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72)
지옥에서 독식-272화(272/346)
272화. 하늘이 무너진다 (3)
흔히들 매우 빠른 속도를 빛에 비유하곤 한다.
빛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 값도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아득하게 넓은 우주는 지루하게 느린 빛의 속도를 기다려야만 한다.
하지만 현무와 이지태 사이에 있는 십여 미터의 간격 정도는 빛의 속도로 따지면 존재하지 않는 거리나 마찬가지다.
이지태가 광휘의 날개를 사용한 순간, 현무의 눈에는 터져 나오는 빛무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지태는 자리를 박차고, 공간을 가로질러, 현무의 얼굴을 후려치기까지의 순간을 반짝이는 명멸 하나로 응축시킨 것이었다.
물론 정말 빛과 같은 속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현무가 그 주먹을 막아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딱 한 번까지만 말이다.
쾅, 콰쾅!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무는 뭐에 당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몸이 공중에 뜨고서야 뒤늦게 첫 번째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됐다. 그리고 연달아 전신에서 격통이 전해졌다.
일곱 번.
현무가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몸을 두들긴 주먹질의 횟수였다.
‘이런 빌어먹을?’
눈 깜짝할 사이라는 표현도 부족했다. 현무는 뒤늦게 기시감을 느꼈다.
난이도: 지옥에서 스킬: 배틀헬퍼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강제로 뇌에 전투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때.
그때 현무는 이지태로 추정되는 자와 싸운 적이 있었다.
‘벌써 그때에 거의 근접해있다고?’
현무가 추정하기로는 거의 난이도: 악몽 내지는 어려움쯤에 도달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난이도도 보통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비정상적인 강화였다.
쾅.
생각하는 사이에도 이지태의 공격이 또 한 번 현무의 명치를 후려쳤다.
그만, 이라고 말하려던 현무는 입술을 얻어맞았다.
검이 아니라 주먹을 휘두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검이 아니라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파괴력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하니까.
이지태의 주먹 한 방 한 방에는 대형 트럭 한 대를 폐차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런 개─”
현무는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안면을 치는 공격을 맞고 말았다. 그 순간 이지태는 주춤했다.
현무가 이지태의 손가락을 콱 깨문 것이었다.
파괴력이 현무의 뇌에 정통으로 전달되던가 목뼈가 부러지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때 이지태는 현무의 몸에서 자신의 빛과 반대되는, 음울한 짙은 보랏빛 연기가 배어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이지태는 명치에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충격이 전해져왔다. 이지태는 벗어나려 했지만 현무는 이지태의 손가락을 꽉 문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이빨이 파고들어 뼈까지 닿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쾅, 콰직.
현무는 확 목을 틀어 이지태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지태는 비틀거린 순간 재차 다시 안면에 주먹을 얻어맞았다.
입안에서 와득거리며 이빨이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현무는 또 한 번 주먹을 뒤로 젖혔다가 이지태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이지태도 가만히 맞고 있진 않았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틀어 이마로 주먹을 들이받았다.
뻑 소리와 함께 이지태의 머릿가죽이 찢겨나가며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현무의 손가락도 부러졌다.
이지태는 멈추지 않고 현무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그때부터 방어도 회피도 없는 막싸움이 시작되었다.
거리를 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지태의 궁극기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서로 지근거리에서 애처럼 두들겨 패기에 여념이 없었다. 싸움이 멈춘 것은 어느 순간 콰득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였다.
이지태는 흠칫하며 현무를 발로 걷어 차 밀어냈다.
쭉 밀려났던 현무는 입안을 우물거리다 퉤 하면서 무언가를 뱉어냈다.
이지태의 손가락 두 개와 자신의 부러진 이빨들이었다.
“어떠냐, 새끼야. 너도 아프지?”
이지태는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현무를 노려보았다.
“짐승 같은 놈…….”
“짐승이랑 싸우려면 물릴 각오는 해야지. 그런데 어디보자, 내가 다섯 배 쯤 더 많이 얻어맞았으니 영 손해 본 느낌인데.”
“내가 칼을 들었다면 그만큼 얻어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네가 칼을 들었다면.”
현무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이빨이 부러진 빈 자리가 허전했다.
“지금 넌 이미 죽었어. 알아?”
***
이지태는 눈살을 찡그렸다.
