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65)
지옥에서 독식-265화(265/346)
265화. 천루 (2)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도시 외곽의 풀코보 공항에 착륙했다.
대통령기가 착륙하자 러시아 측의 경호 인력과 함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의전은 많이 생략되었다. 국빈 방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풀코보 공항에는 세계 곳곳에서 세계 각국의 총리, 대통령, 국왕, 혹은 그 대리인 급 귀빈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러시아의 긴급한 초대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기자들은 한국 측의 대통령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진을 쳤다.
경호원들이 안전점검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기자들 사이로 의아한 술렁임이 번졌다.
“누구야? 헌터 같은데?
“어…… 아, 멍청아. 강현무잖아! 같이 왔나본데?”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통령이 아닌 헌터 강현무였다.
기자 중 일부는 던전과 헌터 담당이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았다.
한국의 대통령은 강현무의 뒤를 따라 등장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가장 강한 헌터가 확실하게 안전점검을 한 뒤 내린 것이라 생각하며 대통령의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곧 한국 측의 헌터들도 뒤따라 내렸다.
“지부장님, 정장 입은 거 되게 이상해보여요.”
송여운이 현무의 뒤에 붙으며 속삭였다.
“나정도면 어울리는 편 아닌가?”
“아니, 어울리는 건 당연하죠. 애초에 맞춤 정장인데. 제 말은 되게 낯설어 보인다는 거예요. 지부장님이 자리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출 줄 안다는 게.”
“나 정장 입는 거 좋아해.”
“그건 의외네요. 맨날 던전에서는 헐벗고 계셔서 답답한 복장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현무는 넥타이를 만지며 씩 웃었다.
“뭔가 주인공이 힘을 숨기고 있는 느낌이거든. 인텔리 해 보이는 외견 뒤에 짐승 같은 모습이 드러날 때 갭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법이잖아?”
“……아, 역시 지부장님이네요. 갭은 모르겠고 오글오글함은 폭발중이에요.”
“너야말로 안 어울리게 너무 긴장하고 있는 거 아냐?”
“예? 제가 어때서요?”
현무는 송여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비롯해 모든 헌터들 역시 현무처럼 정장을 입고 왔다.
송여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과 발이 한꺼번에 나가고 있었다.
“본인이 어색하게 느껴는 게 없다면 상관없고.”
“허, 참. 제가 무슨 긴장을 한다고 그러세요? 지금 제가 첫 해외여행이라고 무시한 거죠? 아까 비행기에서도 신발 벗고 타야한다고 그러시고.”
“정말 벗을 줄은 몰랐지.”
“아니, 그 정도는 안다구요. 하지만 대통령기니까 뭔가 예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송여운은 횡설수설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현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대통령의 상태는 좋은 말로라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얼굴 간판 역할만 해주면 충분하다.
실제 직무 수행은 민소하가 붙여둔 수행원들이 할 것이다.
기왕이면 민소하가 왔으면 좋았겠지만, 계엄중인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이 해외에 나가는 것은 좋지 못할않을 것 같았다.
민소하에게는 한국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으니까.
“그래. 알겠으니까 쫄지 말고 있어.”
“지금 누가 쭬랐…….”
송여운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혀를 깨물곤 뒤처졌다.
현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러시아의 하늘은 우중중한 회색이었다. 현무는 그보다 하루 일찍 더 이곳으로 떠난 파트너를 떠올렸다.
‘슬슬 접촉 중이겠군.’
***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대회가 열린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모스크바는 대혼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울란바토르를 덮친 대재앙의 원인은 아직 민간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실종된 교민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의 생존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도시가 순식간에 파괴됐다는 증언을 했다.
어떤 몬스터가, 어떤 식의 파괴가 일어났는지는 증언이 엇갈렸지만 한 가지만큼은 같았다.
몬스터들은 모두 점령 작전을 벌이는 군사들처럼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정부들도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앙의 궤적은 울란바토르를 시작으로, 서쪽─모스크바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현재 카자흐스탄 동부, 인적없는 외진 동토 산맥을 느리게 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그리고 소리 없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공포감을 부추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라고 소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표적지처럼 겨냥당한 모스크바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었다.
유민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응급차를 바라보다가 전화 부스 안에 들어갔다. 그리곤 어떤 번호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신호음은 꽤 길게 울렸다. 유민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곧 누군가 전화를 받고 러시아 어로 물었다.
[여보세요?]“유선이 더 안전하지 않을 텐데. 안전한 번호 불러.”
[누구세요?]“별 잡아먹는 괴물.”
달칵.
전화가 끊어졌다.
유민은 전화 부스에 기댄 채로 잠시 기다렸다.
1분이 넘기 전에 공중전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유민은 아까 자신을 기다리게 했던 것의 딱 두 배 만큼 기다린 뒤,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유민 씨, 굳이 이렇게 스파이 같은 방법 안 해도 우리 서로 번호 알잖아요?]유민과 이서연은 사업 파트너였다. 당연히 개인적인 번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댁이 내 뒤통수 때리려고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었는데 어떻게 믿고 그 번호에 걸겠어.”
유민은 한숨을 쉬었다.
“먼저 나와 접촉하고 싶다고 한건 너야. 그래서 지금쯤이면 이제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짓거리는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너보다 오빠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는 거야. 네가 또 배신하면 어떤 대가를 치를지 오빠가 이미 알려주지 않았어?”
[오빠라.]이서연은 긴장한 기색 없이 낮게 웃었다.
