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55)
제155화
찰나의 순간, 많은 생각들이 황제의 머릿속을 오갔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은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 데서 비롯되었다.
발칸과 힐데스하임의 협력 작전으로 원수처럼 물고 뜯던 서로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그려두었던 그림이 모두 와장창 깨어져 버렸다.
살기.
앞에 서 있는 성황에게서 분명 살기가 내뿜어지고 있었다. 그의 비릿한 미소를 보며 성황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제거하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황제는 자신의 불안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바랐으나 그렇지 않았다.
“눈치는 빠르시군. 그러니 악마들이 모여 사는 발칸에서 황제가 되셨겠지.”
악마와도 같은 인간들. 성국에서 발칸민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보기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성황만큼 악마 같은 인간은 없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힐데스하임이라고 발칸민을 모두 죽일 생각은 없소. 우리에게도 좋은 인력들인데 어찌 그러겠소만, 불복하고 반항하는 이들은 그대의 곁으로 보내주겠소. 신성 제국에는 이런 말이 있지. 성황에 의해 안식에 빠지는 일만큼 거룩한 일이 없도다.”
“성황!”
황제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그럴 수가 있소?! 발칸이 힐데스하임에 저지른 죄가 없지 않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건 성국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오. 다만 우리는 성국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었소. 헌데 어찌……!”
“어리석기 그지없군.”
성황은 그런 황제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대 황제와는 참 많이 다르군.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조차 의문이야. 이대로 발칸이 어떻게 멸망해 갈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군.”
자신의 아버지인 전대 황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에 대해선 논할 가치조차 없었다. 아버지이지만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군주로서 최악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에 조금의 후회나 죄책감도 없었다.
성황 역시도 그와 다를 바가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었다. 비로소 황제는 자신이 실수한 것을,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헌데 빠르게 생각을 하다 보니, 황제는 지금의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게 되었다.
애초에 성황을 부른 적이 없었다. 황제는 성황이 아닌 3황자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만큼 3황자를 믿어왔던 것이고.
황제의 시선이 성황에게서 떨어져 저만치서 무심하게 서 있는 3황자에게로 향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성황에게 향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격앙된 목소리였다.
“나는…… 나는 그대가 진정으로 정의로운 자인 줄 알았소!”
황제도 바보가 아니었다. 자애로운 군주일지언정,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발칸에서 황족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3황자에게 온전한 믿음을 가진 것은 그만큼 3황자가 보기 드물게 선한 인물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힐데스하임에도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고, 인류에게도 평화가 찾아올 거라 믿었소만……!”
그를 보며 마음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부푼 꿈들. 아주 어렸을 적에나 했던 망상들이 실현 가능할 거라 믿었다.
“헌데…… 헌데……!”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단 말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황제를, 성황은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검을 들어라.”
성황의 명에 따라 곧장 검을 들어 올리는 성기사들도, 머뭇거리는 이들도 보였다.
채앵!
“폐하! 몸을 피하십시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황제를 호위하는 소수의 근위 기사들이 빠르게 검을 뽑아 들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들로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병력들은 저 멀리서 발록을 상대하고 있는 데다, 이들 역시도 마물과 싸우느라 부상을 입거나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황제는 머뭇거렸다.
정말로 도망을 쳐야 하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가망 없는 싸움을 피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는 있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다.
동생이라는 놈들이 암살자를 보냈을 때도, 함정이 잔뜩 설치된 전장에 나갔을 때도.
훗날 황제가 되어 만인을 이롭게 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죄책감을 애써 숨겨야만 했다.
챙.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미룰 수만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황제가 되었고,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 나라에게 망신이 되는 판단을 할 수는 없었다.
“……폐하!”
“성황과 황자의 목은 내가 가져가야겠다.”
황제의 검이 마력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황을 향해 막 발돋움을 하려 할 때.
“검을 내려라.”
지켜보고만 있던 3황자가 성기사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여전히 머뭇거리던 이들도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 검을 집어넣는 이들도 있었다.
그제야 황제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3황자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3황자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 황제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실은 없었다.
* * *
저 멀리서 느껴지는 발록의 기운만으로도, 이미 놈의 생명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도 알아챘는데 성황이라고 모를까.
