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54)
제154화
일제히 평야를 달리던 도중 이상함을 느낀 건 일반적인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결코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고삐를 잡은 손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의욕이 저하되고 있었다. 꼭 무언가가 귓가에 대고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그건 위험한 존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그 존재가 발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 싸늘한 기운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성기사들의 표정 역시 한없이 무거워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나와 성황 사이를 오가는 것은, 단순히 발록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리라.
그들에게는 막중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성황의 명을 따를 것인가. 과연 그것이 결코 옳지 못한 길이라고 할지라도 따라야만 하는가.
황족의 명을 따라야만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죄책감을 덜어내고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면 성황과는 다른 명을 내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명을 내려주길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겠지.
내게도 점점 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뒤에 숨어서, 성황의 되도 않는 짓거리를 순순히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여전히 두려웠다.
혹여나 잘못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챈슬러와 트루드, 그리고 칼로스를 비롯하여 베이언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나의 선택으로 인하여 잘못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전하. 무엇이 걱정되십니까?”
상념에 빠진 채로 계속해서 달리던 도중, 옆으로 따라붙은 트루드가 염려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발록이 걱정되는 건 아니실 테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걱정한다고, 고민한다고 달라질 문제는 아니니까요. 발록과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니……. 전하께서는 옳은 선택지가 확실하게 주어졌다면 결코 고민하지 않는 현명한 분이시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피해가 커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엔 발록을 제대로 막지 못해 인류가 멸망하게 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적잖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겠지.”
“그들의 희생을 숭고한 것이라 치부하며 합리화할 수는 없으나, 전하께선 누구보다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습니까. 허나 불가피한 선택에 대해 고민을 하는 건 전하답지 않으십니다.”
트루드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애써 감추려 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감출 필요조차 없던 것이다.
“성황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그녀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성황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 신성 제국의 사람이 결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너는 두렵지 않아? 그런 말을 하는 게.”
“두렵습니다.”
트루드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성황 폐하의 말은 힐데스하임의 법 위에 군림하며, 최우선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규율이었습니다. 성기사가 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성기사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골내기 소녀도, 최고의 권력을 지닌 공작도, 모두가 성황의 아래에서는 같은 처지였다.
“그것이 정의에 가까워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결연하게 그 뜻을 따르는 선배 기사님들을 보면서, 그렇게 되어야겠다 다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쩐지 트루드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 것만 같아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힐데스하임에서 산다는 건 그렇지.”
“그러다 기사단에서 우연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버지께서 성황 폐하께 큰 죄를 저질러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허나 저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 제가 보았던 이들 중 가장 현명한 분이었으니. 그럴 리가 없다 굳게 믿었습니다.”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이라도 될 것처럼, 트루드는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힘들었겠어.”
성기사로서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오히려 성기사로서 느껴야 하는 회의감을 알아챘을 때는 분명히 힘들었겠지.
부푼 꿈과 희망을 안고 의대에 입학했던 시절과, 병원에서 첫 인턴 생활을 시작했던 시절, 느꼈던 괴리감은 분명 견디기 힘들었었다. 트루드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겠지.
아버지의 원수나 다름없는 성황의 밑에서 검을 들어야 하는가.
“……힘들다, 그때는 그런 감정인 줄도 몰랐습니다. 다만 제가 성기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알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저를 속박하고 있었지요.”
그녀를 속박했다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알 법했다.
“성황 폐하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마음속에 굳게 박힌 신념은 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비겁하게 살아가게 했습니다.”
트루드는 조용히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하를 만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허나 전하께서는 저를 포함한 여럿을 일깨워 주셨지요.”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트루드는 주위를 바라보았고, 주위의 몇몇 성기사들은 비장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꽤 많은 거리를 주파해 있었다. 이제 주위에 점점 시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기와 피가 섞여 검붉은 혈흔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준비하라!”
저 앞에서 달려 나가는 성황은 주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성황이 말한 준비라는 것이 발록의 소멸에 대한 것인지, 발칸 병력을 향한 습격에 대한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목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트루드 역시 그것을 알고는 빠르게 본론을 꺼내놓았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일부 선배님들과 뜻을 맞추었습니다. 전하께서 명을 하신다면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시는 것은…… 혹여나 전하의 선택으로 인해 저희가 피해를 입는 것이겠지요.”
