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69)
지옥에서 독식-269화(269/346)
269화. 천루 (6)
“불가합니다.”
아담 폴트는 칼같이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마리아 켈러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다시 다그치려 했지만, 아담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휠체어를 붙들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크롬의 요원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담!”
마리아는 아담이 방에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를 데리고 나갈 준비를 해놨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시내를 빠져나갈 교통수단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교수님, 진정해 주십시오. 지금 여기서 체페슈 케이스를 시작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스카이드롭스가 도시 바로 위로 떨어질 겁니다. 게다가 도시 안에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국가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거다!”
마리아는 한 번 더 아담을 다그쳤다.
그녀는 이성을 잃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인 판단을 통해 지금 이 상황이 기회라고 여겼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놈들은 자기들끼리 치고받을 거야! 그 전에 해야 한다! 놈들의 눈앞에서 똑똑히 힘의 격차를 보여주면, 누구도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밀지 못 할 거다! 그게 제일 피해를 줄이는 길이야!”
체페슈 케이스는 말 그대로 ‘꼬챙이 형’.
잔혹한 예시를 보여주어 강제로 복종시키고자 만든 프로토콜이다.
때문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을수록, 당사자가 국가 지도층에 가까울수록 효과는 커질 것이다.
마리아는 앞으로 인류가 서로 부딪치며 흘릴 피를 생각하면 지금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날 대량살상은 감당할 수 있는 피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카이드롭스는 지금 점령을 위해 고도를 상당히 낮춘 상태다. 추락한다고 해봤자 피해는 국소 지역에 그칠 거야. 스카이드롭스가 더 높은 고도로 떠오르면 그때는 체페슈 케이스를 쓰고 싶어도 못 써!”
“안됩니다.”
그러나 아담은 단호하게 말했다.
천루의 추락으로 휘말릴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서는 아니었다.
“교수님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은 부담할 수 없습니다.”
아담 폴트가 체페슈 케이스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오직 마리아가 자리에 없을 때뿐이다.
마리아는 고함을 내지르며 서류철로 아담의 뺨을 후려쳤다. 아담의 고개가 팩 돌아갔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지하 주차장에는 이미 시동을 건 방탄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운전수로 준비된 크롬의 요원 역시 4성급 능력자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아담 폴트 씨가 직접 바래다 드리는 쪽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아담이라면 호텔을 통째로 들어올려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중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공중으로 이동하는 건 현명한 게 아닐 것 같군. 게다가 다른 능력자들도 곧 천루에 올라타려고 별 짓을 다 할 거다. 중간 중간 막힌 길만 뚫으면 지상이 되려 안전해.”
“하지만 몬스터와 마주친다면…… 아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최강의 능력자가 함께 차를 타고 가지 않는가.
아담은 마리아의 몸을 끌어안고 차에 태웠다. 마리아는 불타는 눈으로 아담을 노려보았다.
“아담, 이대로 탈출한다면 우리는 정말 기회를 잃게 된다. 다른 놈들이 천루를 점령하기 전에 막아야 해.”
“교수님이 여기 계속 계시면 제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담은 마리아를 설득했다.
“교수님의 안전만 확보되면 바로 나서겠습니다. 놈들이 그렇게 스카이드롭스를 원한다면, 갈가리 찢어발겨진 토막을 갖게 만들죠.”
***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김시후 대통령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겁에 질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가로등 불빛 때문에 천루의 윤곽은 희미하게 보였다. 하늘을 주름 놓은 듯한 기이한 문양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흐느적거리다가 갑자기 땅을 향해 내리 꽂히는 촉수는 그 끝에 꿰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케했다.
“강현무, 강현무 헌터는 아직 연락이 안 되나!”
“모든 무전이 먹통입니다. 핸드폰도, 비상연락망도…….”
설령 EMP가 터지더라도 통제권을 잃지 않도록 구리케이스에 넣어놓는 무전기조차 먹통이었다.
