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56)
지옥에서 독식-256화(256/346)
256화. 유토피아 (11)
비상계엄이 선포된 당일, 유민의 오피스텔.
“오빠, 이거 봤어요?”
유민이 현무에게 내민 것은 송여운과 서지후가 청평 병원을 탈출하면서 가져온 문서 중 하나였다.
서지후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챙겨야 할 문서들을 잘 분류해 가져왔다.
문서들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결 짓자면 시간이 걸릴 작업이었지만 의미 있는 작업들이었다.
“음, 봤어. 그게 왜?”
유민이 내민 문서는 청평 병원에서 ‘폐기’된 한 헌터에 관한 문서였다.
절차적 문제가 있을지는 몰라도 범죄기록이 확실했기 때문에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현무는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못했다.
“다른 문서에서 이 헌터의 기록을 봤었는데, 약간씩 틀려요. 막 이송됐을 때에는 정신질환으로 수감되었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병원에서 없던 범죄기록이 생겼네?”
“흠?”
현무가 문서를 집어들자 유민은 다른 문서 다발들도 한꺼번에 내밀었다.
“비슷하게 문서 조작이 의심되는 능력자들 목록이에요. 마땅한 범죄 경력이 없는데도 입원하거나, 퇴원, 사망 기록이 없는데도 사라진 헌터들도 있고. 이 헌터들의 공통점은…….”
“최근 3개월간이군.”
현무는 문서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북벌이 성공한 이후.
그중 대다수는 태성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정부에서 태성을 견제하려고 했던 건가? 현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성은 말 잘 듣는 개다. 지금도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정부가 아니라면?’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한국의 능력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브로커들.”
“생각보다 음모가 깊은 것 같죠?”
청평 병원에서 발견된 자료들은 단순히 정부의 매국노 일부가 능력자들을 팔아치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 헌터업계 뿌리 밑동을 갉아먹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존재했다.
박규에게 이럴 배짱이 있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더 큰 배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우리 지인을 통해서 얻은 정보인데요.”
유민은 또 하나의 문서를 보여주었다.
“브로커들을 통해 팔려나간 능력자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관한 문서에요. 일본, 러시아, 동남아, 남중국…… 뿔뿔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군데로 향한다더군요.”
현무는 할 말을 잃었다.
일개 민간인 수준으로 알아낼 수 없는 정보였었다.
적어도 국가기관이 동원되어야 알 수 있는 문서였다.
문서 상단에 적힌 ‘극비’라는 문구와 손에 잡히는 특이한 질감이 복사 불가능한 진본임을 알려주었다.
현무는 이런 문서를 ‘지인을 통해 얻었다’고 말하는 유민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유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요. 역적질은 혼자 할 수 없다고.”
“중학교 2학년 때 사귄 친구가 국정원이라도 들어갔나?”
“국정원보다는 좀 더 낫고, 알고 지낸지는 얼마 안 됐어요. 하지만 믿을만해요. 어쨌든 이게 지인을 통해서 얻은 이번 사건에 연루된 정부 당국자 명단인데…….”
유민은 문서들을 주르륵 훑어 내렸다.
그 이름들을 보고 현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명단은 제법 길었다.
그중에는 현무가 언뜻 TV에서 본 사람도 있었다. 현무가 놀란 것은 이번 사태의 정부 협력자들이 모조리 명단에 적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이 문서에서 도출할 수 있는 매국노의 이름은 하나인데…….”
유민은 문서에서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를 짚었다.
의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유민이 이 모든 것을 알아낸 것보다는 놀랍지 않았다.
“대체 지인이라는 사람은 누구 길래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야?”
현무의 말에 유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오늘 만날 사람 중에 있어요.”
유민은 현무의 귀에 대고 이름을 속삭였다.
현무는 그 이름을 듣고 이번 일이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가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
비상계엄이 내려진 서울의 풍경은 적막하고 살벌했다.
곳곳에서 수도와 전기가 끊어지고, 언론은 절제된 표현으로 삭막한 사실만을 전달했다.
총성도 폭격도 없었지만 전쟁을 치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군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곳곳에 바리케이드와 검문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했지만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없었다.
다만 풍문으로 들려오는 플루드에 대한 소식과 헌터들의 집단 입원 등에 대한 소문에서 이런저런 추측만 할 뿐이었다.
