죽이는 것.
검은 인영은 자신의 저격이 실패했고, 현무가 살아있는 것을 포착한 순간 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순간 핑 하는 감촉이 얼굴을 날카롭게 짓눌렀다.
“네 손으로 직접 죽일 기회를 주려고 했지.”
“내가 죽이라고 하면 시간 끌지 말고 죽여. 어차피 이놈은 비명을 지르거나 고문할 보람이 있는 입도 없다고.”
검은 인영에게 주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순간 계곡 전체에 무수하게 걸쳐진 보랏빛 실들이 빛났다. 검은 인영이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현무는 검은 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꽉 쥐어진 순간, 계곡 안의 거미줄들이 순식간에 검은 인영을 붙잡았다.
검은 인영은 보랏빛의 미라 같은 꼴이 되어 허공에 매달렸다. 그것이 원형을 유지하는 것은 짧은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거미줄들이 마치 톱질하듯 회전을 시작했다.
직후 검은 인영은 삽시간에 먼지 단위로 갈려 허공에 흩뿌려졌다.
“후우…….”
현무는 피곤한 표정으로 등과 허리를 매만졌다.
금속 파편이 배에 박힌 채로 아물면 곤란했기 때문에 직접 상처를 손으로 쑤셔가며 뽑아내야 했다.
금속 파편은 애초부터 단검도 아닌 ‘월영 파편’이라는 희귀 등급의 무기였다.
꺼내자마자 녹아내리듯 사라졌기 때문에 자세한 스펙은 알 수 없었지만 소모성의 소환 무기인 듯했다.
“짜증나는 능력이군.”
분신과 저격, 두 가지에 능하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다행이라면 이런 스킬이 시전자에게 주는 부담이 적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박도령은 이미 분신을 두 번이나 썼으니 꽤나 피로가 누적된 상황일게 분명했다.
“난 다시 돌아간다. 하현. 따라와서 위에서 대기하고 있…….”
그때였다.
갑작스레 계곡 건너편에서 공기를 떨게 만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음이 멈추지 않고 연달아 울려 퍼질 때마다 계곡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며 돌무더기를 쏟아냈다.
현무는 계곡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저게 뭔…….”
거대한 불꽃이 빠르게 치솟았다가 아래를 난타하고, 재차 솟구쳤다가 다시 난타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닥을 찍을 때마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무는 저것이 궁극기를 발동시킨 이지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멋있긴 멋있네.”
“저게 뭐야, 궁극기?”
하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궁극기 치곤 좀 빈약해 보이는데.”
“난이도: 지옥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그건 그렇겠네. 그러고 보니 너도 곧 궁극기 얻을 때 되지 않았나?”
현무의 현재 레벨은 48.
수정화를 얻으면서 포궁에서 과부여왕거미를 죽이고 오른 레벨의 양이 상당했다.
마음 같아서는 레벨 50을 달성한 다음 북벌에 임하고 싶었지만, 이미 북벌이 시작된 마당에 지옥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평양 수복 전에는 어떻게든 얻어 봐야지.”
그때 하현이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왜?”
“아니…… 난이도: 쉬움 시점의 궁극기가 저 정도인데, 쟤들이 지금 거의 최강이라며.”
“그래. 그게 왜?”
“그럼 난이도: 지옥에서 네가 궁극기를 터득하고 나면, 좀…… 이상한 취급받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많이 놀랄 것 같은데.”
현무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궁극기를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하현이 이런 말을 할 정도인가?
사실 난이도: 지옥에서 스킬을 얻어도 일반적인 스킬과 비교했을 때 다소 강하다는 느낌만 있을 뿐, 엄청나다는 느낌은 받은 적 없었다.
때문에 궁극기를 얻는다 해도 끝내주는 스킬 하나를 얻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본 난이도: 지옥에서의 궁극기는 어땠는데?”
“글쎄, 그 시점에서 살아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부 별의 권속들뿐이라…… 그래도 내가 종종 봤던 거에 비하면 저건 쥐불놀이 수준인걸. 물론 쥐불놀이로 사람을 때리면 아프긴 하겠지.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
이지태의 궁극기가 쥐불놀이라. 현무는 쓸데없이 기대감이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현무의 경험상 지나치게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었다. 기대치가 낮아야 막상 봤을 때 약간 애매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현무는 자신을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하현은 그런 현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아 참, 너무 기대하지는 마. 보통의 능력자가 쓰는 궁극기랑 별의 권속으로서 쓰는 궁극기는 위력이 또 다를 테니까. 아, 레벨 영향도 받을 테고.”
“기대시켜놓고 그러지 좀 말라고!”
***
이지태는 다시 한번 하늘로 치솟았다가, 재차 꿰뚫듯 공성전차의 정중앙을 내리찍었다.
터져나가는 뇌전과 함께 공성전차가 한순간 밝게 터지듯 빛났다. 완전히 내부가 꿰뚫린 공성전차는 이내 힘없이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 타버린 촛농 꼴이 되어버린 공성전차를 박살내며 이지태가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광휘의 날개를 꺼뜨렸다.
“후우…….”
안색이 창백했다.
광휘의 날개의 장점은 소모되는 마나를 화력처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속시간을 짧게 사용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쿨타임이 짧아진다. 그리고 화력을 높이면 그만큼 강해지지만, 반대로 적당히 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궁극기이니만큼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마나가 적지 않았다.
“박도령, 괜찮습니까?”
이지태는 궁극기에 들어가는 힘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을 남겨둘 수 있었다. 하지만 박도령의 궁극기는 그렇지 않았다.
박도령은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겨우 서있는 꼴이었다.
“도련님은 전보다 더 능숙해진 것 같군.”
“그렇게 부르는 것 좀 그만두십시오. 당신 궁극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도 못했으니까.”
공성전차는 벌집처럼 무수한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그중 큼직한 것은 이지태가 뚫고 지나간 흔적이지만, 마치 환 공포증이라도 일으킬 듯한 무수한 구멍들의 흔적은 박도령이 낸 것이었다.
이지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곡을 둘러보았다. 계곡은 가득 박혀있는 하얀 수정들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박도령은 손속을 봐주지 않고 궁극기를 사용했다. 만약 강현무가 계곡에 있었다면 휘말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대체 어딜 간 거지?’
“이지태.”
그때 뒤에서 박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 잊지 마라.”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박도령의 머리를 콱 짓눌러 바닥에 그대로 내리찍었다.
바닥에 박혀있던 수정이 박도령의 머리와 부딪쳐 박살났다.
“아, 자기 무기에는 안 죽는다 이건가?”
갑자기 나타난 강현무가 박도령의 목을 짓누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