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280)
지옥에서 독식-280화(280/346)
280화. 속삭이는 별 (2)
“동생인데 인사도 안 하고, 왜 그렇게 피해 다녀?”
이서연은 언짢은 표정으로 현무를 쏘아보았다.
“쳐 죽이고 다니던 별의 권속 중 한 명이 누나라는 걸 알면 참 기뻐하겠네.”
“뭐야, 설마 아직도 말 안 한 거냐?”
“할 필요가 있나?”
이서연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지태는 말 잘 듣고 착한 동생이거든. 너한테 물들지 않고 쭉 그렇게 있어주면 좋을 텐데.”
“물들면 안 될 사람이 가족 중에도 한명 있는 것 같군.”
이서연은 팔짱을 낀 채 다가왔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긴장한 기색이 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선 고마움을 표하지. 최상의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차선의 결과를 뽑아냈으니까. 린후이민은 헬렌의 숙청 대상이었어. 이걸로 내 입지가 올라갈 거야. 레벨이 한참 모자라니 사도는 무리겠지만 그거야 시간문제고.”
이서연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굶주리는 별의 세력 안에서 중국인들 힘이 너무 강한 게 문제였거든. 이걸로 세력이 좀 나누어지겠지. 운이 좋으면 태성의 파벌도 강화할 수 있을 테고.”
“쉽게 풀리는군.”
“그래. 천루가 이렇게 사라진 건 전체로서 보자면 손해지만, 뭐. 제3, 4의 천루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고 말이지. 당장 중요한 건 내 이득 아니겠어. 그리고 나는 이번에 퀘스트를 또 하나 성공해서 말야.”
이서연은 긴장한 상태에서도 꽤 기분이 좋아보였다.
현무는 왜 이서연이 자신에게 이런 것들을 보고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그래봤자 그녀가 한 것은 거의 없다. 현무와 유민이 해낸 일에 얻어 탄 것뿐.
그러다 현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이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건가?”
“……표현 참 비참하게 하는군. 그래. 그러면 안 되나? 굶주리는 별 안에서 입지를 다지는 게 네가 나한테 부여한 임무잖아?”
임무라.
이서연에겐 굶주리는 별에 대한 뚜렷한 충성심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득을 위해서 모인 자들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거나.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나와 이지태의 커넥션도 꽤 쓸모가 있다고. 무슨 뜻인지 알아? 동맹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알고 있다는 말이야. 내 동아줄이 너 하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지금은 그런 것보다 너 자체가 좀 궁금한데.”
이서연이 무슨 말인가 하며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본 순간, 현무가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챘다.
얼마 전 무안국제공항에서 굶주리는 별의 사도들을 처치했을 때 박살냈던 손이었다.
당시 이서연의 손은 수술은 물론 포션으로도 복구 못할 정도로 망가졌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오른손은 철퇴를 휘둘러댈 정도로 멀쩡했다.
“뭐야, 여자친구 앞에서 그렇게 다른 여자 손을 막 잡아채도 되나?”
현무는 이서연의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장갑을 잡아당겨 벗겨냈다.
이서연은 움찔했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오른손은 흑요석처럼 검은빛이었다. 현무가 뭉개버렸던 것처럼 망가져있지도 않았다.
현무가 그녀의 조각상처럼 깨끗한 검은 손을 확인한 뒤에야 이서연은 확 손을 빼낼 수 있었다.
“유민이 말했던 대로군. 그 손, 아이템인 듯한데, 어디서 얻었지?”
“……굶주리는 별로부터 받은 손이다. 왜?”
“아, 그래.”
현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진실 여부를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어디서 온 손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서연이 왜 그 손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하지만 현무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으니까 돌아가. 더 이상 너한테 신경 쓰기 귀찮다.”
이서연은 굴욕적인 대우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도 강현무와 길게 얽혀서 좋을 게 없었다.
그녀가 할 일은 이제 성과를 안고 헬렌에게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헬렌은 그녀를 강현무처럼 박대하진 않을 것이다.
이서연과 교대하듯 바로 다음 사람이 나타났다.
이지태 덕분에 살아남은 대머리였다.
“……강현무 헌터.”