강현무가 어떤 자신감으로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낸다. 지금도 설마 이렇게 비등한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셨는데도 이 정도라니…….’
게다가 거의 일방적으로 때린 자신보다 강현무의 상태가 훨씬 더 멀쩡해보였다.
현무가 휘두른 주먹에 맞을 때마다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이 전해져 아직도 멍할 정도였다.
그때 박도령이 이지태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아직 재활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태다.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
“압니다.”
어차피 이지태도 주먹을 한껏 휘두르고 나니 강현무에 대한 살의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물론 강현무에 대한 원한은 여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대의가 있었다.
현무는 힐끔 자신의 옆에 있는 수정석을 보았다.
수정석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때까지 깨뜨렸던 다른 평범한 던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도 현무가 찾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는 숫자가 적은 게 불리하군.’
전능련도 뛰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만민전선 쪽에서 먼저 목적을 달성할 것 같았다. 길게 시간 끌 여유가 없었다.
현무는 부러진 이빨을 마저 뽑아내고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가면을 쓴 여자도 현무가 뱉은 손가락을 주워 이지태에게 포션과 함께 넘겨주었다. 현무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탈을 보아하니 동맹에 확실히 들어간 모양이구나, 이지태. 맨날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기만 하던 놈이 남의 발바닥을 핥으려니 혀가 저리지?”
이지태는 현무의 말에 기가 찬 모습이었다. 그는 말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해서 박도령이 입을 열었다.
“누차 이야기한 것 같지만, 동맹은 네가 상상하는 그런 권위적인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상으로 엮인 느슨한 공동체 같은 것이지. 그중 몇몇만 서로 알고 지내며 조직을 형성하는 것뿐이다.”
“사상?”
“인류를 위한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상이지.”
“그거 되게 사이비 같네.”
그때 이지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의 역할도 있다.”
현무는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드디어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동맹은 네 생각보다 방대하다. ‘동맹’은 지옥이 닥칠 미래에 맞서 하나의 전선을 구축하는 자들을 뜻하지. 선생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대의 아래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것을 준비해두셨다.”
“그러니까, 사이비 같다니까.”
“사이비 종교와는 달라. 선생님께서는 스스로의 모자람을 아신다. 그리고 완벽함이라는 건 없다는 것도 아시지. 그래서 ‘최선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거고.”
최선이라.
현무는 여전히 그 단어가 거슬렸다.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만 하면 동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동맹이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말이야.”
“이제는 위험한 다단계처럼 들리기까지 하는걸. 혹시 너 다이아몬드 등급이라도 되냐? 잘나가던 재벌이 못 본 사이에 금치산자가 되었구나, 이지태?”
“선생님을 직접 만나본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거다, 강현무. 불안감은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들지.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대의에 속해있다는 확신을 말이야.”
“그러니까 한번 만나게 해달라니까.”
현무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비웃으려 했지만, 박휘소를 떠올리자 그의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현무는 박휘소 한 명의 마음도 움직이는데도 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박휘소는 동맹으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당했음에도.
심지어 아직까지도 박휘소는 둘 중 누군가 다치는 상황을 염려해서 현무가 선생님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민전선도, 크롬도, 태성도, 호환마마도, 심지어 너희 전능련까지도 모두가 선생님이 그린 그림 아래서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이 준비하고 있는 최선의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이지태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현무를 노려보았다.
“강현무, 네가 가장 큰 축이지. 아니, 가장 큰 축을 차지해버렸다.”
“뭐라고? 아, 이 자식 스포일러 하네.”
“……스포일러?”
“그렇게 대뜸 내가 선생님이란 놈한테 중요하다고 말해버리면 어떻게 해. 그렇게 말하면 방해하고 싶어지잖아.”
“인류를 위한 최선의 미래라는 내 말은 못 들은 거냐?”
“그 최선의 미래라는 건 누구 기준의 최선이냐?”
이지태는 움찔했다.
간혹 강현무에게선 예상치 못한 예리함이 느껴지곤 했다.
현무는 이지태를 무시하고 수정석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서 수정석이 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적어도 내 기준은 아닐 거 아냐. 그럼 내게는 좋아봐야 차선의 미래일 뿐이지.”
수정석이 깨져나가고, 주변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여기도 아니군.”
현무는 싱긋 웃으며 이지태를 바라보았다.