그 말인즉슨 전파 방해 수준이 아니라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체가 아예 두꺼운 구리 관 같은 것에 뒤덮여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뛰어서라도 찾아와!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
불현듯, 반가우면서 반갑지 않은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시후 대통령은 어느새 창틀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강현무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안 그러면…… 안고 춤이라도 추겠다! 저건 대체 뭔가?”
“이미 자료 봤잖습니까. 천루라고.”
“저게 대체 왜 갑자기……? 아, 아니. 이건 비상사태 아닌가! 어서 탈출해야지,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잖나!”
김시후 대통령의 난리법석에 현무는 그의 정신을 약간 억눌렀다. 의지를 억압받은 김시후 대통령은 이내 차분해졌다.
헤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것도 차분하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알무트 총리에게 연락이나 하십시오. 뭐, 지금 같은 기회가 또 올 리가 없으니 그쪽도 알아서 잘 판단했겠지만.”
“알…… 알아서 뭐?”
의지를 억압하면 지능도 덩달아 떨어지는 게 문제다. 현무는 김시후 대통령의 의지를 다시 풀어주었다.
대통령은 현무가 잠깐 억눌렀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까처럼 흥분하지는 않았다.
“어, 우리는 만민전선과 노선이 다른 플랜을 세우고 있지 않았던가?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하나도 없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사항은 일을 진행하면서 결정하는 겁니다. 상황은 벌어졌고, 지금은 뛰어야 할 때죠.”
“하지만 준비가…….”
“준비라뇨? 이렇게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가 또 있을 것 같습니까?”
김시후 대통령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준비라니?
그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았고, 이런 사태에 대비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현무는 몸을 비켜 커튼을 투둑 뜯어냈다. 도시의 야경이 훤히 들어왔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서 헬기가 떠오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천루에 대해 빠삭하게 예습한 직후에, 각국이 자기 나라에 이런저런 찬반을 물을 틈도 없이, 각국 최강에 속하는 능력자들이 죄다 한자리에 모인 상황입니다. 또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습니까?”
***
갑작스러운 천루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지만, 이것을 기회라고 여긴 사람은 마리아 켈러나 현무 뿐만이 아니었다.
판단이 빠른 지도자들 거의 전부가 즉각 헌터들에게 출동 명령과 항공 수단을 수배했다.
“가라.”
타타타타타타.
페트로비치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요란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상공에 울려 퍼졌다.
묵빛의 장비들로 중무장한 헌터들을 태운 헬리콥터 수백 대가 곳곳에서 떠오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헬기 중 한 대에는 다른 헌터들처럼 똑같은 장비를 차려입은 페트로비치 대통령도 함께 했다.
그의 움푹 팬 눈은 불타오르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항공수단이 마련되어 있던 러시아였지만, 다른 국가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원 받아내라. 받을 수 없다면 사고, 살 수 없다면 빼앗아라.”
남중국 연합의 린후이민은 현무에게 망신을 당한 직후였지만, 그걸 오래 가슴에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강현무가 그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
당연하지만 러시아에서 군용 헬기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남중국 연합은 러시아측 헌터들에게 기습을 가해 그들을 살해하고 헬기를 빼앗았다. 여의치 않으면 방송용 헬기까지 강탈했다.
곳곳에서 피에 물든 헬기들이 뒤따라 올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린후이민, 전투기입니다!”
러시아 공군에서 스크램블이 발동되어 전투기가 출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투기 역시 천루의 배 아래에 들어온 순간, 교신이 끊어졌다.
국가 수반의 생사가 불분명하고,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 전투기가 판단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아군이 아니면 배제하라.
쾅! 콰쾅!
린후이민은 탈취당하여 날아오르던 방송사 헬기가 기총사격을 받고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헬기 안에는 남중국 연합의 헌터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방송사 헬기에도 거리낌 없이 사격을 가할 수 있는 나라가 자신들 말고 또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최고급의 능력자들이 허무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린후이민은 자신보다 상공에 있는 헬기들을 표적으로 삼도록 지시했다.
그가 탄 헬기는 공격헬기였던 탓에 무장이 실려 있었다.
적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모든 헬기들.
남중국 연합 중 자신들보다 먼저 뜬 헌터들은 없었다.
