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67)
지옥에서 독식-267화(267/346)
267화. 천루 (4)
인류가 다른 종에게 받는 최초의 도전.
이 자리에 초대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국력도, 능력자 보유수도 상위에 속하는 나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재난을 막아낼 희망이 없다. 당장 나서서 단합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쉽사리 찬동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장 인류가 위험에 처했다하더라도 여기 있는 자들은 대부분 안전한 자리에서 호위호식하며, 던전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귀한 인적자원이 얼마나 갈려나갈지 모르는 자리에 선뜻 참가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능력자는 군인과 달리 대부분이 민간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전세계는 단결하여 외적을 배제하도록 한다’ 등의 선언 정도로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가벼운 무게추 하나만으로도 기울어지기 쉬웠다.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남중국 정부의 신임 주석, 왕신량 주석이었다.
“남중국 연합은 러시아와 뜻을 함께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몇몇 국가들이 손을 들어 찬동 의사를 표시했다.
남중국 연합의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갑자기 참가하겠다는 국가들이 많아지자 분위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여럿이라면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이상 대세를 따라 기울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달갑지 않은 쪽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남중국에 선수를 빼앗겨버린 북중국 정부 주석이 있었다.
그는 분개한 표정으로 남중국의 왕신량 총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페트로비치 대통령! 정말 저 괴뢰 정부를 인정할 생각입니까! 그럼 저희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13억 중국 인민들이 분노할 겁니다!”
EU의 대표로 참가한 알무트 총리도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전 세계의 뜻을 모아야 할 위기입니다. 하지만 의문점이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사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접경 지역으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이 괴물에 대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서부가 아닌 동부로 이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페트로비치 대통령은 움푹 패인 눈으로 날카롭게 알무트 총리를 쏘아보았다.
알무트 총리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 기가 죽었지만 입을 닫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몬스터의 위장능력이 뛰어나다한들, 시베리아에는 미국을 겨냥한 핵시설이 밀집되어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베리아의 인구가 적다고 한들 그런 곳에서 벌어진 일을 몰랐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지는 않을 텐데요.”
“저희를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알무트 총리. 저희는 정말 몰랐습니다.”
페트로비치 대통령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군은 민간인들이 대피할 캠프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동부에서 무수하게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군은 피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저 괴물을 저지하는데 실패한다면, 피난민들은 좀 더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겠지요.”
페트로비치 대통령의 말은 반쯤 협박이었다.
만약 참전하지 않는다면 네가 피난민과,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빙자한 러시아 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러시아는 명분과 수단, 둘 모두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희 회원국들의 총의를 모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애매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알무트 총리는 내심 참전 쪽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뭔가 잘못되어 던전이 추락한다면 유럽보다는 러시아에 떨어지는 게 낫다.
다만 걸리는 점은 주도권을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미국은 참가하지 않는 거지?’
만약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면 겉으로 불평불만은 다 했어도 결국 모두 참가했을 것이다.
유럽은 나토를 비롯해 경제─군사적으로 미국 의존도가 강했으니까.
‘설마 러시아가 붕괴되길 원하는 건가?’
괴물의 동선을 생각해보면 러시아를 거쳐 유럽을 지나, 대서양을 건너게 된다.
미국은 느긋하게 대서양을 건널 때쯤 괴물을 격추시켜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에게 그럴만한 저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이제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참가하지 않은 미국이 잘못한 것이다.
러시아의 심중이은 의뭉스러웠지만 참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북중국은 연합하기에는 못 미덥고, 분위기는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서 용기를 내서 잠깐 과열된 분위기를 식힐 나라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저희는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알무트 총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대한민국의 김시후 대통령이 손을 들고 페트로비치 대통령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물론 내심 참전하고 싶지 않은 나라도 한국 외에 많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대놓고 드러낼 사람은 없었다.
참전하지 않겠다는 것은 러시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도 방치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적어도 도의적인 면을 생각하면 입 밖에 내선 안 될 말이었다.
“이유는?”
