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38)
제138화
겔리두스는 이미 의술의 사용을 허락한 바가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을 되돌리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특히나 베이언 영지 내에서 의술의 민심이 좋은 이상 반발은 더욱 클 터.
“……명분이라.”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지만 아주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납득이 갈 만한 명분을 보여주어야만 3황자도 확실하게 깨달을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신성력에 달렸다고.
몸속에 성배를 지니고도 신성력에 매진하지 않는 꼴이라니.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왕국이 힐데스하임에 협력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왕국 중에서도 유독 힘과 자존심이 강한 국가는, 신성 제국의 뜻에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았으나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이제는 보여줄 때가 되었다.
힐데스하임이 어째서 제국인지. 다른 왕국과의 가진 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다.
본보기는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왕국들을 공격했다가는, 그들이 항복한 뒤 얻게 되는 추가적인 병력의 수가 오히려 적어질 것이다. 적당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왕국 한 개 정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그들을 제압한다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왕국들도 금세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었다.
아직 그 대상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출정할 병력은 이미 갈무리를 마친 상황이었다. 명분도 충분했다.
인류의 대의를 위한 병력 지원에 거부했다는, 신성 제국식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볼라벤 국왕.”
성황은 자신의 앞에 찾아와 무릎을 꿇은 국왕을 바라보았다.
신성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몇 개의 왕국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었다.
“30명의 고위 성기사와 20명의 고위 사제들을 지원해 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한가? 부족하면 말하게. 더 보내줄 테니.”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대의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을 기회를 제게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볼라벤 왕국은 신성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웬만한 독립 왕국들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총 50명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가담한다면 승패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을 터였다.
게다가 볼라벤 왕국의 국왕은 3성밖에 되지 않는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전략과 지도력이 출중하여 이런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더없이 훌륭한 인재였다.
다만.
“나와 3황자도 함께 출정하지.”
그 자리에 성황이 직접 나선다면 단순히 무력이 강해지는 것을 넘어, 병사들의 사기가 더없이 드높아질 것이다. 신의 대리인인 성황이 그들의 옆에서 지켜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런데 국왕은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예? 폐하께서 굳이 나설 필요는 없으십니다. 가랑비에도 옷 젖는다고, 혹여나 눈먼 화살이 폐하께 날아들 수 있으니…….”
“눈먼 화살에 맞을 만큼 내가 애송이로 보이는가?”
“그, 그게…… 죄송합니다.”
지금 성황은 대외적으로 큰 활동을 보여주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전쟁이 날 때도 직접 나서는 일이 없었기에, 때때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가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이들이 하는 소리일 뿐.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지 잊었나 보군.”
성황이 되는 과정은 결코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분명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역대급이라고 평가받던 성기사이자 사제였으며, 현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훌륭한 책략가라 불리었다.
“헌데 3황자 전하까지 동행하시는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국왕이 의문을 가질 만했다.
차라리 1황자나 2황자가 가담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일 테니까. 하지만 성황이 황자와 함께 출전하는 것은 단순히 승패에 가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의술이라고 들어 보았는가?”
“……예.”
모를 리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황자가 의술을 익히고 전파하고 있다는 건 꽤나 큰 화젯거리였으니까.
“그 실용성을 확인해 볼 생각일세. 그놈이 육성했다는 의원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봐야겠지.”
“사제들이 있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으십니까?”
“사제가 있으니까. 그들도 자각할 수 있겠지. 전장에서 의술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신성력에 비하면 의술은 쓸모가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면, 3황자도 자신이 걸어야 하는 길을 올바로 볼 수 있을 테야.”
“……아.”
그제야 볼라벤의 국왕도 성황의 뜻을 이해한 듯 보였다.
“폐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볼라벤의 국왕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그 뜻을 받아들였으나,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어째서 3황자가 의술이라는 것에 그렇게 매진하고 있는지.
그리고 다른 곳에서의 소문과는 달리, 정작 베이언 영지에서만큼은 의술의 평판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 * *
1황자와 2황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심중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진중한 눈빛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가 가진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둘이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간섭을 한 적도 없었지만, 의논을 한 적도 없었다. 경쟁자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데미안 그 자식을 왕국 토벌에 데려간다고 하시더군.”
1황자의 말에 2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들었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1황자와 2황자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3황자는 예외였다. 놈은 어려서부터 쓸모가 없는 벌레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놈이 가진 성력의 양이 막대하게 늘었으며, 그 배후에는 성물인 조화의 성배가 있었고, 신탁이 그놈에게 내려지기까지 했단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죽 쒀서 개 줄 수야 있겠소?”
