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65)
제165화
2황자가 떡이 된 채로 돌아간 이후, 간만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미뤄뒀던 영지의 관리와, 신성력의 축적을 중점적으로 하여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갔다.
고리가 4개가 된 덕인지, 아니면 베이언 영지민들의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아 있는 덕인지는 몰라도 성배에 성력을 가득 채우는 데까지는 이제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운명의 권능’이 발동되지 않습니다.]내 고리 안의 성력을 물론이고, 성배에 축적한 모든 성력을 투입해 봐도 운명의 권능은 사용되지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닌 건지, 아니면 어마어마한 미래라 더 많은 신성력이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입장에선 답답할 뿐이었다.
언젠가부턴 내가 닥치게 될 큼직큼직한 사건을 보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탓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내 할 거나 제대로 하고 있으면 되겠지. 지금껏 운명의 권능은 필요한 때에 알아서 잘 사용되었으니까.
그렇게 무료한 와중에 나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한 호위 기사가 무언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런 건 들어보는 게 백 번 낫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병원 인턴이 교수에게 할 말을 못 해서 사고 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 말이다.
“……예?”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아…… 실은 그게, 꼭 드려야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좀…….”
“괜찮으니까 말해봐.”
“일주일 전부터 황자 전하를 뵙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런 이들의 수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아무나 다 만나줄 수는 없었다.
“자신들 말로는 성국의 기사와 사제라고는 하는데…….”
“흠. 정말 그래 보였어?”
아무래도 수상했다. 정말 성기사와 사제라면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내게 서신을 넣어도 될 일인데.
“행색이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사라는 자는 곧 죽을 것 같은 노인에 녹슨 갑옷을 입고 있었고, 사제라는 자도 어디서 구한 건진 몰라도 얼룩진 사제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근데 뭐가 더 있나 보네?”
“어,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고리도 없는 걸로 보아 사칭하고 있는 놈들인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못 들은 걸로 해 주겠으니 돌아가라고 해도 보통 끈질기지 않아서…….”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아군이 늘어나는만큼, 적도 늘어나다보니 괜히 의심만 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보낸 암살자라든가…… 아니, 그런 거면 조용히 내 방으로 침입했겠지만 아무튼.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이 참 믿기도 어려우며 성국을 모독하고 있어 못 들은 걸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뭐라던데?”
“이게 참, 제 스스로 판단할 문제는 아닌 듯하여, 현명하신 전하께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알았으니까.”
“흠흠. 사제와 성기사를 사칭한다기에는 미심쩍은 면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자신이 기사라는 노인이 늘어놓는 정보들은, 성국의 기사가 아니라면 그렇게 세세히 알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자부터가 성국의 기사인지라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더 떠보기 위해 고리에 대해 묻자, 모종의 세력에 의해 고리가 제거당했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해 전하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드리고자 찾아왔다고.”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믿기 어려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이 세계였으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살아왔음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어디 있지?”
“아까도 찾아와서 돌려보냈습니다만…… 일주일째 매일 같이 찾아오는 걸로 봐선 내일도 오전쯤에나 방문할 듯합니다.”
“그럼 그때 안으로 들여.”
“알겠습니다.”
호위 기사 역시 미심쩍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나한테 얘기하려고 한 거였겠지.
* * *
다음 날 오전이 되자, 어제의 그 호위 기사가 방문을 두드려 그들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들여보내.”
호위 기사는 그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혹여나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대기하려 했지만 내가 그를 돌려보냈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호위 기사에게 들었던 대로였으니까.
성기사라는 자는 걷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지긋한 노인이었고, 사제라는 자 역시 단련된 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에게서 성력이라든지 마력 같은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호위 기사가 밖으로 나가자 이들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여사제의 표정은 마땅치가 않았다.
공손하지 않은 태도라든가 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나는 적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나를 꼭 보고 싶어했다던데.”
“예. 전하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저희를 돕는 길이면서도 어쩌면 전하께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기사. 가슴 속의 고리는 보이지 않았으나, 세련된 어투와 고결한 느낌은 확실히 범상치가 않았다.
