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11)
제111화
그녀가 힐데스하임에서 겪었던 아픔이 어느 정도이든 사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 내 아버지인 성황이라는 것과 그녀가 고통을 겪었던 땅이 신성 제국이라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그녀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일은 나와는 완전히 무관했다.
“그냥 1황자를 엿먹이는 데 필요한 환자를 찾은 것뿐이니까.”
그래.
그녀는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의사 정하늘이었다면 오로지 환자에 대한 동정심을 위해 움직였을 테지만, 황자 데미안에게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나 자신의 이득이었다. 결국에는 성황이 되어야만 내가 이루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미친놈.”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하는 것이 정하늘인지, 데미안인지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친놈은 너야, 세상 사는 법 모르는 놈아.”
나는 애써 과거의 나에게 조언을 한답시고 중얼거려 보았다. 이러고 있자니 정말로 혼잣말을 하는 미친놈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 시선을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오래간만에 힐데스하임 땅을 밟게 된 노인을 찾아갔다.
“심경이 좀 어떤가.”
그녀는 내게 자신의 고국인 힐데스하임을 다시금 찾아와 보고 싶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고, 그런 그녀를 베이언으로 데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한층 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쿨럭, 쿨럭. 솔직히…….”
그녀가 가볍게 미소를 짓자 안 그래도 많던 주름이 더욱 많이 생겨났다.
“제가 보았던 가장 찬란했던 힐데스하임은 아닙니다만.”
애써 몸을 일으킨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타락해 버린 힐데스하임도 아니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이름이 베이언이라 하셨지요.”
“그래.”
“황자 전하께서 직접 변화시킨 곳이라 들었습니다. 영지민들은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알며,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대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영특한 이들이었습니다. 매일 좌절감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쿨럭. 과거 신성 제국민들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그것이 황자 전하께서 그들의 삶에 가져다주신 변화라고…… 그들에게 직접 들었고요.”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정말 별거 없는데 말이다.
“힐데스하임에 작은 빛을 되돌려 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전에…… 제가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쿨럭, 쿨럭.”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전하께 몹쓸 언행을 보였던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게 목소리를 조금 높인 것이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아무리 내가 다른 것들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이것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문화였다.
“용서라. 뭘 잘못한 건지는 알아?”
하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감히 힐데스하임에서 보였던 짧은 순간의 일탈을 보고 신성 제국을 멋대로 평가했던 것이…….”
“아니지.”
내가 바랐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대가 보았던 힐데스하임은 분명히 잘못되었었고 그대는 옳은 말을 했지. 하지만 그로 인해 품게 된 악감정을 신성 제국 전체에 돌리는 것은 과했고.”
노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무언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있는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전하를 오해했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일로 인해 전하를 의심하였으며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면책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과를 받고자 함은 아니었고, 단지 그녀에게 주입된 이 세계의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게 해 주고자 함이었으나 그녀는 과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왔다.
“구태여 미련도 없는 목숨, 전하께서 거두어 가신다면 제게는 더욱 영광이 될 것이니 그것으로 전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신다면…….”
“쓸데없는 말을.”
그리고 이런 개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 것처럼 그대를 치료하고자 데려온 것이지 벌을 주기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니다.”
“쿨럭, 쿨럭. 과연 신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십니다.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부정하기도 피곤했다. 게다가 신이 나를 간택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혹시…… 자비를 더욱 베풀어 주실 수 있다면, 과거 제가 느꼈던 따스한 빛을 조금이나마 선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말하는 따스한 빛은 신성력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니 힐데스하임의 제국민들에게 신성력은 단순히 치료나 신성 마법을 위해 사용되는 힘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누구에게는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누구에게는…… 누구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신성력이었고,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지.”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은 후 가슴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 * *
노인에게 신성력은 결코 특별한 힘이 아니었다.
매일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녀에게 건네는 따스한 인사였으며,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후 울고 있던 그녀에게 건네는 심심한 위로였다. 그녀의 일상에서 신성력은 빠질 수 없었으며,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되는 비범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힘이었다.
“아아…… 아…….”
그런 그녀에게 평범한 일상이 사라졌고, 매일같이 보던 그 따스한 빛은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그녀가 신성력을 마주하는 것은 무려 이십여 년 만의 일이었다.
순간 그 황홀함에 그녀는 온몸에 힘을 잃었다. 비록 마인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오면서 그녀의 몸에 신성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신성력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었다.
“아아아…….”
말을 할 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을 내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애써 잊어버려야만 했던 과거가 다시금 선명해지며, 자신의 남편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카인!”
남편을 재회할 수 있는 매개체. 그것이 그녀에게 신성력이었다.
3황자가 서 있던 자리에 이미 죽어 버린 그녀의 남편이 살아 서 있었다.
그녀는 초췌해져 버린 자신의 꼴을 생각하며 남편을 마주하는 것이 순간 부끄러워졌으나,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와락.
몸을 일으켜 남편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요?”
한참이나 남편은 말이 없었다.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당연했던 일상이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가 된 순간부터, 더 이상은 세상을 살고 싶지가 않았어요.”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는 기침을 애써 감추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남편에게 보이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일일 터였기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것이 없네. 가족들을 더 챙기지 못해서. 정말 후회 많이 하고 있어.”
“당신이 뭐가 미안하단 말이에요!? 미안한 건 나지. 당신을 끝내 말리지 못해서. 당신이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켜봐야만 해서.”
이미 죽어버린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그녀의 솔직한 심경을 모두 털어놓았다.
“솔직히 원망 많이 했어요. 당신을 이렇게 만든 성황 폐하뿐만 아니라, 힐데스하임 전체를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충분히 이해해. 그럴 수 있어.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면 되는 거야.”
그녀를 품에 안은 남편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정말로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한참이나 품에 안겨서 눈물을 쏟아내었고.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신성력이라고 한들 죽은 남편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설령 그녀를 위해 3황자가 남편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신성력이 작용하지 않았으니 그 환상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 다시 실례를 범했습니다.”
3황자의 품에서 빠져나온 노인은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실례는 무슨. 덕분에 나도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조금은 용서받은 것 같아서 후련하군.”
노인은, 3황자가 한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받은 위로는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다.
* * *
“하아.”
노인을 위로하는 동안,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겪게 되었다. 나 역시 그녀를 통해 어느 정도 위로와 용서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하늘로서 살아왔던 과거.
가족들은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나는 가족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변명을 해 보자면, 의사로서의 일상은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에게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갈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가정을 위해 시간을 들일 때면, 그 시간 동안 살릴 수 있었던 환자의 수를 머릿속으로 어림짐작하며 스스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나.”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하늘이 데미안에게 하는 말이 아닌, 데미안이 정하늘에게 하는 말이었다.
‘의사가 원래 그런 거야.’
“의사가 원래 그런 거라고?”
회의감에 빠져 있던 나를 위로한답시고 건넸던 동료 의사의 말로, 정하늘이 반박하는 것만 같았고.
“정신 차려. 이 썩을 놈아.”
정답이 무엇인진 모르겠다.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아예 가족을 만들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족을 위해 조금은 내가 짊어졌던 의무를 내려놓았을까.
무엇이 정답인진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고민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문제였다.
다만 내가 거울을 보며 과거의 정하늘을 나무라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나마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정말 지독하리만치 이기적인 놈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