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67)
제167화
가당찮은 소리였다.
성황이 힐데스하임을 어그러뜨린 것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3황자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내심 성황이 속죄라도 하고 싶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오해하는 게 있나 보군.”
모든 것은 성황이 자초한 일이다. 훗날 그가 어떤 식으로 죗값을 치르든 하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일을 벌여놓은 뒤였다.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내가 도울 필요는 없다. 네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통하지 않으면 협박이라도 하러 온 셈일까? 그렇다면 3황자가 단단히 착각이라도 하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성기사들 중 다수가 성황으로부터 등을 돌리긴 했어도, 성황의 힘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건재했다. 그리고 3황자가 성황에게 무례한 짓을 한다면, 그건 성황으로서도 3황자를 실각시킬 명분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설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전하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뭐?”
“전하께선 그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으셨다 들었습니다.”
3황자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 성황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으니 말이다.
거룩한 혈투. 황자들 간의 우위를 확실히 겨루기 위한 신성한 자리에서, 회복되지 않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엔 승리하였으나, 어쩌면 그게 성황의 모든 것을 바꿔 버린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패배하였다면 신성 제국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되었을 것인데.
하지만 성황은 자신의 부상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치료하는 고위 사제만 알고 있으며, 그가 누설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어떻게 안 거지? 그 사실은 현자도 모를 텐데.”
최측근이었던 파우스트도 모르게 확실하게 감춰두었던 사실이다. 부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성황이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었기에.
성황으로서는 경계심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신께서 제게 많은 걸 알려주신다는 것,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어지간해서는 3황자가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번의 경우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신탁이 아니고서야 그 사실이 3황자의 귀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 순간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성황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신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성황은 신성 제국을 신께서 바라는 바와는 정반대로 이끌어 왔다. 그 사실은 분명히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성황 역시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게 정말이더냐. 신께서는 뭐라시던가?”
그리고 다음으로 든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성황의 가슴에 크게 난 상처. 그것은 결코 치유되지 않고 처음 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성황을 갉아먹어 가고 있었다.
만약 그의 가슴에 있는 다섯 개의 커다란 고리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고위 사제에게 지속적인 치료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는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제 손으로 성황 폐하를 치료하고, 부결의 추를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두려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치료를 받아 호전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간 쌓아 온 악행에 대하여 부결의 추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성황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그런 성황을 향해 3황자가 입을 열었다.
“성황 폐하도 언젠가 부결의 추 위에 오르셔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심판의 대상은 성황 폐하가 아닙니다.”
“……그렇군.”
신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주시려는 건가, 작게 중얼거린 성황은 3황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로 내가 반평생을 안고 살아온 이 짐 덩어리를 떼어낼 수 있단 말이냐?”
성황의 말에 3황자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체득의 권능이 발동됩니다.」
「힐데스하임의 태양이 저물고, 붉은 달로 타락해가던 비극. 그 일련의 과정을 엿봅니다.」
성황을 만난 직후 체득의 권능이 스스로 발동되었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동으로 일어난 현상. 보통 이런 경우는 필연적으로 내가 보아야만 하는 ‘진실’이 숨어있는 때가 많았다.
노이즈가 잔뜩 끼었다가, 다시 선명해진 현상 앞에는 현 성황 겔리두스 폰 힐데스하임이 서 있었다. 젊었을 적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단순히 젊고 늙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주변인들이 그토록 나를 볼 때마다 성황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하던 것이 납득이 됐다. 거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선한 기운이 성황의 얼굴에 묻어 있었으니까.
다만, 선한 인상도 소용없이 그는 한없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마 위에 올라탄 채로, 백색 갑옷을 차려입고. 양옆에는 젊었을 적의 파우스트와 챈슬러 경이 보였다.
꼭 백색의 갑주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더없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오늘부로 2황자는 더 이상 나의 혈육이 아니며, 힐데스하임 황가의 사람이 아니다! 확실히 섬멸한다!”
크게 외친 성황의 말 고삐를 잡은 채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우와아아아!”
그리고 수백의 기사들이 그 뒤를 따르자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진동이 퍼져 나갔다.
그 반대쪽에는 아마도, 당시의 2황자였던 사람과 그의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힐데스하임을 상징하는 백색의 갑주들을 차려입고 있었으나. 허나 이상하게도 그들을 보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나는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성황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내가 응원한다고 달라질 일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과거의 역사를 관망하기로 했다.