뜻은 같았다. 3황자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의 일에서 3황자가 활약을 펼치는 걸 막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근시일 내로 그 놈이 활약을 보일 만한 거사는 왕국 토벌이었다.
“아버지께서 데미안만 콕 집어서 데려가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개입할 수 있겠느냐?”
1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2황자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잠시나마 한 배를 타기로 했으니 내가 가진 생각을 말해 보겠소.”
2황자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볼라벤의 국왕이 주축이 되어 병력을 이끈다고 하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버지와 3황자가 함께 동행하는데.”
“그 국왕을 꼬셔 보는 것이지.”
듣다 보니 2황자의 말은 퍽 그럴싸해 보였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별다른 수가 없기도 했고,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하지 않을 필요도 없었다.
둘은 곧장 볼라벤 국왕을 찾아갔다.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국왕은 두 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볼라벤 왕국은 세 명의 황자 중 어떤 이에게도 지지의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1황자와 2황자는 그간 볼라벤 왕국과의 접점을 구태여 만들지도 않았고.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예정이었다.
“질질 끌지 않고 본론부터 말해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황자들께서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안부나 물으려는 것은 아니실 테니.”
“볼라벤에서 독립 왕국 토벌에서 선봉에 서신다 들었소.”
“선봉에 서는 것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병력이 저희 쪽 인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지요. 신성 제국을 위해 빛을 낼 기회를 받았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황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섣불리 꺼내기에는 왠지 조심스러워지는 이야기. 하지만 어차피 두 황자에 대해 볼라벤 국왕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에,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3황자가 그곳에서 활약을 펼치지 못하도록 힘을 써 주셨으면 하오.”
“……예?”
국왕은 마치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들은 그대로요. 국왕께서도 알고 계실 테지만 아버지께서는 3황자에게 과도한 기회를 주려고 하시지.”
“그것이 꼭 기회라고 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국왕의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3황자는 활약을 펼칠 만한 구석이 없었다. 수십 명의 사제들과 성기사, 그리고 성황까지 있는데 어찌 3황자가 활약을 펼친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성황의 뜻을 들은 바. 성황이 3황자를 데려가는 이유 역시 기회를 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3황자가 가진 기회를 박탈시키고자 함이었지.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오. 아무래도 우리는 3황자를 견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3황자에게 일말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자 함이지.”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닌 듯합니다.”
국왕이 황자들의 말을 따를 이유도 없었다. 국왕이 신성 제국 내에서 절대적으로 말을 따라야 하는 자는 성황뿐이었다.
“이전부터 보건대, 볼라벤 국왕께서는 욕심이 참 없으신 것 같소.”
그렇게 말한 것은 1황자였고, 뒤이어 2황자가 받아쳤다.
“우리 둘 중 하나만 확실하게 지지해도 훗날 훨씬 더 밝은 미래가 그대를 찾아갈 것인데. 볼라벤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뜻을 보여주질 않았지.”
마치 짜고 온 것만 같은 물 흐르는 듯한 대사들이었다.
“볼라벤은 불가피한 미래에 대해서는 순응할 뿐입니다. 어떤 분이 성황이 되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요.”
“권력을 원하지는 않으시오? 이미 성황이 되고 난 후라면 그대에게 떨어질 권력은 없을 터인데.”
황자의 말에 국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분명히 탐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두 황자 중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혹여나 1황자를 지지했다가 2황자가 국왕이 된다면. 분명 상황이 좋지 않게 굴러갈 테니까.
말하자면 볼라벤 국왕은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을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한 대로 도와준다면, 훗날 우리 둘 중 누가 성황이 되더라도 볼라벤만큼은 확실히 공로를 인정해주겠소.”
두 황자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을 제시했다.
어차피 3황자가 성황이 될 리는 없을 터. 이만큼 좋은 조건은 없을 터였고.
“사실 볼라벤이 어째서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추측하고 있는 바가 있소. 가문의 과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겠지.”
1황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 과거까지 모두 지워준다면. 어떻소. 볼라벤 입장에서는 달콤한 제안 아니오?”
국왕의 표정을 보건대 이미 결정이 난 듯 보였다.
“죄송하지만 요새 이가 아파서 달콤한 것을 먹지 못합니다.”
그 말을 들은 두 황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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