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56)
제156화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가볍게 발록을 소멸시킨 뒤 당당하게 돌아왔다.
비록 발칸 제국의 병력이 거의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꼴로 보일 수 있었지만, 신성력이 없었더라면 마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일반적인 마물도 그러한데, 최상위 마물이라 불리는 발록이라면 더했겠지.
발칸 쪽도 그걸 알고 있는 것인지,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오는 이들의 시선은 성기사들을 향해 있었다.
경외심과 존경심, 혹은 시기와 좌절. 그 많은 감정들을 내가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저런 기분들이겠지.
사제들은 부상 당한 발칸의 병력을 치료했고, 성기사들은 그들을 몸으로 직접 부축했다.
나와 황제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성황으로 옮겨갔다.
성황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늘 무심하게, 냉담한 표정이나 지을 줄 알던 성황의 얼굴이 처음으로 보기 좋게 쩍쩍 갈라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천불을 내고 싶지만, 본인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직감하고 있는 듯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괜찮겠소?”
발칸의 황제는 한결같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데 그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죄책감마저 전해지고 있었다.
“발칸이 제 뒤에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나는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물론 실제로 발칸의 황제는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고, 현재 상황이 발칸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알려진 이상 그 지지가 힐데스하임에 알려지게 된다면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수월하겠지.
하지만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농담처럼 건넨 말이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결연한 얼굴이었다.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소. 혹여나 도움이 필요하거든 결코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시오.”
“황제께도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 제가 최대한 끌어 보겠습니다.”
“무슨 시간 말이오?”
“힐데스하임에 대한 발칸의 인식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힐데스하임에서 발칸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칸 역시도 힐데스하임에 적개심을 품고 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황실에서 일부러 그러한 인식을 퍼뜨리는 것에 일조했을 테고.
그런 인식을 개선해 나가는 건 쉽지 않을뿐더러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발칸의 황제가 내 뒤를 봐주겠다 대대적으로 공표했다가는 반발이 심하겠지.
그런 우려에서 한 말이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황자께서 이미 발칸에 큰 영향력을 퍼뜨려 주었소.”
“……예?”
“그대의 말처럼 그 인식이라는 것을 바꾸는 것은, 자국의 황실이라 하여도 쉽지 않은 일이오. 헌데 타국의 황자가 그걸 해냈단 말이지.”
발칸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전부터 해 왔던 일들이 있었다.
황제의 모친을 살려내었고, 흑마법사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번에는 발록을 소멸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터였다. 곁에서 지켜본 황제야 모든 것을 알고 있겠지만, 그 모든 사실이 발칸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발칸의 높으신 양반들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을 테니 막으려 했을 것이고.
발칸의 황제, 힐데스하임의 성황. 그들의 권력이 막강하다고는 하나 한가락하는 귀족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은 동일했다.
“……내가 황자를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대의 생각대로, 마음 같아서는 모든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 그런데 말이지.”
그의 미소는 점점 더 나를 대견스럽게 여기는…… 그러니까 아버지가 꼭 마음에 드는 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번 생의 아버지가 원체 아버지다웠어야지.
“그대의 의술이 백성들의 피부에 직접 닿으면서, 민심은 차차 변해갔소.”
“……의술 말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대가 발칸의 의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지.”
아.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내가 발칸의 의원들을 힐데스하임으로 불러들였던 것은, 단지 나와 힐데스하임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힐데스하임에 의술을 퍼뜨리고자 해도, 기본적인 의술을 갖춘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의원을 양성하기 전까지 인식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이 필요했는데, 그들이 담론에 참여하여 예비 의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발칸의 의원들 역시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그건 교수 시절 생겼던 직업병의 영향이었다. 내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의원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그들에게 지식과 기술을 나름대로 전달해 주었다.
어쨌거나 상부상조였다. 그들은 그만큼 힐데스하임에 도움을 주었으니까.
헌데 그들은 과할 정도로 감사를 표해 왔다. 가식적인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와 경의였다.