거룩한 혈투.
황자들간의 전투는 ‘거룩’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혈투’는 맞았다.
힐데스하임 내의 규율상, 목숨을 끊지는 않더라도 하얀 갑주들이 피로 범벅이 될 만큼 피 튀기는 싸움이 펼쳐졌다.
한쪽이 완전히 우세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을 고르라면 단연 겔리두스 쪽이었다.
파우스트의 전략, 챈슬러의 용맹함, 그리고 겔리두스의…… 신성함까지.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겔리두스는 분명히 신성해 보였다.
막대한 양의 성력이 양손에서 폭발하며 사방으로 달려드는 병사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방향을 정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 다른 기사들은 겔리두스가 그쪽으로 전진할 수 있게 열심히 길을 터 가고 있었다.
“……리오.”
챈슬러가 멈춘 곳은 한 남자의 앞이었다. 아마도 적진의 수장인 듯 보이는, 당시의 2황자겠지.
리오라는 남자는 겔리두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꼭…… 그러니까 지금의 성황을 닮아 있었으며, 정작 성황의 눈빛은 정반대로 아주 말끔했다.
“믿기 힘든 소리를 들었소.”
성황은 막대한 성력을 통해 공간을 완전히 분리했다. 자신의 형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필요한 듯 보였다.
“더러운 힘에 손을 댔다는 것, 그게 정말이오?”
“더러운 힘이라니. 힘에 더럽고 깨끗한 것이 어디 있겠나?”
그 말에 겔리두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리오가 말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그런 것보단, 아마도 리오가 그 사실을 부정하기 않았기 때문일 터.
그리고 그 더러운 힘이라는 것. 구체적으로 듣지 않아도 예상되는 바가 있었으나, 리오의 손에서 나온 칠흑의 기운을 보곤 확신할 수 있었다.
흑마법이었다.
“불공평하지 않아? 애초에 타고난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니.”
리오의 손에서 나온 새까만 기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이건 그렇지 않더군. 손쉽게 내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어.”
“단단히 착각을 하시는 모양이오.”
겔리두스는 그런 리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타고난 기운은 형님께서 나보다 더하셨지. 어떻게 갈고닦느냐가 중요한 것, 그건 신성력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소.”
“닥쳐!”
리오의 손에 있던 흑마력 덩어리가 겔리두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겔리두스의 앞에 만들어진 새하얀 방벽이 그 덩어리를 막고는 녹아내렸다.
“애초에 네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네가 군주가 되기 위해 과욕을 부렸기에, 나도 욕심을 좀 부려본 것뿐이라고.”
리오가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들었다. 인간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속도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쩌억.
겔리두스가 만든 방벽이 깨어지고, 단검 모양이 된 흑마력이 성황의 가슴팍을 조금이지만 꿰뚫는 데 성공했다.
“……네가 없으면 내가 모든 걸 누릴 수 있게 되겠지.”
겔리두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의 눈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랬겠지.”
그리고 이내 눈물 한 방울이 겔리두스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미안하오. 내가 없었다면 형님께서 구태여 이런 힘을 찾으실 일도 없었을 터인데.”
콰앙!
그리고 성황은 리오에게 손을 대고는 그를 신성력으로 날려 버렸다.
폭발을 맞고 저 멀리까지 날아간 리오는 넘어진 채로 꿈틀거리다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성황은, 이윽고 쓰러져 버렸다.
* * *
“…….”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나는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과거 겔리두의 모습이 아니라 리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성황의 변화가 흑마법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서도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이리되었겠지.
만약 성황이 아직 조금이나마 과거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역시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제안을 했다.
그의 가슴에 난 불치병을 치료해 줄 것을. 그 대가로 부결의 추를 건네줄 것을.
성황은 왠지 모르게 두려워 보였다. 하지만 망설이는 걸 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이내 성황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어디 네 뜻대로 해 보거라.”
부결의 추를 성황이 건네준다면, 그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성황이 저질렀던 악행들을 다시금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성황 역시 그것을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성황은 응했다.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시험을 볼 땐 그래도 정답만 고르면 됐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이렇게 종종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곤 한다.
“준비가 좀 필요하니 베이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일단 자리부터 뜨기로 했다. 성황을 더 지켜보는 건 내게도 심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