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57)
제157화
성황은 신성 제국의 수도로 돌아온 뒤,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사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위 성기사 혹은 사제들. 그들은 대부분 내로라하는 공작가 혹은 백작가의 출신들이었고, 그 많은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아무리 성황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마음대로 헤집어 놓을 수는 없었다.
성황이 힐데스하임 전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만큼은 그들의 영향력이 가장 컸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히려 가만히 있는 성황에게 먼저 그들이 찾아왔다.
이번 일에 연루되었던 성기사와 사제들, 그들의 가주가 단체로 성황에게 안부를 묻겠노라 방문한 것이다.
“성황 폐하. 그간 별고는 없으셨는지요.”
“발록을 소멸시킨 데 성국의 영향이 컸다 들었습니다. 분명 성황 폐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성국은 발칸과의 관계를 다잡을 필요가 있지요. 그를 위한 좋은 발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의를 갖춘 말과, 그렇지 못한 행동거지. 저들의 표정을 보건대, 분명 성황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날카롭기만 했다.
“피차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를 농락하려 드는 것인가.”
성황은 그런 그들을 향해 직설적으로 말했다. 구태여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성황의 말을 들은 귀족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제는 성황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 되었다.
“역시 성황 폐하십니다.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폐하. 세상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말은 꼭, 성황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성황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어이가 없고 복장이 터지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저희 윗세대가 이끌던 신성 제국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때의 힐데스하임은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이었지요. 허나 지금의 성국을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성국인지, 아니면 낮은 이들의 눈을 가리고 애써……”
“어찌!”
“……?”
“그것이 어찌 나만의 탓이란 말인가!”
신성 제국은 낮은 이들을 이루 살피는 곳에서, 높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곳이 되었다. 지금 귀족의 말처럼 낮은 이들의 눈을 가리기만 하면 손쉬운 일. 그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성 제국이 그 전까지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올바른 이념과 사상, 그리고 그것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착실한 교육. 상위층은 제대로 된 가치를 교육받으며 그들의 이익보다는 자긍심을 위해 행동해 왔다.
물론 그런 것만으로 국가가 쭉 유지될 수는 없었다.
인간이란 그 어떤 종족보다도 개성이 뚜렷한 종족이었으니. 다양한 인간이 존재했고, 그 성향에 있어서도 범주가 상당히 넓었다.
힐데스하임이라고 선한 이들만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악한 이들은 늘 존재해 왔지만 신성 제국이 ‘신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지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
“내가 모든 것을 떠맡았을 뿐이다!”
사회의 풍조. 즉, 도덕.
힐데스하임에서 악한 마음을 속으로라도 품는 순간, 그자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성국에서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으니 말이다.
감히 누가 신성 제국과 반대되는 뜻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비난과 질타를 넘어서, 실형을 선고받게 될 터인데.
그러니 악한 이들도 그 속내를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대들 역시 그 뜻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이득을 취한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신성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성황. 그는 본인이 악한 행위를 짊어짐으로써 귀족들의 속내를 대변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결과 또한 겔리두스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겔리두스는 영리한 자였다. 현자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일들 역시 늘 최적의 선택이 되었으며, 그것이 그를 성황의 자리에 오르게까지 만든 것이다.
그런 비상한 두뇌를 가진 성황은, 그 자리에 오른 뒤 신성 제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속내를 숨기고 있던 귀족들을 포섭하고, 성황의 뜻과 반대되는 세력들도 타락시켰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눈을 가리고 그저 그 뜻을 받아들이게 하면 그만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마저 받지 못한 이들이었으니, 황가의 뜻이라고만 하면 흔쾌히 수용하는 자들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지니, 이제 와서 나를 던져주고 민심을 잠재울 셈인가? 그리되면 나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성황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가더라도 혼자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대들이 했던 짓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내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다는 이유 만으로는 합리화 될 수 없겠지. 또한 이번 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은 3황자인데, 그대들의 대부분이 3황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나. 3황자가 성황이 된다면 그대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히 보이는군.”
멍청한 놈들. 그런 단순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일을 벌이다니.
성황은 그렇게 생각하며 귀족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놀라기는커녕 지나치게 태연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대비도 되어 있다는 듯.
“성황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뭐?”
“성황 폐하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저희가 몹쓸 짓을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저희는 이 몹쓸 신성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 옳지 못한 교육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걸 알면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한 것이 이 사단을 만들지 않았는가! 성기사라는 놈들이, 사제라는 놈들이! 성황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충분히 나무랐습니다.”
