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75)
제175화
엘프, 아니 다크 엘프들도 알고 있었다. 변질해 버린 자신들을 인간들이 되돌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다크 엘프가 된 건 흑마법 때문이 아니었으니,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에도 엘프들은 3황자를 보며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 어쩌면…… 그라면 자신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지만, 3황자의 모습은 성국의 과거 인물들과 닮아 있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황자에게 모든 걸 알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가 저희를 구원할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만 엘프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차마 3황자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들을 정말로 신뢰하고, 돕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수모를 겪으며 살아갈 바에는 이 모습 그대로 죽어버리는 게 백 배는 낫겠지.”
인간과는 다른 엘프의 특성, 그것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자고로 엘프는 마물을 제외한 모두에게 사랑받는 종족이었다.
흉폭하게 날뛰는 오우거도, 야금술밖에 모르는 드워프도, 비열함을 정의감으로 애써 짓누르는 인간들에게까지도.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엘프들은 만인의 애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였고, 그게 때때로는 종족 간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까지 했다. 엘프는 존재만으로도 평화를 유지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엘프들은 그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 높은 자존감과 확실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 지난 얘기일 뿐이지.”
하지만 평화가 깨어지고 말았다.
종족들 간의 균열이 생겨났으며 심지어 인간들은 그 내부에서도 지독한 전쟁을 치르며 살아갔다.
그 시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으나, 중요한 건 엘프들이 전쟁을 막아낸다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사명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더 이상 엘프들은 고고한 마음을 가진 채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게 과연 우리의 탓이었는가, 아직도 잘 모르겠군.”
그 어떤 엘프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찾을 수 없는 답이었다.
허나 내심 스스로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중재하지 못했을까. 평화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이 더욱 완벽한 존재였다면, 평화는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되어 버린 세상이 온통 자신들의 탓인 것만 같아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
그렇게 차츰 생각이 바뀌어 가면서 엘프들은 점점 초췌해져만 갔다.
말끔했던 외형도, 순수했던 내면도, 점점 왜곡되면서 결국 엘프들은 금단의 영역을 넘게 되었다.
결국 다크 엘프들의 스스로에 대한 원망은, 이 세계를 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 다름 아닌 이 세상이라는 이유였다.
엘프들은 평화를 위해 늘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엘프들의 타락이었다.
“……얘야. 늘 빛을 잃지 말거라.”
그럼에도 유일하게 엘프 본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바로 미아였다.
다크 엘프가 되면서 새로운 엘프가 탄생하는 일은 사라져 버렸지만, 엘프 중에 가장 어리고 순수했던 미아만큼은 다크 엘프로 변질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임을 늘 명심해야 해.”
그들은, 미아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엘프가 엘프로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기에. 또, 엘프였던 이들이 다크 엘프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기에.
미아에게 그 일을 되물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미아를 그렇게 키워온 것이 지금 와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엘프의 힘이 필요하겠군.”
대악마의 부활은, 단순히 평화를 깨는 정도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파멸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일. 그리고 엘프의 힘이 없다면 파멸은 필연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원래라면 대악마의 부활에 별 감흥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린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다크 엘프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런 다크 엘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가 있었다.
신성 제국의 3황자. 그는 역시 과거 함께 했던 영웅들의 모습을 꼭 빼닮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그때처럼 대하지는 않았을 테니.”
3황자는 다크 엘프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바라봐 주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여타 인간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처음엔 단순히 미아를 인간에게 맡기는 게 나을 거라는 이유에서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그를 돕고 싶어졌다.
하지만 다크 엘프가 된 이들이 그에게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었고, 그나마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미아. 이리 와 보거라.”
다크 엘프들은 이미 3황자에게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자신들은 마물과의 전쟁에서 방해가 될 뿐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세계는 멸망에 처하게 되었을 거라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엘프들에게 전해지는 비기였다.
“절대 누군가에게 말해서는 안 되고, 네 안에만 꼭 감추어 두거라. 다만, 네가 정말로 사용해야 할 것 같을 때만 꺼내놓아야 한다.”
이젠 평생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비기였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였다. 그 아름다웠던 엘프들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미아에게 모든 걸 전수한 다크 엘프들은, 미아를 3황자에게로 보냈다. 미아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다크 엘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무심하게 그녀를 떼어놓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 * *
다크 엘프들이 미아를 내게 맡겨둔 뒤 떠났다. 그들의 작별 인사가 평소와는 달랐다.
게다가 눈빛 역시 평소와는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아쉬움이 푹푹 묻어 있는 걸로 봐선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있긴 한 듯했지만 나는 차마 그것에 대해 묻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어서였다.
혹여나 다크 엘프들의 이러한 행동이, 내가 보았던 파멸적인 미래를 바꿀 수도 있으니. 그들이 어떤 비극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차마 그들을 말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도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다크 엘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동안, 나 역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보기로 했다.
“……전하.”
2황자에 의해 강압적으로 고리를 희생해야만 했던 노기사와 여사제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볼 참이었다.
“일전에 2황자 전하에 의해 고리가 끊어지기는 했으나, 저희의 고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그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들에게 신성력을 주입하자,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한 고리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다시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일 정도로 이미 손상이 되어 있었다.
“실은 고리가 끊어지면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다량의 신성력이 쏟아져 나오려 했었습니다. 허나, 억지로 막아내었을 뿐이지요. 2황자 전하께서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셨고.”
그러니까, 2황자가 궁극의 신성 마법을 위해 그들의 고리를 억지로 끊어낸 게, 그들에게 분명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기는 했다는 뜻이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성력은, 작게나마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차마 2황자 전하를 위한 기적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노기사의 말투에서, 이제 2황자에 대한 원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고인이 되면서 원망이 사그라든 것일까.
두 가지 모두 구태여 그에게는 필요 없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겠지. 나라면 그가 심판을 받기 위해 세상을 떴다고 한들, 여전히 원망하고 있을 테니까. 그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노기사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여사제는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전하께서는 분명 제가 보아 왔던 그 어떤 황족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전하를 위해 작은 기적을 선보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기적?”
“분명히 고민도 했습니다. 끊어진 고리라고 한들, 가슴 속에 남겨두는 것이 성기사로서, 사제로서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노기사가 여사제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신성력이 없다고 한들 저희가 사제이자 성기사라는 것을 만인의 앞에서 인정해 주셨지요.”
작게나마 건넸던 위로가, 그들에게는 꽤 감명 깊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고리를, 전하를 위해 사용하고 이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을까 합니다.”
이쯤 되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이해가 되었다.
2황자가 그들의 고리를 끊어내며 시전하려고 했던 궁극의 신성 마법.
그건 실패했던 게 아니었다. 저들이 억지로 막아내었던 것이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마지막 힘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끊어진 고리를 완전히 소멸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게…….”
하지만 역시 내키지가 않았다. 그들에게는 끊어진 고리라도 남겨두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고, 조금의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를 위해 저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영광스러운 일이니.”
“어차피 쓸 데도 없는 고리입니다. 마지막을 전하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들의 눈빛은 결연했다.
어쩐지 형식적으로 거절했다가 못내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참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무엇이 되었든.”
“…….”
“그대들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주게 되었든, 별 영향을 주지 못했든. 그대들의 마음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으니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결국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오히려 저들이 하고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손을 뻗어 내게 내밀었다. 고리의 회전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막대한 양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신성력이라는 것까지.
거대한 파도처럼 무언가가 나를 덮치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울 정도로 벅찬 감각이었다.
그리고 이내.
[길 잃은 고리가 진정한 주인을 맞이합니다.] [다섯 번째 고리에 성력이 부여됩니다.]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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