엄청난 몬스터가 나타났다던가, 백두 던전 급의 5성 던전에서 플루드가 터졌다던가 하는.
어느 것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었다.
해질 무렵.
광화문 일대는 일찌감치 폐쇄되어 행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광화문 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군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당황했다.
지나가는 거라면 일대가 폐쇄되었음을 알리면 되는데, 아예 이쪽으로 민간인이 접근중인 상황은 예상 못했다.
게다가 여름이라지만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산책이라도 하듯이 걸어왔다고?
“죄송하지만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됩…….”
그때 군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군인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가, 강현무…….”
사라졌다고 알려진 강현무였다.
헌터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해도 강현무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헌터라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최강자, 그 호칭을 다투는 사람이었으니까.
뒤늦게 경계를 서고 있던 다른 군인들도 이변을 눈치 채고 당황했다. 현무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도 될까?”
“자, 잠시만. 여기는 폐쇄된 곳이라, 아, 아니. 혹시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원래대로라면 누구도 진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경계를 서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적이 누군지, 아군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군인들도 귀가 있으니 플루드에 대한 소문은 들은 바가 있었다. 이 와중에 강현무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들여보내라신다.”
그 와중에 위병소장이 재빨리 연락을 취한 듯, 출입 허가를 내렸다.
군인은 홀린 듯한 모습으로 현무를 들여보냈다. 연락이 전부 퍼진 건지, 다른 검문소에서도 자연스럽게 현무를 들여보냈다.
현무가 청와대 정문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인들, 혹은 군에 소속된 능력자들은 조심스럽게 현무가 들어서도록 비켜주었다.
청와대 정문을 통과하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길 끝에 청와대가 보였다.
현무는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긋하게 걸어갔다. 물론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스물이 넘는 저격수들이 그를 겨냥하고 있었고, 수많은 전차와 군인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무는 그 시선의 홍수를 유유자적 통과해, 청와대 앞에 섰다.
계단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계엄사령관, 민소하였다.
현무는 민소하와 함께 북벌을 진행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썩 괜찮은 군인이었다.
능력자들과 군인들이 별 갈등 없이 수월하게 북벌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덕분이었다.
결국 현무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군 전력을 지켜내는데 성공했기에 북벌에서 현무 다음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민소하는 인상을 쓴 채 담배를 태우다가 현무가 앞에 서자 바닥에 비벼 껐다.
“강현무.”
“민소하 사령관님이 고작 입구나 지키는 역할이십니까?”
“그럴 리가.”
민소하가 고개를 까딱 올리자 수많은 레이저 사이트들이 현무의 몸을 간지럽혔다.
보통은 비가시광선으로 겨냥하지만, 굳이 레이저 사이트를 보여준다는 것은 경고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현무에게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걸론 한참 부족할 텐데요. 태성은 어디 있습니까? 거기 신임 단장이 꽤 실력이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태성은 발을 뺐다.”
그러고 보니 현무는 오는 길에 태성의 헌터를 한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태성의 움직임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현무가 태성의 전력을 박살낸 시점에서, 국내 능력자들 중에서는 현무를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가능하다해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
이제 현무를 막아낼 존재는 국가밖에 없었다.
“박규는 여기 없군요.”
현무는 자신이 왜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함정도 함정이지만, 애초부터 현무가 목표로 삼았던 상대는 이곳에 없는 것이다.
당연했다. 비상계엄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미 은신처로 피신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강현무.”
민소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무는 그녀의 손에서 라이터를 받아들고 불을 붙여주었다.
민소하는 그를 다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네가 아무리 강하고 잘났어도, 사회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혈혈단신으로 국가를 굴복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짐승처럼 산에 들어가서 고기를 구워먹고 토굴을 파서 쪽잠을 잘 건가? 그건 아니겠지.”
“…….”
“아니면 전부 다 때려눕히고 패왕처럼 군림할건가? 말 안 들으면 죽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빼앗고, 그런 식으로? 네가 되고 싶은 게 그런 건가?”
“그럴 리가요.”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결국 너는 무너지게 되어있어. 좋든 싫든 짐승처럼 살고 싶지 않다면 사람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현무는 민소하를 단숨에 죽이고 군대를 박살내고, 청와대를 막장으로 뒤집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대한민국은 무정부상태에 돌입하고, 현무는 세계적인 주목 아래 비난을 받게 된다.