페트로비치 대통령은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김시후 대통령은 그 시선을 마주하자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이유 같은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덜덜 떨리는 입술로, 결코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러시아랑 중국이 사이좋게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
“멋졌습니다. 김시후 대통령.”
“대체…… 무슨…….”
회의장 밖. 복도에서 김시후는 신음 섞인 목소리로 숨을 헐떡이며 강현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페트로비치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잠시 휴식 시간을 선언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은 국가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이번 사건의 동향과 파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김시후 대통령은 사방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무는 쩔쩔매는 김시후 대통령을 보며 심리적인 압박을 조금 풀어주었다.
“무슨, 무슨 의도인겁니까? 러시아와 맞서다니요? 게다가 중국 얘기는 대체 왜 했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러시아의 힘을 좀 뺄 필요가 있어요.”
“힘을 좀 빼다니.”
사람이 죽게 방치하겠다는 말인가?
김시후는 휴머니스트는 아니지만 울란바토르에서 벌어진 일을 영상으로 확인했다.
백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떼몰살 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당장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악마에 가까울 것이다.
현무는 설명을 굳이 해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시선으로 김시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김시후에게 설명을 하나 안하나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물론 그 사이에 김시후가 자신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보겠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였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김시후 대통령.”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여성은 독일의 알무트 총리였다.
십수 년째 독일 총리직을 연임중인 그녀는 EU에서도 관록 있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용기를 내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들 조금 냉정해진 상태로 회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김시후는 강력한 국가 동맹의 대표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인사를 건네자 한층 안도하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알무트 총리의 표정은 약간 흐린 상태였다.
“물론 발언 수위는 조금…… 과격했지만요.”
김시후의 표정이 다시 울상으로 변했다.
“그나저나 직경 18킬로미터짜리 괴물이라니, 크롬에서 늘 보내곤 하는 호러 소설 시나리오 같더군요.”
“천루.”
현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알무트 총리의 시선이 현무에게로 향했다.
“예?”
“저희는 천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괴물.”
알무트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비서가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 과연.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그 강현무라는 헌터인 모양이군요. 반가워요. 꽤 능력 있는 헌터라고 들었는데, 당신이 김시후 대통령의 숨겨진 자신감인 모양이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무는 미소 지었다.
알무트는 다시 김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국제 회의 결과였다.
“하지만 김시후 대통령, 뭔가 후속 대책은 있나요? 정말 러시아가 망하라는 마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울란바토르 같은 인명 피해가 또 한 번 발생하게 둘 수는 없어요. 러시아가 주도하고 있는 분위기가 우려되긴 하지만, 러시아도 당사국인 만큼 서두르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요.”
“물론입니다.”
김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천루의 움직임을 먼저 분석하는 게 옳습니다. 미개척 던전에 대한 원정이 통상 일주일 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할 때, 천루도 최저 그 정도는 걸리리라 감안해야 합니다. 만약 원정이 실패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격추해야 할 텐데, 그러면 뒷감당도 뒷감당이지만 우리는 최고급 헌터들을 크게 잃는 셈이 됩니다.”
현무는 놀란 얼굴로 김시후를 바라보았다. 지금 하는 말은 현무가 지시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헌터들이 천루를 공략하는 동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요. 연구와 분석을 통해 천루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면 좀 더 안전한 장소에서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과연.”
알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시후의 말에 찬성했다.
“맞습니다. 지금은 천루의 움직임과 생태를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아직까지는 인적이 드문 지대를 느리게 전진 중이라고 하니 민간인 대피만 제때 이루어진다면 최소 일주일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그 사이에 민간인 구조와 천루의 유인에 신경 쓰면 좋겠군요. 과연, 이거라면 직접 천루 공략에 참가하지 않아도 충분히 면피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알무트는 짧게 미소 지었다.
김시후가 아무 생각이 없는 광인은 아니라는 것은 알아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현무는 김시후와 눈이 마주쳤다. 김시후는 보이지 않게 숨을 내쉬며 목덜미의 땀을 닦아냈다.
‘과연.’
