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트루드는 상의를 입기 전, 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에 두드러지게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2황자와의 불공정한 대련 중에 난 상처였다. 그것을 볼 때마다 트루드는 황궁 기사단에 있던 시절의 악몽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2황자는 촉망받는 인재였고, 트루드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황궁 기사단 내에서 수련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재능의 차이인지, 노력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트루드와 2황자의 대련에서 번번이 트루드가 승기를 가져갔다.
비슷한 나이대에, 성기사들에게 똑같이 기대를 받고 있던 상황인 만큼, 트루드는 왠지 모르게 인정받는 것만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물론 황족을 이겼다는 데서 죄책감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대련은 대련이었고, 기사들 간의 싸움에서 상대를 봐주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트루드는 다른 선배 기사들에게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모진 질타였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아느냐.’
‘황족은 넘을 수 없는 산으로 존재해야만 그 빛이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거늘. 네가 그 빛을 꺼 버린 꼴이다.’
‘기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덕목은 융통성이라 일러두었거늘.’
그렇게 2황자를 꺾었던 기쁨은, 그날 밤새 호통을 들으며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물론 그러던 와중에 트루드를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해주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아예 그녀에게 찾아와 다독여 주었던 것은 챈슬러 뿐이었다.
트루드는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로 인한 오명. 그것이 누명에 의한 것인지, 아버지는 결코 말해주지 않았지만 트루드는 아버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 굳게 믿었다.
진정한 성기사가 되면 그 오명이 씻겨져 나갈 것이며, 진실에 가까워 질 힘을 얻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생각 덕분에 트루드는 악에 받쳐 검을 수련했건만, 오히려 질타만 받고 말았다.
챈슬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그것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그날 정말로 많은 눈물을 쏟아내면서, 기사로서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이 되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렇게 트루드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건하게 밀어붙였다.
2황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 트루드에게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걸어왔으며, 트루드는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2황자를 눕혔다.
그렇게 대련이 끝난 날 밤이면, 아니나 다를까 선배 성기사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그것도 버틸 만해졌지만 그녀에겐 충격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바로 챈슬러가 중죄를 저질러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것.
챈슬러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진정한 성기사의 모습에 가까운 깨끗한 사람이었다.
트루드에게는 밝혀야 할 진실이 하나 늘어난 셈이었기에, 더욱 분발해야만 했다. 성기사단의 단장 정도가 된다면 그 정도 힘을 생길 수 있을 것이었다.
누가 뭐라든, 트루드의 마음속에 생채기가 늘어나고는 있었음에도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꺾어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견디기 힘든 일이 또다시 찾아왔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2황자가 결국에는 대련 중에 성력을 사용했다. 참관인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신성력의 사용이었다.
헌데 그걸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로 나자빠진 트루드에게 무차별적으로 2황자는 계속해서 공격을 날려댔고, 그것 역시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트루드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생겨났고. 2황자가 남기고 간 말이 가관이었다.
‘영광스러운 상처이니 결코 치료하지 마라.’
트루드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2황자의 말대로 그 상처가 영광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족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으며, 그럼에도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것은 몸에 그에 대한 복수심을 확실히 각인시켜두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강하게 성장시킬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챈슬러가 없는 성기사단에 남아 있던 이유도, 그녀의 복수심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분명한 목표가 생겼고, 그것이 가까이 있는 한 그녀는 결코 게을러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챈슬러와 함께 나타난 것이 3황자였다.
당연히 3황자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 없었다. 황족에 대한 반감은 그녀의 마음 깊숙이 뿌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그가 챈슬러를 사면시켜 주었다는 것과, 아버지가 그를 직접 교육하고 있다는 것은 다시금 그녀를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3황자는 그녀의 몸에 났던 상처를 대부분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가슴 쪽에 하나의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은, 트루드가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상처의 종지부를 확실히 지을 차례였다.
트루드는 상의를 걸쳐 그 상처를 가렸다. 어차피 대련이니 몸을 가벼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좋으니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대련에 철갑을 입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트루드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단순히 복수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3황자는 트루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 판을 깔아 주었다.
우선은 2황자를 따르는 성기사들부터였다.
황궁의 기사단에서 트루드에게 몹쓸 짓을 하는 데 동참했던 이들의 대다수가, 2황자를 따르고 있었다. 2황자가 황궁의 기사단을 나오면서 그들을 자신의 기사들로 데리고 나갔었다.