그래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발록보다 발칸의 병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그리고 명령이 내려진 직후, 미리 말을 맞춰 두었던 성기사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특별한 것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고개만 까딱거린다면, 성기사들의 검 끝은 황제가 아닌 성황을 향하게 되겠지.
순간 고민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성황을 제거할 것인가. 일부 성기사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책임을 회피하고, 성황의 자리에 내가 오르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검을 내려라.”
나 역시도 성황의 꼴을 보자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결국에 성황이 죽었다면, 그것을 발칸 혹은 성기사들에게 덮어씌워야만 하는데. 두 가지 모두 내가 원하지 않았다.
비열한 짓을 꾸민 건 성황인데, 어찌 그들이 죄를 짓게 된단 말인가.
“뭐 하는 짓이냐?!”
자신과 정확히 반대되는 명령. 그것을 본 성황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명에 착실히 따르는 성기사들까지도 둘러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껏 성황의 명이라면 죽을 듯이 따르던 자들이었으니까. 그 명이 아무리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따라야만 했던 자들이었으니까.
“발칸 황제의 말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분노를 최대한 꾹꾹 눌러 담으며 평온한 어조로 성황에게 말했다.
“……황송하오나, 저희는 마물을 퇴치하러 왔지 부정한 일을 꾸미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성기사가 대표로 나서서 성황에게 고했다. 그로서는 이번 일의 책임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려는 속셈이리라.
“감히……! 역모를 꾸미는 것이냐!?”
“어찌 감히 성황 폐하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만은.”
그 성기사가 무거운 철갑을 벗어던지며 자신의 배 위로 옷을 들어 올렸다. 그의 배에는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목숨을 바쳐 성황 폐하의 명을 따랐다는 증표입니다. 저는 이 흉터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상처를 입은 날 어머니께서는 울면서 저를 내쫓으셨습니다.”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싸늘했다.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처음엔 어머니께서 주신 육체를 가벼이 다루었다고 저를 질책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설명 드렸으나…… 어머니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옷을 내려 흉터를 가렸다.
“그럼에도 어머니께서 저를 나무라셨던 것은, 제가 부정한 일에 가담했다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성황 폐하의 명이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자랑스럽게만 여겨졌던 상처가, 이제는 감추고 싶은 과거의 후회인 듯, 그는 옷을 꽁꽁 싸맸다.
할 말을 모두 마친 성기사는 성황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
“……감히. 일의 옳고그름을 따지는 데 있어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은 지혜의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의 선택이 그릇되었다는 것은 성국으로 복귀한 뒤 깨닫게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니 단단히 각오해 두어야 할 것이야.”
성황은 그렇게 뒤로 돌아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런 성황의 뒤를 따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성황이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당장 명령을 내렸다.
“발록의 제거를 도와라. 마지막 숨통을 끊는 데는 신성력이 용이할 터이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성기사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우렁차게만 들렸다.
그들이 발록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나는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사과를 하려 했다. 어찌 되었든, 그가 성황의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는데 미리 언질도 주지 않은 채로 성황과 동행하였다 일이 틀어질 뻔했으니까.
“……미안하오.”
헌데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것은 황제 쪽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제가 사과를 해야할 것 같은데.”
“황자께서 사과를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이오. 황자께서는 우리를 도울 만한 힘이 부족…… 아, 불편하게 들렸다면 미안하오. 아무튼 황자께서 황실의 도움을 요청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소.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이지.”
“허면 황제께서 사과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를 의심했소.”
들어 보니 사과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황자께서 발칸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주었고, 발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를 쏟았는지 알고 있는데, 그 모든 노력들이 나를 속이기 위함이었다 의심했소. 그대를 진정으로 믿고 있다 여겼는데, 믿고 있지 않던 것이지.”
“당연한 일입니다. 저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정말 고맙소.”
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헌데 뒷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성황의 명을 거역한 것의 주축이 그대라고 몰아도 마땅히 할 말이 없을 터인데.”
“황제께서 저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내가 어찌 그대를 도울 수 있소? 말만 하시오.”
“크게 해 주실 일은 없습니다. 그저 발칸이 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뒤바뀔 터이니.”
“……그것만으로 되겠소?”
“그 외에도 수확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발록을 향해 달려드는 용맹한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본래의 신성 제국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모든 일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