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arding In Hell RAW novel - Chapter (58)
지옥에서 독식-58화(58/346)
58화. 동상이몽 (3)
방공호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능관리부 세종 연구소였다.
낚였다기보다 이능관리부는 국내 던전과 마나, 헌터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손대고 보는 만큼 유사시 전략 자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무가 탐내던 방공호도 유사시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이능관리부가 사들인 곳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현무는 방공호 쪽으로 올라오는 차를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세종 연구소 쪽은 한번 만나야 했다.
차가 멈추자마자 한 중년 여성이 뛰어내렸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성이었지만, 어딘가 얼굴이 익숙했다.
‘TV에서 본 적 있나?’
여성은 현무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세종 연구소장 도원경입니다. 강현무 씨군요. 사진에서 뵌 것보다 인상이 훨씬 강인해 보이시는데요? 몇 번 찾아뵈려 했었는데, 매번 집에 안 계시더군요.”
“반갑습니다.”
아마 집까지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능력자 판정을 받으면서 주소며 전화번호며 전부 적어 놨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현무는 도원경에게 유민을 소개해 주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유민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보였다.
현무는 그녀가 세종 연구소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하던 것을 떠올렸다.
“유민 씨.”
도원경 역시 편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유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유민은 마지못해 손을 마주 잡는 대신 고개를 까딱 숙였다.
“도원경 박사님.”
“아직도 그 랩에 있나요? 그 자식은 유민 양을 착취하고 있다니까. 재능이 아까워요.”
“박사님이랑 있을 때에 비하면 훨씬 편해요.”
뭔가 과거가 있는 사이인 모양이다. 둘 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니 과거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도원경은 간단한 인사로 충분하다는 듯 바로 현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렵게 만나 뵈었군요. 강현무 씨는 일정이 바쁜 듯하니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바로 용건으로 건너뛸까요?”
“좋습…….”
“소속된 클랜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그렇군요. 이 방공호를 사고 싶다고 하셨죠? 무료로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연봉 8천과 공무원 연금, 보험, 차관급에 준하는 우대증까지 발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대신 저희 연구소에서 일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호쾌하다 못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분주한 진행 속도다.
보통 이런 건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어디 앉아서 차라도 마시면서 할 이야기 아닌가?
“취직이라뇨. 저는 연구소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몇 가지 테스트와 질의응답, 아주 가끔 채혈이나 간단한 신체검사 정도로 충분합니다.”
요컨대 실험용 표본으로 고용하겠다는 말이다. 실험의 강도야 현무가 주도할 수 있다 치더라도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제가 돈이 부족해 보이던가요?”
“이런 건물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지요.”
도원경은 방공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러말하거나 언어유희를 즐기길 좋아하십니까? 죄송하지만 저나 강현무 씨나 스케줄을 분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사람이잖습니까. 가급적이면 바로 승낙과 거부, 아니면 조건 협상으로 들어가면 좋겠군요.”
무례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말투에 현무는 화를 내야 할지 좋아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어법이긴 하지만 도원경은 단어 수에도 요금이 붙나 싶을 정도로 단어들을 정직하게 메다꽂았다.
현무는 팔짱을 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연구하려면 유민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가 돕는다면 훨씬 빠를 테지만, 문제는 바로 그 국가다.
현무의 힘의 근원에 대해 간섭하려 들거나 캐물을 수도 있으니까.
“조건은 어디까지 올릴 수 있습니까?”
“제가 조건 협상으로 밀당할 사람처럼 보입니까? 저는 경매에 참가하면 시작할 때부터 바로 최고가만 부릅니다. 그걸로 안 되면 끝이지요.”
“그런 것치곤 딱히 후한 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업에 비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요. 원래 나라는 돈은 적게 주고 대신 다른 혜택으로 후려치길 좋아합니다. 해 줄 수 있는 게 많거든요.”
“예를 들면?”
“세제 혜택이라든가, 사면권이라든가, 군 면제처럼 기업들은 해 줄 수 없는 것들요. 돈은 적게 들고 생색내기 좋죠. 일단 함께 일해 보면 얼마나 해 줄 수 있는 게 많은지 아시게 될 겁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현무가 이미 고아라서 군 면제를 받은 게 아니었다면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예산이 아닌 조건을 붙이죠. 제가 다른 클랜에 가입해도 왈가왈부하지 말 것.”
“연구소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못 받아들일 것도 없군요. 또?”
“연구 내용의 비밀 보장입니다.”
“비밀 보장 범위가 어떻게 됩니까?”
“연구소와 저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유출되어선 안 된다는 거죠.”
“좋습니다.”
도원경은 현무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가 부탁하고 싶었던 건데 강현무 씨가 먼저 이야기해 주시니 좋군요. 조건은 이걸로 충분합니까? 더 요청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제안해 주십시오.”
현무는 시원스럽게 받아들이는 도원경의 모습에 당황했다.
도원경은 국가 연구 기관의 책임자고, 당연히 연구 결과에 대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고를 하지 않는 기관은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구소랑 현무 단둘이 연구 내용을 독점한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다니?
원래대로라면 난색을 하는 도원경에게 비밀 보장 범위를 최소화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상부로 이어지는 연줄을 확인한 뒤 접촉해 보려 했다.
최소한의 사람만 알아야 하는 정보라면 정말 실세로 연결될 테니까.
***
현무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 지나간 것을 본 도원경은 쾌재를 불렀다.
‘역시나.’
녀석은 자신의 체질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 안 되는 피 몇 방울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현무의 몸 그 자체를 세종 연구소가 독점할 수 있다면 던전 수백 번을 탐험하는 것보다 나은 결과물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도원경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그 계획의 성공이 앞당겨질 수도 있겠어.’