“오랜만에 검이나 겨뤄보시겠습니까?”
안에서 황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트루드는 3황자가 일러주었던 대로 2황자의 기사들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안 그래도 앞서 있었던 언쟁 때문에 벼르고 있던 기사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나도 궁금했거든. 네가 얼마나 대단한 기사가 될지. 솔직히 기대가 과장되긴 했었어. 네가 여자고, 어렸으니까. 애초에 기대감이 낮았던 탓에 그 정도 기대를 받았던 거지.”
트루드는 기사의 말 따위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로 대련용 목검을 꺼내 들었다.
“하압!”
“꺼어억.”
단 한 합. 트루드의 검격이 번개처럼 기사의 복부를 후려쳤고, 기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 바닥에서 켁켁 댔다.
다른 성기사들은 그 기사를 걱정하는 대신 트루드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트루드를 벼르고 있었고, 트루드는 그 모두에게 기회를 줄 셈이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트루드의 검은 신성력이 없어도 빠르고 날카로웠다. 트루드의 선배였던 성기사들은 그녀의 검을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급소를 내어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 이십 분.
총 세 명을 그렇게 눕히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재밌네.”
마침 몸이 풀린 트루드 앞에 2황자가 나타났다. 3황자가 그의 옆에 있는 걸로 봐선,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트루드는 2황자를 노려보았다. 이전 대련에서의 몰입이 지속되고 있는 것 때문인지, 평소에 가식적으로나마 보이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의 네 모습이 딱 저랬었지?”
2황자는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기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트루드는 2황자의 도발에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신성한 힐데스하임의 성기사로서, 이전처럼 전하와 검을 부딪치며 깨달음을 전수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2황자는 대답 대신 앞선 성기사가 바닥에 내팽개친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목검을 허공에 빙빙 휘둘렀다.
위잉, 윙.
그의 가벼운 동작이 공기를 재빠르게 가르며 위력적인 소리를 내었다.
확실히, 2황자는 못 되어 먹은 황족이기는 하나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4성의 성력만으로 5성인 1황자와 황위 다툼이 치열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니 말이다.
2황자의 자신만만한 얼굴은 확실히 그가 그동안 많은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가벼운 검격만 보아도 그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루드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2황자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 덕분에 악착같이 살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트루드가 2황자를 이토록 이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트루드에게는 자신의 복수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생겼다.
“이 대련은 전하를 위한 것입니다.”
트루드는 지켜보는 3황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3황자가 신성 제국을 이끌기 위해서는, 결국 2황자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래서 트루드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보여줄 셈이었다. 3황자 전하의 검인 그녀가 2황자를 꺾을 수 있노라고.
트루드는 검을 빙빙 휘두르며 도발하는 2황자를 향해 땅을 박찼다.
* * *
까앙!
2황자와 트루드의 목검이 강하게 부딪쳤다. 서로 간의 실력 증진을 위한 대련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더욱 살이 떨릴 정도였지만, 일단은 목검이었고 사제들이 포진해 있는 이상 누구 한 명이 잘못될 일은 없으니 지켜보기로 했다.
트루드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집념이 엿보였다. 그 집념이 검에 전해진 듯 2황자를 향해 지독하게 따라붙었다.
까앙.
복부를 향해 크게 회전하는 검을, 2황자가 다급하게 자신의 검을 회수하여 막아냈다.
트루드는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을 향해 다시금 검을 찔러넣었다.
콱.
이번엔 트루드의 검이 2황자의 복부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크윽.”
2황자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씹으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검이었고, 지켜보던 성기사들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분명히 2황자는 검에 있어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나이가 조금 어리기는 하나,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인다면 성국 내에서 최고의 기사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2황자의 약점이라고 한다면, 싸움이 길어질 때마다 지금처럼 감정적으로 돌변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과거 트루드와 대련을 거듭할 때도 보였던 약점이었다.
트루드는 2황자가 너무도 크게 그린 검의 궤적을 가볍게 회피하며 검을 짧게 잡았다. 하지만 당연히 2황자를 공격할 거라 생각했던 트루드의 검이 2황자의 몸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
무얼 하는 것인가 보니 트루드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거기엔 3황자가 서 있었다.
3황자는 트루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를 허락하는 듯이.
그리고 그 고갯짓을 본 트루드가 돌변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