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트루드.”
방금까지 자책하던 그녀의 얼굴이, 내 앞에 서 있는 트루드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다급한 소리가 들려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하고.”
그리고 나는 고개를 털어 그 얼굴을 지워버렸다. 비록 불길한 미래였지만,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미래일 것이다.
애초에 내가 바꿀 수 없는 확정된 일이라면 운명의 권능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겠지. 신이 생각이 없는 작자가 아니라면.
트루드는 내 앞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요새 워낙에 악몽을 자주 꾸는 탓에 전하께 변고가 생겼나 하여…… 별일 없으셔 다행입니다. 그럼 돌아가 보겠…….”
“잠깐만.”
나는 그런 트루드를 붙잡았다.
내가 미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대악마의 부활을 대비해 모든 인간의 힘을 한데 모아둬야 할까?
과연 1황자와 2황자를 비롯한 내 적대 세력이 잔뜩 있는 힐데스하임에서 그 말을 믿어주기나 할까?
발칸 제국의 황제와 관계가 좋다고는 하나, 그의 병력들을 힐데스하임 국경 내로 주둔시키는 것을 성국 차원에서 용인해 줄 수나 있을까?
미래의 내가 오로지 내 세력들로만 대악마와 맞서 싸운 것은 단순히 내 고집 때문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악몽을 자주 꾼다고?”
남아 있는 가능성이 한 가지 있었다.
‘이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미래의 트루드가 남긴 마지막 마디. 지금의 그녀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 크게 신경 쓰실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다른 증상은 뭐가 있지?”
“예?”
“대악마의 부활.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에겐 이미 예고되었고, 언제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루시퍼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트루드였다. 그녀의 작은 증상 하나라도 놓칠 수는 없었다.
트루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악몽을 꾸는 것 외에도 심장이 과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습니다. 종종 환각을 볼 때도 있고, 갑작스레 몸에 힘이 빠질 때도……”
“그걸 왜 말을 안 했지?”
그게 설령 대악마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잊었나 본데, 너는 나와 서약을 한 기사야.”
그녀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설령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내게도 큰 손해이니까.
“여기 누워봐.”
“예, 예?”
“얼른.”
트루드가 잠시 당황하다 내 지시에 따라 한쪽에 있는 침상에 누웠다. 나는 간단히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으나 겉으로는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네가 보기엔 얼마나 남은 것 같아?”
만약 그걸 알고 있었다면 트루드가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대악마의 부활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시간이 많지 않다, 그것은 확실했고 이대로 갔다가는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전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혹여나 마땅한 방도가 없으신 거라면…….”
“없는 거라면?”
“확실한 방법일지는 모르겠으나, 제 심장을 파괴해서 대악마의 기운도 함께 소멸시킬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진심이야?”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트루드는 내 심정을 알아챈 것인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군주의 자리에 오르시는 것을 도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제 죽음이라도 전하께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마.”
나는 그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 * *
가장 최선의 선택은 대악마의 부활 자체를 늦추는 것이겠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 차선책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성력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4성. 고리가 네 개이지만, 아직 네 번째 고리는 제대로 성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성력의 성장 자체도 처음에 비해 많이 더뎌지고 있었다.
성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4성, 혹은 5성의 권능. 그것이라면 대악마에게 대항할 힘 정도는 생길 수 있었다. 인명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면 성력의 수준을 단기간에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은 처음부터 내게 주어져 있었다.
현자가 내게 말했듯 성력은 많은 이들의 경의를 통해 그 수준이 강해질 수 있으며, 진정한 존경을 받는 성국의 모습일 때 힐데스하임이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이유이기도 했다.
베이언 영지민들의 민심을 사로잡는 것만으로도 성력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으나, 베이언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받는 경의로는 부족했다.
“무슨 일이냐. 네가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그것이 내가 성황을 만나러 온 이유였다. 그의 허락과 지원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흑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나는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다. 아무리 성국이 부패했다고 한들, 흑마법의 사용에 대해서는 엄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성황이라면 암암리에 흑마법을 허락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의술인지 뭔지 하는 것, 꽤 좋은 평을 받고 있더군. 겉보기에 한없이 위험해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야. 헌데 지금 그리 묻는 것은…….”