강현무라는 자는 이제 막 1성 던전을 클리어한 경험밖에 없는 초심자. 레벨도 높아 봐야 7, 8 정도다.
아직 작을 때 손에 담아 두고 조심조심 관리하는 편이 유리했다. 이를 위해서라도 절대적인 비밀 엄수가 필요하다.
***
한편, 강현무는 도원경의 미소를 보고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 날 피라미로 보고 있는 거군.’
돈과 몇 가지 혜택 정도로 잡아 둘 수 있는 조그만 존재.
능력에 맞지 않는 후한 혜택을 제공하면서 연구소에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비밀 보장 조건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도원경이 보기에 현무는 특이한 존재지,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이 없다기보다는 철저하게 논리적인 연구자의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다.
손안에 가둬 놓고 애지중지 관찰할 수 있는 신기한 햄스터 정도로.
하지만 어떨까.
그 햄스터가 손을 찢어발기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현무는 도원경에게 한껏 미소를 마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현무로서는 상대방이 자신을 얕봐 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그 표정을 뭉개 놓을 때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도원경이 한 약속은 도원경의 발목을 스스로 잡게 될 것이다.
둘의 동상이몽이 시작되었다.
***
절두산 성지.
과거 가톨릭 신자들을 참수했다던 이 절벽은 과거의 사연만으로도 섬뜩함과 숭고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깎아지른 절벽에는 새롭게 씌어진 또 하나의 묘한 공간이 있었다.
절벽은 어느 순간 묵빛의 거칠게 다듬어진 벽으로 변화하고, 검은 석재로 이뤄진 석조물들이 나타난다.
세워지다 만 벽들과 기둥, 난잡하게 부서진 조각상들이 어수선하게 서 있는 공간.
서울 한가운데 있는 3성급 던전, 절두 던전이었다.
3성 이하 던전에는 지역명을 붙인다는 원칙에 의해 일단 공식 명칭은 망원 던전이었지만 머리를 베다라는 이름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수많은 헌터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절두 던전은 지금도 멋모르는 헌터들의 머리를 도려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한밤, 한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절두 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1성급 청계 던전과는 달리 절두 던전 주변은 여러 겹의 철책과 3m 높이의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로 옆에는 중대급 병력이 대기하기 위한 숙소와 기관총 진지까지 세워져 있었다.
모두 절두 던전에서 나올 수도 있는 몬스터를 대비한 장비들이었다. 심지어 경계 병력 중에는 상시 대기 중인 헌터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계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인구 1천만의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3성급 던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속성이 유동형인 절두 던전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유출되는 곳이었다.
“정지, 정지!”
장벽 위에서 한 병사가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총구를 겨눴다. 대개 경계하는 방향은 던전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늦었다. 환한 전조등이 남자를 비췄다.
“무슨 용무십니까?”
“헌터입니다. 절두 던전 방문을 위해 찾아왔습니다만.”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헌터가 던전을 찾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비가 내리는 한밤중, 그것도 혼자 찾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일주일 전 원정을 떠난 하성진 팀 귀환이 늦어져서 왔습니다. 6일 안에 원정 목표를 달성 못 하면 보급 물자를 채우기 위해 입구 주변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물건만 전해 주고 바로 귀환 주문서로 나올 테니 걱정 마십쇼.”
그러면서 남자가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아이템인 귀환 주문서였다. 귀환 주문서가 있다면 귀환석을 획득하지 못해도 입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분대장은 출입 대장부를 뒤져 보고 일주일 전 출발한 팀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확실히 지금쯤 보급 물자가 떨어질 때가 되었다.
보통 절두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는 데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가 걸린다. 곧 문이 열렸다.
병사들은 남자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전능련의 중간급 헌터였다. 짐 검사는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철책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 게 아니다.
병사는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요즘 유달리 변동성이 심하다고 하니 들어서자마자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어요.”
헌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서 없이 서 있는 묵빛의 조형물들 사이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빗소리와 함께 적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 이내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일렁이는 시야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자 보이는 것은 검은 현무암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미궁이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헌터는 그들을 찾을 생각도 없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열려던 헌터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먹은 듯 캐리어를 열어젖혔다. 그러지 안에서 마치 마술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고블린이 뛰쳐나왔다.
고블린의 체구가 작다고는 해도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모습이었다.
“키륵, 여기가 거긴가.”
고블린이 말까지 하는 모습에 헌터는 말문이 막혔다.
심지어 겉모습부터가 평범한 고블린과는 달랐다. 피부색도 어딘가 거무스레하고, 체격도 훨씬 좋은 데다, 장비는 어지간한 헌터보다 나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겠지?”
“어, 가 봐.”
키르손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짓을 했다. 헌터는 고블린에게 말을 거는 자신도, 거기에 대답하는 고블린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일을 받기 전부터 그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고 시작했다.
“……박휘소 씨께 진 빚은 더 이상 없는 거다. 말하는 몬스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군…….”
헌터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자신을 위해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귀환 주문서를 찢었다. 헌터의 모습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키르손은 주변을 살피며 돌다가 캐리어에서 자신의 짐들을 꺼내 들었다. 검은 아동용 우의에 단기간 체류하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현무가 지시한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크르르르…….”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 한 쌍의 눈이 떠올랐다. 흉포한 적의가 느껴졌다.
키르손은 이곳에 오기 전 박휘소가 보통 헌터들은 이곳을 일주일 정도에 클리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키르손은 자신은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 보았다.
“이정도 수준이라면…….”
키르손은 겨울 추수꾼의 낫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3일 정도면 되겠군. 키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