“다시 달리자고. 시간 너무 오래 끌었어. 여기서 타협을 보지. 너희들도 일단 찾던 걸 포기하고 만민전선을 저지하자고. 그건 나도 방해 안 할 테니까. 이건 찬성이지?”
“찾던 거라니, 우리가 뭘 찾고 있는지 아는 건가?”
“그거 찾고 있잖아. 그거, 음. 뭐라고 해야 하나.”
현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적당한 단어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적당한 용어를 생각해냈다.
“맞아, 천루의 심장 말이야.”
***
천루의 상황이 강현무와 이지태 때문에 혼전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지상은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크롬의 요원들과 EU의 헌터들이 지상에 남아 민간인 구조에 전념하고 있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계속 천루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내려오면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타타타타타.
이제 대부분의 헬기가 천루에 올라선 상황에서, 뒤늦게 홀로 올라서는 헬기 한 대가 있었다.
헬기 좌측에는 태성 그룹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태성 그룹의 헬리콥터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천루 위에 착륙했다.
잠시 뒤, 헬기에서 익숙하지 않은 헌터 복장을 입은 이서연이 내렸다.
그리고 바로 뒤따라 복면을 쓴 사람이 이서연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댄 채 내렸다.
복면인이 손짓을 보내자 이서연은 한숨을 쉬며 헬기 조종사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요. 다른 헌터들은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하지만 아가씨.”
헬기 조종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모시는 주인의 머리에 총구가 닿은 상황에서 억지 를 부릴 수도 없었다.
결국 헬기는 다시 혼자 떠올라 지상으로 향했다. 이서연은 뒤통수에 닿은 총구의 차가움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 둘뿐인데 총은 그냥 치우죠. 유민 씨. 이미 이 상황을 즐기고 있던 것 같지만.”
“보통 중학교 2학년 때 한 번쯤 하이재킹을 꿈꾸지 않나?”
유민은 답답했던 복면을 벗었다.
총은 뗐지만 여전히 총구는 이서연을 향해 있었다. 이서연은 여전히 거슬린다는 눈치였다.
“당신을 배제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치웠어요. 그깟 총으로…….”
그 순간 유민은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과 함께 천루 위에 있던 어른 키 만한 바위 하나가 짐승에 물린 것처럼 베여나갔다.
이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 이건 마탄의 상위호환 버전 같은 건데, 우리 오빠밖에 못 만들어. 그런데 속성 같은 걸 담을 수 있거든. 때마침 내가 좀 특이한 스킬을 얻었는데, 되게 이상한 속성을 담을 수 있다?”
유민이 아직 임시로 지니고 있는 스킬, ‘종말의 짐승’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강화된 마탄이 아니더라도 총을 맞으면 죽는 것은 이서연도 마찬가지다.
이서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 말은,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거죠. 애초부터 저는 강현무 씨에게 협조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당신을 해치겠어요?”
“음, 당신이 태성 측 헌터들을 끌고 천루 위로 올라가려던 걸 내가 당신을 인질삼아 저지하고, 우리 단 둘이 올라가도록 강요했으니까?”
“확실히 충분한 사유기는 하지만.”
이서연은 이를 갈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사소한 거예요. 어차피 제 목적은 천루 위에 올라와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건 유민 씨의 목적과 상충될 건 없다고 봐요.”
“책상머리 직업인줄 알았는데, 현장에서도 할 게 있나봐?”
“저는 그 질문 오히려 유민 씨한테 돌려드리고 싶네요. 제가 알기로는 유민 씨는 던전도 한 번 가본 적 없는 걸로 아는데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올라올 이유가 있는지.”
유민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 이서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움직였다.
“천루까지 옮겨다줬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하세요. 저는 만민전선을 찾아갈 생각이니까. 그쪽은 보나마나 강현무 씨를 찾아 갈 테니 만민전선이랑 마주치면 좋을 거 없겠죠?”
그때였다. 이서연이 가려던 방향에서 누군가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서연은 그가 입은 복장을 보고 바로 남중국 연합의 헌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이서연은 바로 다가가려 했지만, 바로 유민에게 붙잡혔다.
“야, 자세히 봐.”
밤이라 잘 안보였지만 헌터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헌터의 외견은 이곳저곳이 문드러진 상태였다.
이서연과 유민은 입김이 흘러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고도가 높다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냉기가 몸을 엄습했다.
“언데드네요.”
천루 곳곳에서 살해당했던 헌터들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