즉, 위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불꽃이 수놓았다.
운 좋게 엔진을 건드린 건지 폭발이 이어졌다. 그러나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상공은 현란한 빛다발들로 가득해졌다.
바로 수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만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단결을 맹세했던 자들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둠은 할퀴어지고, 폭발하고, 불타고, 피 흘리며 비명 질렀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손에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천루 공략에 소극적이었던 알무트 총리마저도 긴급하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부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무선이 안 된다고? 유선도 끊어졌어? 그럼 뛰어! 뛰어서라도 전파가 터지는 곳으로 가!”
안타깝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김시후 대통령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새삼 현대 문명이 얼마나 전파와 위성에 의존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천루의 등장은 러시아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임이 분명했다.
러시아의 꿍꿍이가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 기회를 놓치면 러시아가 주도하는 만민전선에 상황이 끌려갈 뿐이었다.
그렇게 알무트 총리는 갑작스럽게 적극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알무트 총리님!”
때마침, 문을 열고 도착한 사람을 보고 알무트 총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시후 대통령과 그의 수행원단이었다.
“맙소사, 다행이군요. 숙소가 가까웠던 모양이죠? 잠깐, 그러고 보니 강현무 헌터는 어디 있죠? 당장 그와 상의해야…….”
“강현무 헌터는 전능련 핵심전력과 함께 출동을 준비 중입니다. 알무트 총리는 저희와 함께 대피하도록 하죠. 이미 수송헬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수송헬기가요? 하지만…….”
하늘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지금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양국의 지도자가 한꺼번에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 측에는 안전을 보장해드릴 인사가 있으니까요.”
그때 알무트 총리는 김시후 대통령의 수행원단 뒤쪽에 있는 사제복을 입은 금발의 백인 남성을 발견했다.
그녀도 아는 얼굴이었다.
모를 리가 없다. 독일의 몇 안 되는 4성급 헌터였으니까.
“요한 사제…….”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리님.”
알무트는 그의 어딘가 그늘진 무표정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방황할 때보다는 나아보였다.
알무트 총리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사제까지 있다니, 안심해도 좋겠군요. 좋습니다. 그럼 천루는 강현무 씨에게 맡기고, 저는 제 능력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지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상에서도 움직여야 할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알무트 총리는 김시후 대통령이 말하기도 전에 미리 대답을 유추해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구하러 올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전하려던 메시지를 빼앗긴 김시후 대통령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강현무…….’
알무트 총리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게 된 것에 대해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강현무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정확했다.
같은 편이라 다행이었지만, 마치 잘 맞물린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피하기 힘들었다.
***
천신만고 끝에 천루 위에 올라탄 메이륜하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지상에서 뜬 헬기 중 천루 위에 닿은 헬기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서로 총격을 가하거나, 미사일에 맞거나, 대공포에 격추당하거나, 떨어지는 몬스터에 충돌하거나, 촉수에 휘말려 추락하는 등 수많은 최상위 헌터들이 개죽음을 당했다.
“빌어먹을, 어서 던전 입구를 찾아! 러시아 놈들이 먼저 도착했다!”
천루 위에 반쯤 부서져 있는 헬기를 보고 메이륜하이가 소리쳤다.
헬기는 천루 위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만민전선의 목적은 천루의 안정화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뿌리 깊은 러시아와 중국의 원한관계가 천루 위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빨리 움직여라!”
“야, 그렇게 서두를 거 없어. 빨리 가봤자 빨리 죽는 것 밖에 더해?”
미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정면에 있는 부서진 헬기에서였다.
갑자기 헬기 뒤쪽에서 무언가 휙 날아오자 메이륜하이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잘려나간 머리통이었다.
메이륜하이는 검은 마스크를 보고 곧바로 러시아 측 헌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얘네 착륙 되게 못하더라. 너네 꺼 타고 올걸 그랬어.”
이내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남자를 보고 메이륜하이는 이를 악물었다.
“……강현무.”
러시아 측 헬기는 불시착한 게 아니었다.
강탈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