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70)
제170화
부결의 추만 가지고 2황자를 심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성국 뿐만 아니라, 이 세계관에서 그토록 중요시하는 명분이 바로 그 부족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엄연히 나보다 승계 서열이 위에 있는 2황자를 부결의 추로 심판하는 데에는 충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간 2황자가 저질러 온 악행들은 신성 제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어 왔기에, 그걸 문제로 삼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고 내게는 지금껏 그래왔듯 무엇보다 강력한 명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바로 역설의 권능을 통한 신탁.
물론 생각처럼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미래를 보는 운명의 권능과 비슷하게 특정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원한다고 아무렇게나 신탁을 전달할 수는 없었다.
운명의 권능과 다른 점은, 운명의 권능은 때에 맞춰 알아서 사용되지만 역설의 권능은 내가 필요로 해서 사용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2황자를 부결의 추로 심판하겠다는 내 뜻을 신이 허락한 것인지, 신탁을 통해 많은 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소문이 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부결의 추라는 부당한 이를 심판하는 성물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그 첫 대상이 2황자라는 점은 다소 파격적이긴 하겠지.
“……또 다음 심판 대상이 누가 될지 모르니 겁이 나겠지.”
그리고 귀족들 역시 부결의 추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황족의 뜻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신성 제국에서 정의와는 먼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그들 역시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그들 모두를 부결의 추로 심판할 생각은 없었다.
한순간에 대다수의 귀족들이 사라졌다가는 국가 전반에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귀족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욕심내는 이들로 인해 싸움이 생겨날 테고.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부결의 추로 누군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현자를 통해 듣게 되었다. 부결의 추에 의한 심판이 과거에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 역시 그런 탓이었고.
결국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건 황족의 역할이었다. 내가, 성황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직접 판단해서 거를 놈들을 거르면 된다는 소리였다.
“그게 내 딴에는 편하기도 하지.”
그래. 솔직히 나쁜 짓을 저지른 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심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 2황자의 경우에는 부결의 추로 심판하게 될 테지만.
그렇게 2황자가 심판을 받고 성황의 후계자 후보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다. 그들은 선택해야만 하겠지.
1황자를 따를지, 나를 따를지.
그들이 나를 따르는 것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내 목표를 위해서는 성황이 되어야만 했고, 그들이 내 세력이 된다면 그 계획이 수월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그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부결의 추가 아닌, 확실한 기준과 철저한 조사로 모두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그게 맞겠죠?”
나는 누워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 자책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였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나와 사제들이 그를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성황의 모든 비밀을 알아냈다고 해도, 그가 했던 일들에는 비극적인 사연이 있었다고 해도. 그 역시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죽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한 국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었으니까.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성황은 살아있어야만 했다.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돌려놓고, 별개로 그에 대한 죗값까지 치러야만 했다.
“그러니까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나는 그렇게 식물인간이 된 채로 누워 있는 성황에게 중얼거린 뒤 방을 빠져나왔다.
마찬가지로 2황자에게도 죽음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책임을 물어 줄 차례였다.
* * *
수도의 커다란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황족부터 시작해서 신성 제국에서 한가락 하는 귀족들이 빠짐없이 모여 있는 것은 몇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을 제외한 일반 제국민들에게도 행사를 직관할 자격이 주어졌다.
“……부결의 추가 돌아왔다니.”
“너무 걱정 말게. 부결의 추가 심판할 만한 죄를 지어왔던 것이라면 신께서는 어찌 그리 긴 기간 동안 방관하셨겠는가.”
“전부 신께서 허락하셨던 게야.”
그리고 2황자 측의 주축이 되는 귀족들은 조용히 한데 모여 애써 걱정을 떨쳐내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하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신탁을 통해 2황자가 부결의 추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는 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
그리고 나름 머리를 쓰는 이들은 행복회로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성황 폐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심과 동시에 부결의 추가 나타났다…… 많이 미심쩍기는 하지.”
“폐하께서 3황자 전하께 부결의 추를 전함과 동시에, 성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하신 것 아닌가.”
“그거야 3황자 전하의 입장이지. 폐하께서 어떤 분인데 그런 선택을 하셨겠냐는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린가?”
“3황자 전하께서 모든 걸 꾸미셨을 수도 있단 것이지.”
“……뭐?!”
“성황 폐하께서 자결하려 하셨다는 것이 3황자 전하의 철저한 음모에 의해 꾸며졌을 수 있다는 말일세.”
