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48)
지옥에서 독식-48화(48/346)
48화. 가마솥 밑바닥 (2)
자신이 생각한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경험은 섬뜩한 것이었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었다. 보통은 자신의 생각을 목소리로 떠올리지 않는다. 문자나 이미지라면 모를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그저 현무의 상상이었을 뿐, 그것은 그냥 현무의 생각 자체였다.
‘결국 미쳐 버린 건가?’
현무는 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 지옥에서 수백 번을 죽어 나가면서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슬슬 생사에 대한 관념이 이상해지고 있는데 정신만 멀쩡할 수는 없다.
끔찍한 사건을 벌여 놓고는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명령했다든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든가 하는 뉴스에서를 많이 봤다.
하지만 하필 지금?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미쳐 버리지는 말아 줘. 종종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현무는 더럭 겁이 났다. 이게 정말 자신이 상상한 목소리인지, 아니면 진짜 누군가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면 귀신에 씐 건 아닐 테니 일단 지금 당장 오른쪽으로 가자.’
현무의 몸이 발작적으로 오른쪽으로 틀었다. 지나갈 틈이 많은 대로와 달리 골목 쪽은 어둡고 비좁은 데다, 장애물이 많았다. 하지만 현무는 조금도 멈출 틈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오른쪽으로 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무는 이게 곧 대로를 달리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기들은 현무를 집요하게 쫓아왔지만 건물과 건물이 서로 기대며 무너져 가는 골목은 터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현무가 지나가는 만큼 모기들이 들어올 틈도 많았다. 하지만 그 수는 월등히 줄어 있었다.
‘……아니, 잘한 선택 같지는 않군.’
골목은 막혀 있었다. 현무는 무너진 건물 잔해로 막혀 있는 위쪽을 바라보았다. 짚고 올라갈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높았다.
아마도 벽에 매달린 채로 모기에 물려 죽겠지. 모기 한 마리가 현무의 왼쪽 팔에 앉았다. 하지만 모기 주둥이는 왼팔에 착용한 오셰트의 손아귀를 뚫지 못했다. 현무는 놈을 그대로 벽에 뭉개 버렸다.
‘잘한 선택이었다니까.’
또다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는 생각. 현무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목소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면으로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현무는 이를 악물고 모기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그냥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소용없다 해도…….
‘됐어. 수고했어.’
현무의 필사의 각오는 모기를 열 마리 잡기도 전에 끝났다. 더 이상 모기들이 달려들지 않았다. 당황한 현무는 유독 비좁아지는 구간에서 모기들이 허공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기들은 쉴 새 없이 주변을 맴돌지, 허공에 가만히 정지 비행을 하지는 않는다. 기묘함을 느낀 현무는 가까이 가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거미줄이었다.
수정이끼로 강화한 바리케이드마저 뚫고 왔던 모기들이 거미줄에 걸려 퍼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들어왔던 길인데?’
옆을 보자 주먹만 한 거미들이 새롭게 거미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무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머리 위의 커다란 구멍으로는 왜 모기가 들어오지 않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실루엣이라 생각했던 다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머리 위로 2층 건물만 한 거미 한 마리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과부여왕거미(LV 87)]전에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존재가 현무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요굴렘이 짜증내기 전까지는 안전할 거야.’
현무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무언가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현무에게 호의적인 존재였다.
‘누군데, 넌?’
‘누구일 것 같아? 별들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권속이 아니면 그 무엇도 의지대로 수행하기 힘든 이 세계의 규칙 속에서 유일하게 네게 속삭일 수 있는 존재는?’
현무는 이것이 직감적으로 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 준 능력을 보고 딱 하나의 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속삭이는 별, 몽스트릴.
***
[속삭이는 별, 몽스트릴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소리 내서 이름을 말하지 않을 정도의 머리는 있구나.’
몽스트릴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요굴렘의 잔칫상에 잿가루를 뿌리는 거야. 아직까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요굴렘이 알면 언짢아할 테지만, 놈의 변태적인 입맛에 맞춰 주자고 이런 깜찍한 매력 덩어리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몽스트릴의 목소리는 어린 여자 같기도 했고, 늙은 할머니의 주절거림 같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려 해도 종잡을 수 없는 메아리를 잡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궁리하는 척해.’
현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마치 걸으면서 고민하듯이. 몽스트릴이 불어넣는 생각, 아니 속삭임은 자신의 본능을 자극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미쳐 버리거나 조종당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통제권은 어디까지나 현무가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전부는 아니고, 나한테 말을 거는 것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생각하는 것은 구분하기 힘들었다.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법이니까.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네가 멍청하게 받아들인 이 시련을 가급적 빨리 끝내는 것. 요굴렘의 권속들은 네 시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미쳐 날뛰는 데다, 그 숫자도 불어날 테니까. 계속해서 부활하는 네 특성은 이 퀘스트와의 상성이 최악이야.’
현무는 몽스트릴에게 순수한 의도가 있다고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몽스트릴은 처음부터 현무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희귀 스킬을 선물하고, 지금도 이렇게 구해 주고 있다. 하지만 현무는 그만큼 갚아야 할 빚도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구해 주는 거지?’
‘난 너를 내 권속으로 들일 예정이거든.’