“어서와, 대머리. 아니, 이반 체렌코브라고 했던가?”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는 그의 잘린 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포션으로 부러진 무릎은 나았지만, 잘린 팔을 붙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헌터로 활동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트로비치 대통령은 죽었고, 러시아 헌터계의 최고 어쩌구 했던 바바 야가도 끔찍하게 죽는 걸 봤을 거야. 그리고 천루는 물 건너갔고, 그쪽 최상위권 헌터들도 완전히 박살 났지.”
이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게 현무의 말대로였다.
페트로비치, 바바 야가와 함께 있던 헌터들은 모두 민간과 군을 대표하는 최상위권 헌터들이었다.
헌터의 보유수가 곧 국력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들이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둘 중 하나뿐이었다.
다른 세력에 집어삼켜지거나, 몬스터들에게 말살당하거나.
“그렇소. 이제 남은 건 파멸뿐이지. 그래서 기분이 좋소?”
“기분이 좋냐니, 나를 무슨 악마인줄 아는 모양이네.”
현무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이반에게 다가갔다.
이지태는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면 최선의 미래를 끌어온다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현무는 이지태 덕분에 살아남은 이반에게 부여할 역할이 있었다.
“나는 너희에게 아주 너그럽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할 거야. 듣고 나면 나를 천사라고 생각하게 될걸?”
***
크렘린 궁, 세나트 안보회의실.
러시아는 페트로비치라는 절대 권력자와 바바 야가라는 강력한 능력자의 쌍두마차로 지배되고 있었으며, 회의는 늘 무겁고 진중하게 진행되었다.
페트로비치는 이미 통곡하는 별의 권속들만으로 이루어진 배후의 조직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 뒤 내각에 하달했다.
서기장을 비롯해 내각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그 결정된 사항들을 의결하고 진행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회의장은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상황을 반영하듯, 뜨겁고 소란스럽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통령은 어디 간 겁니까? 바바 야가도 연락이 끊어진 게 확실합니까? 배후 조직도 완전히 소멸했다구요?”
“이런 때일수록 당장 유럽으로 진격해야합니다! 뭐 하러 군대를 서부로 옮겼습니까! 어차피 빈약한 유럽의 군대는 우리 군 앞에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갈 겁니다!”
“미친 소리! 능력자 공백이 큰 상황에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어디 있소? 당장 어디서 플루드라도 터지면 끝장이오. 세가 약할 때는 전쟁이 아니라 협력을 해야…….”
“핵을 쏩시다!”
“대체 어디에?”
“아무데나 일단 쏘고 봅시다! 지금 중요한건 우리가 취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미친 대가리에 쑤셔 넣고 터뜨리고 싶군.”
회의장이 더욱 극심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러시아 부통령, 미하일 스타소바는 머리를 감싸 쥐고 회의가 아무렇게나 굴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전부 개소리들이다. 귀담아들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미하일 부통령이 이들을 회의장에 불러 모은 것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딴 생각 할까 봐서였다.
실제로 이미 정보가 빠른 국경 쪽의 장성들은 군벌화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들어선 사람을 보고 군 장성과 각료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 부통령은 벌떡 일어나 들어선 남자를 환영했다.
“이반 체렌코브. 어서 오게.”
이반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이반은 페트로비치의 오른팔로 꼽히는 능력자로서, 페트로비치가 던전에 관련된 작업을 수행할 때면 늘 옆에서 보좌해왔다.
그라면 페트로비치와 바바 야가의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
한 장성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반!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들 능력자만 믿고 있다가…….”
“죄송하지만 미하일 부통령님, 다른 각료들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반은 장성의 말을 자르고 미하일에게 건의했다.
장성들은 발끈했지만 미하일은 모두 회의장 밖으로 나가도록 지시했다.
이반은 레벨은 어중간한 사도들보다 높았지만, 신념의 부족으로 아직 사도의 반열에 올라서진 못했던 자다. 하지만 조직 안에서는 준사도급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배후 조직이 어느 정도 건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회의장이 조용해지자 미하일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발 좋은 소식이면 좋겠군. 물론 나도 대통령이 되는 걸 꿈처럼 바라왔지만, 지금처럼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 되는 건 피하고 싶네.”
“제안을 가져왔습니다.”
“제안?”
이반은 품속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아무렇게나 수첩 한 장을 뜯어 적은 듯한 쪽지였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고 읽은 미하일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쪽지 한 장에 아무렇게나 적을 내용이 아니었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지금 이 시국에 농담할 여유가 있어 보입니까?”