살인자, 무법자, 테러리스트, 그를 수식할 호칭은 산처럼 쌓이고도 남았다.
하지만 현무는 그렇게 욕을 먹는 역할은 원치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길 수 있으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저는 딱히 지배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라서요.”
“아니라고?”
“저는 좀 더 단순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응징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갖고. 권력은 저한테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에요. 지금 이 상황도 원래대로라면 불필요한 일이었죠. 저는 단지…….”
현무는 고개를 들어 청와대의 파란 기왓장을 바라보았다.
“별을 따고 싶습니다.”
“……별을 따다니?”
“별을 끌어내려 발밑에 두면, 제가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실감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별을 끌어내리는 겁니다. 더 이상 따낼 별이 없어질 때까지.”
현무는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궁창에서 출발한 제가 얼마만큼 올라갈 수 있을지.”
민소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현무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암어로 전달된 탓에 현무는 알아듣지 못했다. 민소하가 마지막으로 뭔가를 명령을 내리려 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를 뚫고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현무!]박규였다.
민소하는 어이없다는 듯 무전기를 내려다보다가 현무에게 넘겨주었다.
이미 북벌을 진행하면서 무전기 다루는 법을 익힌 현무는 능숙하게 박규의 메시지를 받았다.
“박규, 목소리 오랜만이네. 잘 지냈고?”
[오만불손하게 구는 것도 여기까지다. 일개 능력자 주제에 감히 건방지게 굴어? 네가 아끼던 모든 게 산산이 분해되는 걸 보여주마. 전능련도, 네가 긁어모은 재산들도, 네 애인도!]“날 건드리는 건 좋지만 내 애인은 안 건드리는 게 좋을 텐데.”
[이제 와서 겁나는 건가? 그래도 네놈 감정에 애정이라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지?]“아니, 그게 아니라, 내 생각에는 나보다 그쪽이 약간 더 위험 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나야 적당히 응징만 하면 그만인데 내 애인은 어디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냥 나라 전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것 같아서…….”
현무의 염려에도 박규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현무는 어째 자신이 봉인된 마왕을 억누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민소하가 무전기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무전기에서는 여전히 박규의 발작적인 명령이 나오고 있었다.
[민소하 사령관! 놈을 당장 사살하게! 놈은 민족의 반역자야!]민소하는 언짢은 표정으로 현무를 노려보았다.
“10점 만점에 3점이다. 강현무. 원래대로라면 불합격이야.”
“굴욕적인 점수군요.”
“그래. 하지만 태성도 발을 뺐고, 이 나라엔 네놈을 대신할 녀석이 없는 것 같군. 그러니 상대 평가를 통해 합격이다.”
민소하는 한숨을 쉬면서 무전기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전군 상황종료. 경계를 종료하고 지정사수들은 복귀하라.”
[수신양호.] [양호.]장교들은 예상했다는 듯 일언반구도 없었다. 레이저 사이트가 순식간에 현무의 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곧 무전기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뭐? 민소하! 너 뭐하는 거야! 군을 왜 철수시켜! 야!]민소하는 대답 없이 현무에게 무전기를 넘겨주었다.
현무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민소하에게 물었다.
“유민이 대체 뭐라고 하면서 꼬셨어요?”
“별 말 안했다.”
민소하는 언짢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내가 어디서 어떤 자료를 찾아보면 좋을지 알려주더군. 거기에 이번 사태의 배후와 음모에 관한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오대성 헌터를 만나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임을 확신했지.”
민소하는 청평 병원에서 플루드가 발생했을 때 오대성을 자신의 관사로 데려와 대화했다.
그의 인간됨을 알고 있던 민소하는 청평 병원을 비롯해 곳곳에서 부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민소하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군인 된 도리로 정부에 총부리를 겨누는 것도 할 짓이 못됐다.
“……그러니 편법이지만, 지금부터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잠깐 눈감고 있겠다. 이건 살충제를 뿌리는 것이지 살충제를 머리에 이고 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해둬야 할거다.”
현무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카라멜 하나를 꺼내들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최고의 전략은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