몽스트릴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현무도 예상한 답이기는 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세계에서 진짜로 너한테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 놈은 다섯뿐이야. 요굴렘, 아르단, 가울, 베르드, 그리고 나. 그런데 요굴렘이나 아르단은 널 재밌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지. 베르드는 신중하고. 가울은…… 그 교활한 놈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도 몰라.’
‘……대체 왜 나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난 고블린보다 좀 나은 수준인데.’
‘지금 시점에서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없었으니까. 상황이 정체되어 있어서 다들 어떻게든 해결책을 만들어 보려고 고심하고 있었거든.’
플레이어? 현무는 그게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가 혹시 능력자를 가리키는 말인가 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능력자, 즉 인간이라곤 현무밖에 없으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은 다른 놈들보다 낫다 이건가?’
‘다른 놈들이 널 어떻게 꼬드길 생각인지 알면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할걸. 별은 단순한 욕구와 의지로 편향된 세계야. 추구하는 전략도 자기들 개성을 따라가지.’
‘무슨 말이야?’
‘네가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끝없는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요굴렘에게 끌릴 거야. 아르단은 너의 증오와 파괴 본능을 먹잇감으로 삼아 끌어들이겠지. 네가 세상을 적막으로 채우고 싶다면 베르드를 따를 테고. 그 모든 것을 견딘다면, 아마도 가울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 놈은 항상 마지막에 가서야 웃으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해.’
몽스트릴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나를 찬양하고, 나를 숭배하고, 내게 복종해. 굴욕적인 일은 아니야. 연인은 평등하니까. 나 역시도 네게 똑같은 찬사를 보낼 거야. 나의 대전사로서. 그리고 만인 또한 너를 인정하고 사랑할 거야.’
확실히 앞서 말한 넷에 비하면 몽스트릴의 꼬드김은 달콤했다.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것 또한 현무가 갈구했던 것과 똑같았다.
몽스트릴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달콤한 늪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품은 안락하다. 이대로 그녀의 보호를 받으며 능력을 단련한다면, 이제까지 혼자 부딪치며 깨지던 것보다 훨씬 쉽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서 이 지옥과 부딪치기에는 너무나 고독하고 힘들었다.
“나는…….”
[부서지는 별, 가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쩡,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현무는 머리를 팩 틀었다. 망치로 머리를 두들기는 듯한 편두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짧은 순간뿐, 두통이 사라지자마자 취했던 것처럼 흐릿하던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현무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아차렸다.
“여자친구가 있어서요.”
소리 내어 말해 버리긴 했지만 몽스트릴로부터는 답이 없었다. 그녀가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망한 건가?
이제 저 거미줄을 걷어 버리고 한 백 번쯤 죽어 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하는 건 아닐까? 현무는 유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영웅은 한 명의 연인을 두기에는 아깝지.’
‘지금 이 말이 내 생각이야, 아니면 네가 한 말이야?’
‘나, 몽스트릴이 한 말이란다. 어차피 쉬운 남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범한 연인 관계는 아니야. 마음 같아선 내 하렘에 초청하고 싶구나. 요굴렘의 입 안에서 몇 번 구르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련을 이겨 낼 방법 정도는 제공하는 게 좋겠지.’
‘이겨 낼 방법?’
‘가장 쉬운 길은 나나 누군가의 권속이 되는 것이지.’
몽스트릴은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가장 쉬운 길을 거절했으니…… 노력하는 길을 가는 수밖에.’
그때 현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대한 과부여왕거미가 소리도 없이 다가온 것이었다.
수백 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현무는 기겁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 틈에 발목을 휘감은 끈적한 거미줄에 휘청거리다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을 짚은 손도 떨어지지 않았다. 거미 수십 마리가 현무의 몸 위에 올라탔다.
‘네 어설픈 장난감을 완성시켜 주마.’
“아니, 잠깐…….”
현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부여왕거미는 순식간에 휘덕 거미줄에 감아 버렸다. 현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둘둘 거미줄 속에 갇히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
“키륵, 확실한가?”
“확실하다니까. 빨리 째기나 하라고.”
쩍, 갑자기 눈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들어 있던 현무는 불쾌감에 눈을 돌렸지만 밖에 있던 존재는 그러지 않았다. 놈은 다짜고짜 현무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강제로 잡아당겼다. 투투툭,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이 현무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보스, 정신이 드십니까? 키륵.”
현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키르손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허락이라도 받듯 레니안을 바라보자 레니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손은 주먹을 뒤로 끌어당겼다. 명치에 순식간에 주먹이 메다 꽂혔다.
“컥, 허억!”
현무는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켜며 콜록거렸다. 주변은 낯선 곳이었다. 수정이끼조차 없는 공터에, 오직 현무와 레니안, 키르손뿐이었다. 키르손은 현무가 기침을 토해 내자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륵, 일단 이동하는 게 좋겠다.”
“기다려 봐. 집사야, 정신이 드니? 피를 좀 뽑으면 제정신이 돌아오려나?”
레니안은 현무의 미간에 빨대를 꽂으려 했다. 현무는 재빨리 그 빨대를 잡아 밀어 냈다.
“정신이 들었구나! 다행이다, 집사야.”
“……그래.”
현무는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과부여왕거미가 그를 거미줄로 말아 버린 뒤 이곳까지 이동시킨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왜?
그때 현무는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낯선 실루엣을 발견했다.
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