[달달한 표현을 쓰시네요. 유민 씨. 당신들은 그렇게 달달하기만 한 사이는 아닐 텐데.]“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군요.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는 게. 저한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죠.]유민은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니다. 이서연이 먼저 쓸모 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며 접촉해왔었기 때문이었다.
‘아쉽다면 또 연락해오겠지’
전화부스 밖으로 나가려던 유민은 밖에 서있는 사람은 보고 흠칫했다.
베이지 색 코트 차림에 갈색 장발을 깊이 눌러 쓴 모자로 감춘 여성, 이서연이 밖에서 유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서연은 방금 끊은 듯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유민을 향해 가방 하나를 넘겼다.
“받아요.”
“뭔데?”
“우리 측 인사들과 포섭된 사람들 명단.”
“우리 측?”
이서연의 말에 유민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가방을 받아들였다.
“우리 측이라면, 남중국 정부를 말하는 건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나라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벌써 참가하는 모양이지?”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어요. 구 중국은 발악을 하면서 저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친구가 많으니까 시간문제에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탐욕만큼 위력적인 게 없으니까.”
이서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구중국 정부는 북중국이라고 불리며 분리된 국가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미 신장 위구르와 티벳마저도 독립된 나라로 갈라서면서 여기저기 엉망진창이었다.
그에 비하면 남중국은 훨씬 안정적이고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만이 남중국 정부와의 통일 선언을 하면서 그 흐름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때문에 유민은 이서연의 태도가 더 이해가 안 갔다.
“그런 강력한 집단을 왜 뒤통수치는 건데? 배신이 취미야?”
이서연은 낮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들을 이용하는 거예요.”
“하.”
유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이서연이 이용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의도를 바로 알아들었다.
“명단은 완전하진 않겠군. 아마 네 경쟁자들 정도 되나?”
“핵심 요인들은 다 있어요. 당신은 똑똑하니까 목록이 진짜인가 아닌가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들이 그들을 제거하고, 저는 제 역할을 다 하고나면 조직도 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죠.”
“자신 있나보네?”
“기회는 위기 속에서 오는 법이에요. 제가 굶주리는 별에게 위기를 부여하겠어요. 그리고 그 기회 속에서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건 제 몫이죠.”
유민은 팔짱을 꼈다. 이서연의 말은 틀린 데가 없지만 미묘한 불쾌감은 남아있었다.
“오빠는 의도가 어쨌든 이용당하는 거 싫어하는데.”
“어차피 강현무 씨는 저더러 올라갈 만큼 올라가보라고 했어요.”
이서연은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면 조금 이용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죠.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당신들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미래의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조직에 말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민은 피식 웃었다.
이서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저 호의로 돕는 것보다는 이렇게 쌍방이 이득을 보는 거래 형식이 믿을 만 했다.
이서연 역시 한국에 발을 딛기 힘들어지면서 입지가 위태로울 것이다.
“좋아. 오빠한테 전달은 해주지.”
“고맙군요. 그리고…….”
이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신한테도 행운이 따르기를 빌어드리죠.”
***
현무는 대통령 경호를 핑계로 그의 방에서 함께 묵게 되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현무는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침대는 제가 쓸 테니 대통령 각하는 소파에서 주무십시오.”
“알겠네.”
현무의 권속…… 이라기보다 노예 비슷한 것이 된 대통령은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소파 아래쪽에 짐을 내려놓고 자리 잡았다.
나이든 남자를 혹독하게 부려먹고 있으려니 약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3초 이상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현무는 대통령에 대해 바로 잊어버리고 일정을 확인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능력자들과 국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내일 오전 중에 열릴 예정이었다.
끝까지 참가하지 않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재앙이 벌어지는 나라를 방문하고 싶은 국빈은 별로 없을 테니까.
지금도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시시각각 모스크바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한시가 급했다.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면 회의 따위를 할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전력을 쏟아부어야겠지만.’
하지만 러시아가 잘못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루는 국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다.
능력자들이 일제히 연합하고 조기에 전력을 쏟아 붓지 않으면 세계는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의 입장이 궁금하군.’
아마 내일 회의에서는 국가 간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그리고 현무는 그들의 반응으로 어느 나라가 어느 별, 어느 능력자에게 잠식당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반응은 역시 러시아다.
러시아의 행동에 따라, 앞으로의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테니까.
현무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게 옳았다. 지금으로서는 큰 개요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현무는 소파 옆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굳어있는 대통령을 발견했다.
현무는 뒤늦게 소파를 대통령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카펫도 푹신푹신하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카펫에서 주무시죠.”
“……그러지.”
***
다음 날 아침, 현무는 정장을 다시 차려입고 대통령과 함께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장소는 겨울의 설원을 닮은 백색이면서도 화려함을 품은 겨울 궁전이었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공간이었으나 이번 회의를 위해 산뜻하게 개조되어 있었다.
급하게 열린 국제회의치고는 꽤 그럴싸한 의전이었다.
회의장 곳곳은 삼엄한 경호 인력들로 살벌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풍겼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현무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강력한 분위기를 풍기는 헌터들도 보였다.
현무는 렌 제독의 외알안경으로 그들의 능력치와 레벨 등을 즐겁게 살펴보았다.
‘다들 한가닥 하는 놈들이군.’
하지만 그중 주의해야 할 놈들은 없었다.
그나마 조금 신경 쓰인다 싶은 놈들은 얼굴을 무언가로 가리고 있었다.
현무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문득 누군가를 발견했다.
한 여성이 딱딱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탄 노년의 여성과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현무는 바로 그녀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담 폴트.”
평양 수복전 당시, 사태가 수틀리자 체페슈 케이스로 현무를 끝장내려 했던 강력한 능력자.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