‘전하께 배운 내용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누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성 제국에 빚을 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전하께서 베푸신 은총은 발칸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못내 아쉬운 얼굴로, 발칸 제국의 부름을 받아 돌아갈 때 했던 말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 그들은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변화를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의원들이 힐데스하임을 다녀온 이후로, 발칸의 의술은 말도 안 되게 성장하였소. 그들은 그 모든 게 3황자의 덕이라 말했으며 치료소를 찾는 만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생각보다도 더욱 수월하게 풀려가는 경우.
“그 변화는 근본적으로 3황자가 만들어 낸 것이오.”
하지만 황제의 말대로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 * *
발칸에서의 일을 마치고, 발칸에서 성대한 환영식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힐데스하임 측은 제대로 된 인사도 받지 못한 채 성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이유는 당연히 성황에게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기회를 노리고 황제에게 검을 겨누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다름 아닌 자신의 기사들의 반란에 의해.
그들이 독단적으로 판단한 일은 아닐 터. 그들은 평소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성황의 명을 따랐던 자들이었다.
반면 힐데스하임에 성황의 생각과는 늘 다르게 행동하는 놈이 딱 한 명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막내아들, 3황자였다.
놈은 성황이 어떠한 명을 내리면 다른 대책을 내놓아 그 명령을 보기 좋게 비틀었고, 성황이 계획했던 일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3황자를 질책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늘 눈부시게 좋았던 탓이었다.
아마 성황이 3황자와 황위를 놓고 다투는 입장이었다면 3황자를 가장 견재했겠지만, 멍청하게도 1황자와 2황자는 아직까지도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고 있었다.
어쨌거나 성황의 입장에서는 누가 성황이 되어도 큰 상관이 없기에 방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3황자의 성력이 이전과는 달리 경지가 꽤나 높아졌고, 신탁을 직접 들은 적도 있으니 정당성에 있어서도 큰 문제가 없었고.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3황자는 이빨을 내보이고 성황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황실 소속 성기사와 사제들을 놈이 직접 조종하였으며, 발칸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그러니 발칸의 기사와 마법사들, 황실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즐비해 있는 그곳에 가만히 있는 것은 사실상 적진 한가운데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심 벌벌 떨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체하던 성황은 발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수치심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 지 알고 있는 게냐!?”
성황은 성기사와 사제들을 바라보며 윽박을 질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황의 시선이 향한 곳은 3황자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진 몰라도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물론 성황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성황은 이 사태의 주도자일 3황자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 발칸이 이번 일을 계기로 성국에 전쟁이라도 걸어온다면 어쩔 셈이냐? 성국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유일한 기회였는데 네놈이 모든 것을 망쳤다. 설마 그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정이라도 든 게냐?”
성황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3황자를 보자 더욱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 화를 분출하기 위해 3황자에게 입을 열려던 것을 가로막은 것은 이번 작전에서 지휘를 맡은 고위 성기사였다.
“이번 일에 황자 전하는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뭐?”
“성기사와 사제들이 독단적으로 판단한 일이었고, 저희에게는 명분이 필요했기에. 3황자 전하께 부탁을 드렸을 뿐입니다. 전하는 마지못해 수락하셨지요.”
“이놈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황실 소속의 고위 성기사라는 놈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차마 용납할 수가 없었다. 3황자가 저들에게 무언가 약점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네놈들은 성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처형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문원들 전체에게 참수가 내려질 것이며 너희들의 가문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채앵!
성황은 그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성기사가 검을 빼어 들은 탓이었다.
검 끝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지만, 언제 성황의 목을 꿰뚫어도 이상하지 않을 쾌검을 보유하고 있단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두려워졌다.
“저를 무슨 죄로 엮든, 성황 폐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국에서 폐하의 명을 어겼다는 것은 그만큼 중죄이니. 허나 폐하의 목숨이 누구 덕에 유지되고 있는 지는 아셔야 할 겁니다.”
그가 무심하게 서 있는 3황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땅한 일과 마땅하지 않은 일. 그 사이의 간극을 구분하는 데 있어 그간 많은 고민을 해왔고, 3황자 전하께서 그간 보여 오신 행보 덕에 확신을 얻은 것은 맞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저희의 결정이고, 저희는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성기사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황 폐하라 하여도 저희 모두의 가문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으실 테지요.”
그 말대로 그들은 모두 성국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성황이 겁을 주기 위해 했던 말처럼 그 가문들을 전부 멸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제야 성황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