성황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의술의 배후에 흑마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이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이니, 용서받을 생각일랑 하지도 말거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바보같은 질문이기는 했다. 다행히도 성황은 흑마법에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고, 어쨌든 이것만으로도 첫 단추는 성공한 꼴이었다.
“흑마법의 뿌리를 뽑을 생각은 혹시 없으십니까?”
“……뿌리를 뽑는다고?”
“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흑마법에 대해 인정하기는 싫으나 그들의 힘은 때때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지. 완전히 잘라낸 줄로만 알았던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살아서 다시금 나타나곤 한다. 무려 수 세기 전부터 반복되던 일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흑마법사를 모조리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흑마법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불사의 능력을 얻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한 발칸을 비롯한 기타 국가들에서는 흑마법에 대해 우리만큼 적대적이지 않기도 하지. 그런 곳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우리가 손을 쓸 수 없고. 너는 성족이라는 놈이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느냐.”
하지만 내가 말하는 뿌리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의 근원지가 되는 곳을 습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어라?”
“칠흑 등대 말입니다.”
“……칠흑 등대의 위치가 어딘지나 알고 하는 말이냐?”
그걸 모르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힐데스하임에서 신성력을 갖고 태어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흑마법에 대한 경계이며, 그 흑마법의 근원지가 북쪽 끝 너머에 있는 칠흑 등대라는 섬이라는 것이었다.
친절하게 지도로까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성황이 한심하게 나를 바라보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칠흑 등대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곳이다. 지도로만 보고 북쪽으로 향했다가는, 세계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애초에 그곳에 다다르기도 전에 태풍에 휘말려 죽고 말겠지.”
참 우습게도, 이곳은 지동설이 주류가 아니었다. 지구는 네모나다고 믿고 있었으며, 배를 타고 일정 수준을 벗어나게 되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애초에 그 낭떠러지 근처에는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며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그 근방의 지독한 기후는 신의 배려라는 뜻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신탁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뭐?”
그리고 나는 그런 성황을 설득하기 위해 치트키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반년 전, 작은형님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신탁을 명분으로 삼아 바이에른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 아마 아버지께서 그 일을 모르실 일은 없으실 테고요.”
신탁. 그것은 그들이 내세울 만큼 간단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명분이었다.
“허나 그 신탁이 거짓된 것이라는 것을, 신탁을 통해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몇몇 이들은 부정하고 있으나, 신께서는 저와 바이에른을 위해 목소리를 내셨던 게지요.”
그러니 이번엔 내가 그 명분을 내세울 셈이었다.
“또 다시 그 목소리가 제게 들려왔습니다.”
“뭐라고?!”
“신께서는 칠흑 등대로 가는 길을 열어 주겠다 말씀하셨으며, 그들을 박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면 너는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거짓된 신탁을 내세웠던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반년 전의 일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신께서는 거짓 신탁을 명분으로 세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지만은 않지요.”
제아무리 힐데스하임의 성황이라고 하더라도, 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흘려들을 수가 없을 터였다.
“허나 제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흑마법사들은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이 가장 무서운 점은 어떠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는 탓이지요.”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병력의 지원입니다. 칠흑 등대의 흑마법사들을 섬멸하고 오겠습니다.”
성황은 한참이나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고민은 단순히 병력을 지원해주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아닐 터. 아마도 내게 또다시 신탁이 내려왔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쩔 텐가.
“알겠다. 잠시 생각을 해 보고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내려 서신을 보낼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탁이니 뭐니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니, 성황이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바뀔 사항은 없었다.
나는 베이언으로 돌아와 곧장 성비사들을 정비시켰다.
칠흑 등대라.
내게도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고, 분명히 위험 부담이 없잖아 있었으나 내게 향할 만한 곳은 그곳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흑마법에 필요한 제물은 인간의 시신이며, 흑마법의 본거지인 칠흑 등대에 억울하게 쌓여 있는 영혼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이 많겠지.
그 영혼들이 내게 큰 힘을 보태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일전에 겪어 봐 알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