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29)
제129화
“성황께선 정말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
“3황자 전하께서 우릴 구원하셨으니, 목숨을 걸고 전하를 지켜라.”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패닉에 빠져 있던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금세 태연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섬, 칠흑 등대가 가까워질수록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지고 있었다.
그건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을 상대해 본 적이 몇 차례 있었고, 성력이 흑마법의 상극이라고 한들 인간으로서 쉽게 상대할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특히나 흑마법의 정확한 능력에 대한 파악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힐지 몰랐다. 심지어 저들은 이제껏 만나 보았던 흑마법사들보다도 훨씬 더 고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이번 일을 통해 항상 부족한 성력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이요, 황궁의 성기사와 사제들의 마음까지도 어느 정도 사로잡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배는 칠흑 등대와 완전히 맞닿게 되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모두가 하선할 준비를 하며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마법에 대해 이야기만 들은 이들도, 직접 상대해 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확실하게 놈들의 목숨부터 끊어놓는 것이 희생을 줄이는 방법일 테지만.”
그렇게 쉽게만 풀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흑마법에 감염된 이들의 수가 급증하는 거겠지.
“혹여나 옆에 있는 동료가 흑마법에 동요되어 배신을 할 경우. 성력으로 어느 정도 중화를 시킬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더없는 혼란에 빠진 이들의 경우에는 가만히 두었다간 아군을 공격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모두에게 두려운 일일 터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을 범하는 것 두려운 것은, 비단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모든의 기사들에게 해당하는 일이겠지.
“성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면. 빠르고 확실한 결단만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모두가 내 뜻을 알아들은 듯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에 감염된 이들을 당장에 치료할 수 없다면 빠르게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칠흑 등대의 흑마법사들을 섬멸하라. 힐데스하임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신다.”
가장 먼저 나와 트루드, 그리고 챈슬러가 발을 내디뎠다. 새까만 토지는 발을 대는 순간 푹 파여 제대로 뛰어다니기도 힘든 환경이었다.
“으윽.”
“이게 무슨 냄새야.”
그리고 뒤이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심각한 악취였다. 모두가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트루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참을 정도도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냄새를 맡는 것은 전생에서 의사 생활을 하며 이미 적응된 바 있었다. 부검에 참여했을 때를 비롯해 종종 시체 썩어가는 냄새를 맡은 덕에, 지금 나는 냄새가 그와 비슷하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아.”
한 걸음, 한 걸음.
모두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바닥에 움푹 들어갔다. 중무장을 한 성기사들의 경우에는 더욱 깊게 빠져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버거운 일인 듯 보였다.
「으히히히히히.」
걸음을 옮기던 도중, 갑작스레 들려온 소름 돋는 소리에 모두가 발을 멈추고 사방을 경계했다. 하지만 개미 한 마리 보이기는커녕, 그 어떤 기운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단지 그 이상한 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를 울려대고 있었다.
「죽으러 왔구나. 그래, 죽으면 편해.」
「멍청한 인간들. 아니지. 똑똑한 인간들이구나.」
「으히히히히. 한 번뿐인 죽음인데, 조금 더 인상 깊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그 목소리에는 기묘한 힘이 담겨 있었고, 정신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나조차도 무언가에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흑마법사들이나 사제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욱 강했다.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열심히 흔들며 유혹을 떨쳐내려는 이들도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등대에 들고 있던 약간의 불빛마저 휙 꺼져 버리고, 진정한 칠흑이 찾아왔다. 바로 옆에 있는 이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깜깜한 상황.
화악.
그리고 온 몸이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각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고약한 악취도, 흐릿한 시야도, 모두 제거된 채로 칠흑 등대 위에 서 있었으나 주위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수십 명의 병력들이 일순간 사라졌으니 그들이 잘못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정신계 마법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직 나 하나 뿐이란 말인가.
“……전하.”
걱정에 잠겨 있을 때,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반가운 목소리, 트루드였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전하. 어째서 저는 전하를 따라야만 합니까?”
일전에 악마의 힘에 잠식되었을 때처럼, 트루드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특유의 살기가 온 몸에서 뻗어나오고 있었다.
“제 아버지는 성황을 그 자리까지 올린 주역이신데, 어째서 저와 아버지는 성황 폐하에게 버림을 받은 겁니까?”
“트루드.”
“어째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저 역시도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가웠다. 내가 그녀를 부르든 말든, 그녀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린 채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신 차려, 트루드. 이미 그 힘을 극복한 적이 있잖아.”