박규에게 조종당하던 데다,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매국노지만 그래도 짬을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니란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뭣보다 김시후는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신세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정도 임기응변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김시후 대통령, 결국 우리는 천루를 제거하긴 해야 합니다. 러시아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찝찝함만 없다면 기꺼이 참가를 결정 할 텐데…… 저희가 공연한 의심으로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좀 더 직접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말해달라는 뜻이었다.
김시후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간신히 풀어졌다.
“왜 참가하지 않겠습니까?”
“예? 아까 회의에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서 발을 뺀다면 인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없지요.”
김시후는 현무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러시아가 주도권을 쥔 것이 걱정이라고 하셨었지요? 그럼 우리끼리 팀을 짜면 됩니다! 여기 강현무 군이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요.”
현무는 그저 웃었다.
김시후의 발언은 임기응변 치고는 선을 넘었다.
열 받는 것은, 그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현무가 하려 했던 것과 같았다는 점이었다.
***
회의가 다시 진행되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동안 원정 참가론자들의 의견은 공고하게 굳은 것 같았다.
명분도 힘도 충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러시아와 남중국 정부가 주축이 된 적극 참가론자들은 ‘만민전선’이라는 이름의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괴물을 천루, 페이룬, 스카이드롭스 등등 제멋대로 명명된 이름을 붙였지만, 어떻게든 놈을 제압해야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반면, 원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EU가 주축이 된, 만민전선에 비하면 소규모 세력이었다.
이 결정은 EU 내부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올 가능성이 있었지만, 알무트 총리는 민간인 보호와 후속 지원 등을 약속하며 발을 빼는 쪽을 선택했다.
북중국과 일본, 한국 등이 여기에 속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정치질이라니, 기가 차는군.”
회의가 종료된 후, 도시 외곽의 호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마리아 켈러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를 위해 침대를 정돈하던 아담 폴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예 참가하지도 않은 미국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아니, 미국이 낫다. 그쪽은 이 회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참가하지 않은 거니까.”
“그렇군요.”
아담 폴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마리아 켈러는 중얼중얼 말을 이어나갔다.
아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에 가까웠다.
“미국은 우리처럼 이 회의가 엉망진창으로 끝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이때까지 놈들의 행보를 보면 분명해. 왜냐면 만민전선이든, 회의론자든 사실 그중 절반은 진심으로 스카이드롭스를 떨어뜨릴 마음이 없을 테니까.”
상시 플루드 상태에 빠져있는 이동형 던전.
아직 일반적인 헌터나 일반인이라면 모르겠지만, 별에 접촉한 사도 급들에게는 그 의미가 다르다.
몬스터가 불어난다는 것은, 그 별에 속한 권속들 또한 늘어난다는 것이다.
“몬스터들이 세우고 정복하는 영토는 곧 사도들의 영지가 된다. 물론 그만큼 적들의 수와 영토도 넓어지겠지만, 때문에 스카이드롭스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지. 스카이드롭스를 정복하는 자가 바로 승리자가 될 거다.”
천루 정복은 무조건적으로 국가 대항전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진상을 모르는 자들은 뒤통수를 맞을 것이고, 아는 자들은 서로 싸울 것이다.
“그럼 EU나 한국처럼 아예 발을 빼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쪽 역시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모자라거나, 나약하거나 둘 중 하나다. 결국 스카이드롭스가 인류의 위협인 것은 사실이니까.”
복잡한 사안이었지만, 결국 원인 자체를 제거해버리면 문제가 될게 없다.
혹시 이번 회의를 통해 협조자를 구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마리아 켈러는 실망감만 재확인했다.
“결국 스카이드롭스가 누군가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면 반드시 떨어뜨려야만 해. 어떤 별도, 어떤 괴물들도 차지하지 못하게끔.”
마리아 켈러는 서늘한 표정으로 아담 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중요하다. 아담 폴트.”
마리아의 시선에 아담은 천천히 다가갔다. 마리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중얼거렸다.
“모든 괴물을 잡아먹는 백성 없는 왕.”
“…….”
“괴물들의 별, 오거스트로의 대리인인 너만이…… 인류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묶어둘 목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