트루드는 비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런 점이 제가 전하께 충성하는 이유입니다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전하께서는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전하를 따르기로 결정한 이들은 모두가 그런 것들을 이미 감안하고 있습니다.”
트루드는 한 손을 검집 위에 올렸다.
“성황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폐하께서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겠지요. 저와 일부 선배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폐하를…… 맡겠습니다.”
어쩐지 과도하게 비장하다 싶었더니, 트루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폐하를 시해한 일이 전하로부터 비롯되었다 알려진다면 좋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의 영향력이 사라질지언정, 정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전하께서 그 자리를 대체하도록 두고 보지 않을 테니.”
트루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이제는 못 볼 사람인 것처럼.
“그러니 전하께서는 모른 척 지켜보기만 해 주십시오.”
트루드가 그 말을 끝으로 고삐를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벙쪄 있던 나는 빠르게 속도를 높여 트루드의 옆으로 붙었다.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네 생각만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트루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어느샌가 촉촉해져 있었다.
* * *
황제의 지휘 아래에서, 발칸군은 발록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폐하를 확실히 호위하라! 폐하의 신변 보호가 최우선이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황제를 보호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발록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일부 최정예 병력들이 발록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주변에 맴도는 마물들을 차츰 정리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병력들의 불가피한 손실도 발생하고 있었다.
정예병들이 목숨을 바쳐 가며 마물을 소멸시켰고, 발록의 한쪽 날개를 찢는 데까지 성공했다.
“크아아아아!”
발록이 포효할 때마다, 겁에 질린 채 도망가거나 혼란에 빠져 발작을 일으키는 이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끝까지 싸워라! 놈은 많이 지쳤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엔 휘황찬란하던 발록의 모습도 어느샌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살점이 뜯겨 나갔고 검은색의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발산하는 마기의 양도 초라하게 줄어 있었다.
“저, 전하!”
그렇게 발록과의 싸움이 차츰 승리로 기울어 갈 때쯤, 저만치서 달려온 전령이 황제에게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힐데스하임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달려온 쪽을 보니, 저 멀리서 새하얀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백색 갑주를 입은 채로 달려오는 성기사의 무리는 발칸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성스럽게만 보였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성국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황제는 지척까지 다가온 신성 제국의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3황자는 물론이고, 성황이 직접 자신들을 도우러 왔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성황까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정도로 기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저들 중 일부라도 나서서 발록의 제거를 돕는다면 발칸의 피해가 훨씬 줄어들 터였다.
“성황께서 먼 걸음을 달려와 주시니 이토록 든든할 데가 없습니다. 성황의 노력 덕에 발칸과 힐데스하임의 관계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발칸의 황제가 성국에 병력을 요청한 것은 단순히 싸움의 승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어쩌면 더욱 컸다.
그리고 신성 제국의 성황이 몸소 나서 발칸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성국과 발칸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훨씬 더 수월해질 터였다.
“인류의 안위가 달린 일인데,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성황이 방긋 웃은 채로 황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제는 그 손을 맞잡으며 성황에게 답했다.
“성국에서 도와주신다면 발록을 제거하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피해가 큽니다. 이미 목숨을 잃은 이들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대부분이 지쳐 있고 부상을 입은 이들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
“생각보다는 그리 강하지 않은 놈인 모양이군요.”
“그렇다기에는 피해가 적지 않고, 앞으로 또 어떤 마물이 발생할지 모르니 안심하긴 이릅니다. 속히 발록을 제거하고 발칸의 부상자들을 사제들이 치료해 주신다면…….”
말을 이어나가던 황제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맞잡은 성황의 손에 힘이 굳게 들어간 탓이었다.
그제야 황제는 성황의 미소가 가진 의미에 대해 재고해 보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성황이 입을 열었다.
“그건 힐데스하임이 알아서 하겠소.”
성황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성기사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제거하라.”
누구를 제거하라는 것인지, 목적어가 빠져 있었다.
허나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발록 쪽이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한 황제는 3황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그래.
제대로 속은 것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