“극복이라니요. 저는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솔직해 진 것 뿐입니다. 속으로는 늘 원망해 왔습니다. 전하에 대한 복종 역시도, 제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요.”
그녀에게는 말이 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에휴.”
결국 하는 수 없이 네 개의 고리를 모두 회전시켜 그녀의 혼을 빼놓은 악마의 기운을 중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리에 있는 성력이 그녀에게 가해졌음에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계속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트, 트루드?”
나도 모르게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서인가. 그래도 지금까지 성력으로는 그녀의 정신이 잠식당하는 걸 억제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흑마법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일까?
휘익.
트루드가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빠르게 보호막을 만들어 내려고 했으나, 트루드의 검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빨랐고, 채 보호막이 만들어 지기도 전에 이미 나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젠장.”
그렇게 욕설을 내뱉고 있을 때.
콰장창.
앞에 있던 트루드의 형상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나며,
‘전하!’
트루드의 온기 가득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내 나를 감싸고 있던 공간 자체가 완전히 부서졌다. 나는 다시 어두컴컴한 칠흑 등대 위에 서 있었으며, 그 앞에는 멀쩡한 모습의 트루드가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번에는 트루드가 나를 구하고 있었다.
* * *
트루드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갇혔었다.
흑마법이라는 것은, 자신의 심장에 있는 악마의 기운과 어느 정도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탓에 그 힘을 자꾸만 자극해 대고 있었다.
하지만 트루드는 많이 성숙해졌고 악마의 힘에 대해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생겼다. 평소에 그 힘을 억누르고 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전하?”
어찌 되었든 트루드도 처음엔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새로운 공간에 자신과 3황자가 갖혀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헌데 3황자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트루드. 내가 모든 진실을 알려주지. 궁금하지 않나?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말이야.”
트루드에게도 분명 흥미가 동하는 말이었다. 트루드는 3황자와 서약까지 한 사이였음에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3황자는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별로 없었으며, 그것이 3황자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곤 했다.
“나는 힐데스하임 주신의 선택을 받은 성자가 아니라.”
3황자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기괴해 지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선 채로 무언가에 들린 사람처럼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내 그의 어깨에선 날개가 솟아났고, 피부에선 비늘이 뻗어나왔다.
악마. 그건 악마라고밖에 칭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악마는 트루드에게 거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그 검을 손에 쥐었고, 그 힘을 사용하게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너는 나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이야. 힐데스하임이 아닌, 나 루시퍼에게 말이지! 크하하하.”
분명히 그 말을 듣고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허면 3황자 전하는…….”
“화려하게 모두의 뒤통수를 칠 수 있도록 연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이지. 크하하. 신을 모시는 작자들이 악마를 보고 성자라 칭하다니. 이처럼 우스운 일이 없군.”
루시퍼는 날개를 쭈욱 편 채로 날아올라 트루드를 내려다 보았다.
“어떠한가. 나의 신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대의 용맹함을 곁에서 늘 검증하였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네게 부당함을 안겨 준 이 세상에 복수를 할 기회를 주…… 크헉.”
루시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루드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빠르게 루시퍼의 배를 찔렀다. 손 끝에서 느껴져야만 하는 무언가를 가르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나,
“환상이었군.”
환상이었다.
특별히 흑마법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탓에 이곳이 환상 속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현실과 이질감이 없었으나, 트루드가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하는 그 누구보다도 밝은 빛이시다.”
3황자에게 비밀이 많은 것은 사실이며,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허나 트루드는 3황자를 그 누구보다 따르고 있었다.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는 악마 따위가 아닌, 세상을 구할 성자라는 사실을.
덕분에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트루드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시험이었다.
그리고 환상에서 빠져나온 트루드는 서약의 관계를 통해 3황자가 위치한 곳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환상을 엿볼 수 있었다.
환상 속에서 트루드 자신이 3황자를 베려 하고 있었다. 트루드는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3황자를 불러 환상임을 자각시켰고, 3황자 역시 빠르게 깨어날 수 있었다.
“…….”
트루드와 3황자는 칠흑 등대를 걸어가며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미안.”
한참 뒤에야 입을 연 것은 3황자였다.
“나는 너를 완전히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네.”
트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전하께 온전히 믿음을 드리지 못한 탓이겠지요.”
3황자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나, 트루드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이미 전하께 제가 실수를 한 적이 있었지요. 전하의 믿음을 깬 것은 저였으니, 신뢰를 재건하는 것 역시 제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트루드는 3황자를 위해 더욱 분전해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