“힐데스하임의 성기사였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고리가 없군. 누군가가 끊어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다.”
이미 어제 적잖이 놀랐던지라 지금은 별생각이 없었다. 내 반응이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던 것인지, 오히려 저들이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혹여나 그에 대해 알고 계신 겁니까?”
노기사의 태도에는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모른다.”
“어쩌면 전하께서도 그분과 같은 뜻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노기사는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허나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에, 전하를 찾아왔습니다.”
“돌려 말하지 말고.”
“2황자 전하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저들이 나를 경계하는 이유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2황자와 한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실제로 성국에서 내 입지가 이 정도까지 되기 전에는, 내 스탠스에 주목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성황이 될 자는 1황자냐 2황자냐.
그것까지는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으며, 내가 그 둘 중 누구의 뒤를 밀어줄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내가 성황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둘 중 한 명을 고를 수는 없었다. 차마 우위를 가릴 수 없는 쓰레기들이었으니 말이다.
“2황자가 그대들의 고리를 끊어내었다고?”
그 이유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성국에서 중죄를 지은 거라면 2황자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었으니까.
“……아니.”
노기사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내가 그의 입을 막았다.
「체득의 권능이 발동됩니다.」
「힐데스하임의 두 별이 빛을 잃는 고통스러운 경험, 인내할 수 있는 정도로 제한되어 전달됩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으니까. 말보다도 훨씬 확실했다. 말은 거짓을 고하는 경우도 많지만, 권능은 늘 진실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1초도 지나지 않아서 내 선택에 대해 후회했다.
“……끄흡.”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고리가 끊어지면서 온몸의 관절이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심지어 이건 권능이 제한하여 전달한 고통일 뿐이었다. 저들이 실제로 겪은 고통은 이보다 더하다는 것.
그런데도 나는 이 고통을 온전히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하, 전하!”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급히 나간 시종이 사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의 성력을 통해 그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자, 호위 기사가 아까 그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꽁꽁 묶인 상태로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는 그들을 꿇리고는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괜한 얘기를 해서 감히 전하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이들의 처벌을 제가 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죗값을 사할 기회를 주십……”
“그만하고, 나가.”
내가 보아도 지독하게 냉랭한 말투였다.
“예, 예?”
“나가라고.”
그리고 호위 기사는 내 기분을 파악했는지 뭐라 더 묻지도 못하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이들 역시 호위 기사를 따라 나갔다.
결국 나와, 2황자에게 피해를 본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토록 짜증 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화가 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나지만, 지금은 그 중에서도 유독 심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2황자 때문도 있지만, 피해를 본 이들이 죄인처럼 묶여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자포자기한 채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3황자 전하는 마땅히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노기사는 체념한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사제는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이 마땅한 일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걸 수도 있겠군요. 모든 것이 신성 제국의 대의를 위한 길이었음을…….”
나는 말없이 일어나 노기사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마치 최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는 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노인은 진작에 은퇴했을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검만큼은 언제든 적을 베어낼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묶고 있는 줄을 잘라내었다.
“……?”
“틀렸어.”
기사와 사제가 동시에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라고 언제나 옳은 일만 하는 건 아니야. 틀린 선택을 할 때도 많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도 옳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기는 해. 그리고 이번 문제는 너무 쉽잖아. 뭐가 맞는지.”
체득의 권능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노인과 사제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와는 별개로,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2황자는 영악했다. 뒷배가 없어 이 사실이 공론화할 수 없는 이들을 엄선했다.
“고맙군.”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나를 찾아와 준 이들에게 고마웠다.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정말로 2황자가 성국에서 매장당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들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는, 나를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나도 참 특이한 사람이다.
착한 척은 혼자 다 하고, 누군가가 치켜세워주면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인정받는 것 같을 때는 확실히 기분이 좋았으니까.
물론 지금은 2황자 때문에 기분이 더러운 게 더 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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