그리고 그 말은 궁지에 몰린 세력들에게는 꽤나 그럴싸한 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구멍이라도 찾아야만 했으니까.
“잘 생각해보게. 폐하께서 이제 와서 그런 선택을 하실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설마 정말로 3황자 전하께서 후계자가 되실 것이 두려워서? 정말 그러신 거라면 폐하께서 작정하고 1황자 전하나 2황자 전하를 밀어주셨겠지.”
성황이 특정 황자를 밀어준다는 것. 신성 제국에서는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말을 뻔뻔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허나 그를 나무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동감하고 있을 뿐.
“허면 3황자 전하께서 성황 폐하를 암살 기도함과 동시에 부결의 추를 손에 넣으셨고…… 성황 폐하께서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셨다?”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 이미 황궁의 기사와 사제들 중 상당수가 3황자 전하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허나 성황 폐하의 생명이 여전히 붙어있다는 것. 그건 역시 신께서 폐하를 여전히 수호하고 계신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럴 수가!”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그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허나 마땅한 증거가 없지 않은가. 그런 말을 섣불리 꺼냈다가 잘못하면 우리 목이 당장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래서 오늘이 중요한 것이지.”
2황자를 지지하는 백작이 비장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3황자 전하는 부결의 추만 있으면 2황자 전하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 게야.”
“…….”
그 말에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모두가 자신들이 저질러 온 악행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주축에는 2황자가 있었다. 과연 2황자가 부결의 추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지. 아까 말했던 대로 신성 제국은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네. 그것이 정의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신의 뜻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신께서는 방관하신 게 아니라, 변화를 인정하신 거니까.”
그러니까, 신성 제국이 이 모양으로 잘도 유지되어 온 것은 결국 신이 이들의 방식을 허락했다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부결의 추가 발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성력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백작이 광장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결의 추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신성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저 정도의 숫자의 사제라면 과한 감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3황자가 만약을 대비해 넉넉히 마련한 듯 보였다.
“저 정도면 딱 두 번 정도 발동시킬 수 있을 걸세.”
백작은 과거 부결의 추에 의한 심판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기에, 그리 자신할 수 있었다.
“혹여나…… 2황자 전하께서 심판을 받으신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심판할 수는 없다는 뜻이지.”
이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 말하는 듯 보였다. 허나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로 끝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3황자 전하께서 작정하고 우리를 겨냥하신다면 사제들이 다시금 신성력을 끌어모으고 하나둘 죗값을 치르게 할 것 아닌가.”
그러자 백작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중요하다는 뜻이지.”
“……?”
“3황자 전하께서 2황자 전하를 심판하고 난다면, 우리가 나서서 곧장 3황자 전하 역시 부결의 추 위에 오르실 것을 제안하는 거야.”
“뭐?”
“수많은 제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지. 그리고 2황자 전하께서 심판을 받으신다면 분명 저들이 가진 황족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게 될 거야. 그건 심판을 집행한 3황자 전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고.”
“……!”
그러니까 부결의 추가 두 번째로 심판할 대상을 3황자로 정한다는 뜻이었다.
“3황자 전하 역시 내빼실 수는 없겠지. 모두가 이 현장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3황자 전하께서 작정하고 2황자 전하를 나락으로 빠뜨릴 계획을 세우셨지만, 그 함정에 스스로가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신 게지.”
“……묘책이군.”
대부분이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3황자 전하께서 성황 폐하의 암살 기도를 하고, 멋대로 성물을 빼돌렸으며 그를 통해 권력을 쟁취하려 하였다. 그런 중죄를 부결의 추가 방관할 리는 없으니.”
그렇게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2황자가 부결의 추 위에 오르고, 그 결과가 나온 이후 곧장 3황자를 그 위로 올린다.
“혹여나 이번 일로 2황자 전하와 3황자 전하 모두 후계자 권한을 박탈당하신다 하여도 걱정할 것은 없지. 결국 1황자 전하께서 성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실 테고, 그에 대한 공을 세운 것은 우리라는 것을 인정해 주실 테니 말이야.”
귀족들은 애초에 자신들만 살아남으면 되었다. 그간 공을 들여온 2황자가 잘못된다면 분명 아쉽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구멍을 찾았다는 것에 들뜨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들 조용히 광장을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3황자가 손에 황금으로 된 추를 든 채로 입장하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반대쪽에서는 2황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2황자의 저런 눈빛은 흔히 볼 수 있었으나, 3황자가 저렇게 악에 받친 얼굴을 한 것은 또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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