“하지만…… 하지만 군사협정이라니? 그것도 일개 개인과?”
쪽지의 내용은 상호방위조약과 유사한 종류의 군사협정이었다.
한쪽이 공격받는 경우, 다른 한쪽이 방위에 협력한다.
하지만 내용의 디테일을 따져보면 러시아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었다.
러시아는 능력자들을 잃었을망정 여전히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고, 쪽지 내용 안에는 핵병기 동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상대는 강현무라는 개인.
단 한 명이다.
“……정확히는 강현무와 그 부속 집단도 동원될 겁니다. 그래도 한 단체의 장이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실질 권력자니까요.”
“설령 그렇다 해도!”
미하일은 책상을 쾅 내려치며 소리쳤다.
“고작 변방의 소국일세!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단체의 능력자와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정이라니? 자네 미친 건가?”
이반은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미하일, 이 협정을 안 맺으면 이 나라는 산산이 쪼개지던가, 합병당하던가, 싹 멸망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러시아 안에 통곡하는 별의 사도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 닥치고 사인이나 하십시오.”
훅. 순간 싸늘하게 불어온 공기가 회의실 안을 휩쓸었다.
미하일은 주춤 물러섰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옅은 성애가 끼어있었다.
이반은 책상 위의 만년필을 들어올려, 미하일에게 건네주었다.
미하일은 주춤주춤 만년필을 가져가 쪽지에 자신의 사인을 그려 넣었다.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반이 그 쪽지를 소중하게 품속에 다시 넣자 미하일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이반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작 한 명의 헌터가 조국의 군대와 핵무기와 대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건가?”
“제 애국심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 상황을 놓고 보자면 저희 목숨 줄을 붙여놓는 선택이 될 겁니다.”
“이런…….”
미하일은 주르륵 주저앉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쩌다 러시아가 이 지경까지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고작 이틀여 만에.
미하일은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듯 이반에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깟 쪽지 한 장에 억지력이 있다고 믿으면 곤란할 텐데, 이반. 그런 종류의 조약은 상호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인 뒤에야 성립되는 거다. 만약 우리가 그냥 무시해버리면 어쩔 거지?”
“만약 강현무가 이 협정을 필요로 할 때 우리가 무시한다면.”
이반은 담담히 말했다.
“우리가 지옥으로 추락할 때 동아줄 하나 없이 떨어지겠지요. 아니, 그때 강현무는 우리 엉덩이를 걷어차고 손가락을 짓밟을 놈입니다.”
***
“린후이민 숙청 작업은 잘 끝난 듯하군. 이서연.”
헬렌은 이서연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걸로 남중국 연합은 이걸로 완전히 우리 파벌 안에 들어왔네. 여러 능력 있는 헌터들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예상했던 큰 손해 없이 숙청을 잘 마무리 지었어. 그쪽 파벌도 잘 흡수한 걸 보니 역시 리더답다고 해야 하나, 아주 유능하게 해냈네.”
“감사합니다. 헬렌. 운이 받쳐줬습니다.”
“운이라.”
헬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냐. 역시 자네에게는 운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강현무가 자네를 주목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리고 굶주리는 별께서도.”
이서연은 움찔했다.
헬렌의 마지막 말은 일종의 견제성 멘트였다.
‘너무 빨라.’
물론 성공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충분한 기반을 다지기 전에 두각을 드러내면 자신도 린후이민 같은 꼴이 될 수 있다.
야망을 드러내면서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는 것. 그것이 굶주리는 별의 세력 안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다.
아니면 아예 견제당할 일이 없을 수준 낮은 욕망만을 갖고 있거나.
“굶주리는 별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굶주리는 별께서 자네에게 시련을 부여하고 싶어 하시더군.”
시련.
사도의 반열에 올라설 기회였다.
하지만 이서연은 초조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서는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기가 힘들다.
그때 헬렌은 소파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겠지. 자네는 아직 능력자로서의 경험이 일천한 편이니.”
이서연은 깊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서둘러 강해지도록 하게. 조만간 개인의 무력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거야. 물론 그 전에 이 게임을 끝내는 게 최선이겠지만…… 참,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임무를 맡긴 게 있었지.”
“예.”
이서연은 숨을 길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동맹 구성원의 일부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현재 동맹은 미국 중추부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높은 확률로, 이미 미국을 비롯해…… UN까지도 지배 중인 것으로 추측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