“……그게 나무란다고 해결될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끝내고 고민해서 나온 해결책이 나를 먹잇감으로 던진다는 것인가?”
“헌데 나무라고 나서 뒤를 돌고 나니 자랑스럽더군요.”
“뭣?”
“아닌 척하면서 늘 죄책감을 숨기며 살아왔습니다만.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찬란한 빛이 살아 숨 쉬는 신성 제국. 그것이 진정 이 나라에 어울리는 모습이며, 저희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었지요.”
이건 예상 밖의 전개였다. 저들은 분명 성황과 같은 부류였다. 그래야만 했다. 애초에 그랬기에 지금의 신성 제국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저희는 훌륭하신 분들 아래서, 올바른 교육을 받았음에도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식 놈들은, 이 못난 아비를 두고도 훌륭하게 자랐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가!”
“아마도, 내면은 누구보다 순수한 아이였겠지요. 다만 저희들로 인해 그것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고, 아주 자그마한 빛을 보고도 감춰왔던 진심을 꺼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빛이 무엇을 뜻하는가. 성황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3황자 전하. 그분께서는 아무런 빛도 없이 스스로 그 틀을 깨어내셨으며, 주위의 눈먼 이들을 일깨워 줄 만큼…… 그러니까 스스로가 눈부시게 환한 빛을 내시는 분입니다.”
귀족들은 이미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성황이 되돌릴 수는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단연코 신성 제국을 이끌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께서 신성 제국의 성황이 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성황 폐하의 뒤를 따라 저희들이 죗값을 치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미 자신들이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자행하는 일. 성황으로서도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성황은 신성 제국의 수도로 돌아왔음에도 적진 한가운데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이 돌아선 만큼 그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신성 제국의 고위 귀족들. 그들이 말한 대로였다.
누군가는 성황의 꼬드김에 넘어갔으며, 누군가는 스스로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고, 누군가는 성황에 의해 타락해 버린 것이겠지.
어쨌거나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그 말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성황을 알현한 뒤 모인 귀족들은 하나같이 후련한 얼굴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탐욕을 추구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스스로가 행복해 보였다.
“……맞는 말이지. 틀에 갇힌 채로 변화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우리의 잘못을 우리의 손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천운이야. 신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게지.”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말은 바로 하게. 이게 어찌 우리의 손으로 바로잡는 겐가. 3황자 전하께서 바로잡아 주신 게지.”
“……그렇군.”
3황자. 그의 입지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신성 제국 내의 귀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와중에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젠 어쩔 셈인가?”
성황은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당장 그가 가진 힘들이 완전히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수를 쓴다면 언제든 귀족들이 대거 반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할 터.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3황자가 성황이 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3황자가 넘어야 할 관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황자와 2황자를 제치고 성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1황자 혹은 2황자를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지지의 철회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일전에 3황자 전하께 도움을 드리려 한 적 있으나 거절하시더군.”
3황자가 입지를 스스로 올려 가면서, 일부 귀족들이 3황자를 지지하고자 했으나 3황자는 전부 거절해 왔다. 그건 꽤 유명한 일화였다.
“3황자 전하께서는 우리를 미워할 만도 하시지.”
“……그래. 그건 당연한 일이야.”
3황자 입장에서 부패한 귀족들이 못마땅해 보일 만했고, 심지어 3황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1황자와 2황자를 지지해 온 귀족들이었다. 이제 와서 등을 돌린다고 한들 3황자가 받아줄 리는 없었다.
그건 귀족들에게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3황자 전하를 돕고 싶은데 말이야.”
“……그분께서 혼자 다른 전하들을 상대하시는 건 쉽지 않으실 텐데.”
그들의 우려는 순전히 3황자를 위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근래 들어 신성 제국 내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대신 우리가 다른 전하들을 돕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지.”
“그래. 도울 이들은 돕겠지만 말이야.”
적어도 3황자를 적으로 향하는 일만은 피하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대악마. 놈을 처치하는 게 먼저일지, 성황의 자리에 오르시는 것이 먼저일지 모르겠군.”
“그래도 자식 놈들은 3황자 전하를 위해 검을 들 테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군.”
다행히도, 자식들은 성황의 명을 거역하고 3황자를 따랐다. 3황자가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만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희망이 보였다.
“이제 와서 바로잡는다고 한들 우리가 지은 죄를 씻어낼 수는 없겠지.”
한 귀족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다른 이가 그를 나무랐다.
“당연한 것을. 다만 죄책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