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76)
제176화
“…….”
다섯 번째 고리가 형성되었다는 문구가 사라지고 나서도 잠시 기다려 보았다. 새로운 고리가 만들어진 데다가, 다른 것도 아닌 마지막 고리였으니 특별한 권능이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권능이 부여된다거나, 특별한 메시지가 더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냥 딱 거기서 끝이었다.
그래도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노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 저들의 눈에도 내가 이상하게 보이기는 할 거다. 그들의 시선을 유추해 보자면 대충 똥 참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리고 지금 내 심정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아니. 고맙다.”
다섯 번째 고리가 생겨나면서, 마치 내 신성력의 한계를 억누르고 있던 듯한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빈 공간으로 그간 쌓여 왔던 성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한계가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제껏 고리가 생겨나면서 느껴왔던 성력의 증가폭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느 정도로 많은 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될지는 나조차 가늠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신성 제국이 너희를 기억하는 것과는 별개로, 너희들이 내게 보인 마음을 평생 기억하도록 하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유독 많은 순간들이 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기억들.
지금 이 순간은 그중 하나였다. 저들이 영문을 몰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노기사와 여사제를 돌려보낸 뒤 현자와 만나보기로 했다.
“……기어코 초월에 가까워지셨군요.”
현자는 나를 보자마자 내 몸에 생긴 변화를 알아챘다.
의문이 들었다. 현자는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성황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여럿의 고리를 태웠고,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아주 약간의 성력일 뿐인데.
하지만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현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들이라면 전생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지 않은가.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것만 같은 천재들.
물론 메스질을 하고, 논문 작업을 밤을 새워 하다 보니 그들 중 일부는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이게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현자에게 내가 본 미래에 관해 말 해 봤지만, 현자 역시 명확한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한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자가 아무리 오래 살았고,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머릿속에 쌓아왔다고 한들, 그건 인간의 수명 안에서일 뿐이었으니까.
루시퍼의 재림은 적어도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있었던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현자가 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전하.”
현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저는 성황 폐하와 일생을 함께하였으며, 성황 폐하가 그 자리에 오르시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뤘을 때, 저는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응?”
현자가 갑작스레 회상에 잠겼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현자는 늘 자신의 과거를 감춰왔으니까. 아니, 내가 묻지 않으니 말하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래도 나는 현자와 나름 가까운 사이였고, 그도 내게 자신만의 비밀을 늘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이기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현자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기로 했다.
“폐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신 뒤 저를 내치신 걸로 알려져 있지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애당초 저는 제 여정을 거기서 마치려고 했습니다.”
“……왜지.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었으니까 만끽하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야?”
현자가 겔리두스를 성황이 되도록 민 건 당연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귀족들처럼 부와 권력을 위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원하는 바가 있었겠지. 현자가 원하는 신성 제국의 모습이 있었겠지. 그리고 성황의 옆에서 그러한 신성 제국이 완성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련히 성황께서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었으니까요. 물론 그 사이에 있었던 사고로 인해 모든 게 망가지게 되었지만……. 그리고 저는 그 일에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품고 있습니다.”
현자가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제가 조금만 더 잘했다면, 성황께서 그런 말로를 맞이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럼 신성 제국이 이렇게 변질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하께서 다른 두 황자 전하와 이토록 치열하게 싸울 필요 없이 성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
성황이 잘못된 것은 현자의 탓이 아니다. 조금의 영향이 있었을지언정, 현자가 바꿀 수 있었을지언정, 그걸 현자의 탓으로 돌리는 건 본질에서 눈을 돌리고 작은 걸 탓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도 현자와 같은 입장에 있어 봤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골든 타임을 넘긴 환자를 살려보겠다고 별짓을 다 했음에도, 결국엔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꼴에 자존심이라고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병원의 불이 전부 꺼진 뒤에야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펑펑 울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마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건 더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현자도 딱 그런 마음가짐이겠지. 그러니 내가 현자에게 건네는 어떤 위로도 그에게는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미 주변에서 많이 들었을 말이겠고.
대신 나는 다른 맥락의 말을 꺼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 덕분에 내가 더 빛날 수 있잖아.”
“……예?”
“아버지께서 정말 빛나는 신성 제국을 이룩하셨다면 내가 할 게 뭐가 있었겠냐고. 영웅도 난세에나 나는 법이고. 그런 점에서 보면 나도 참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해.”
현자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반쯤은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말이다.
당연히, 애초에 모두가 고통받지 않는 신성 제국이 유지되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런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현자가 나를 돕고 있잖아.”
“……사실 저는 세상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전하를 포함해 그 누구도 돕지 않으려 했습니다.”
“뭐 때문이지?”
대답을 알 것 같았지만 건넨 물음이었다.
“그 역시 죄책감 때문이겠지요. 거기에, 이미 앞서 큰 실수를 저질렀던 지라 또 다시 제 손에 의해 정의롭지 못한 성황이 탄생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뭔진 알 것 같네.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
“……예?”
현자는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보기엔 내가 완벽한 사람처럼만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나마 내가 완벽한 ‘척’을 할 수 있었던 건 이번이 인생 2회차인 덕분이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것이겠지만, 처음 사는 인생은 참 쉽지가 않았다.
내 손을 거쳤다가 세상을 떠나간 환자들. 그들과 같은 증상을 보인 환자들을 치료할 때면,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들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랐다. 그 환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닌데. 이번에는 살릴 수 있는 환자인데.
모든 걸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나마 몇 번의 성공을 경험하고 나서야 천천히 해결된 부분이었다.
“그래서, 현자가 나를 돕기로 결심한 계기는 뭔데?”
“그런 건 딱히 없습니다.”
“……?”
“단순히, 어리셨던 전하의 교육을 맡았었고 전하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전하가 성황의 자리에 오르시기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한 현자가 피식 웃었다. 재밌는 무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보니 이미 제가 전하를 돕고 있더군요. 단순히 가정 교사의 수준을 넘어서, 성황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하를 돕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제가 당신을 돕도록 만드신 거라 보는 게 맞겠지요.”
궤변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자의 궤변은 점차 정론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전하를 위해 더 할 것이 없습니다.”
현자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미 전하께서는 제가 도울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상회하셨으며, 5성의 고리를 다루는 것과 성배로 다섯 번째 고리를 활용하는 것은…… 스스로 해내셔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우려도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늘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조금은 부담감이 생기면서도, 자신감도 함께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 * *
이후로 한참 동안 다섯 번째 고리를 채워가는 과정을 거쳤다.
이전에 비해 성력의 총량은 약 두 배 가량 늘었으며, 그를 통해 더욱 많은 양의 성력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고리가 지닌 성력을 다루는 건 아직 미숙해서 조금 더 수련이 필요했다.
고리에 성력을 채우고, 그 성력을 모두 진탕시키고. 때때로 성배에 모든 성력을 쏟아부어도 보고.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는 동안, 대외적인 일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루시퍼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들을 서쪽 섬에 주둔시키고, 주변국들에도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언제든 나서 도울 수 있도록.
“……모르겠다, 정말.”
한낱 의사로 살았을 뿐인 내가 이런 일을 책임져도 되는 걸까.
괜히 하늘을 쏘아보았다.
나를 이 세상에 불러낸 신이라는 작자에게 묻고 싶었다. 왜 하필이면 나냐고.
그저 이 일을 맡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없을 뿐이었다.
나로 인해 모두가 죽게 될 운명에 처할 수 있다. 환자 한 명을 떠나보낼 때도 막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나라면 죽고 나서도 뼈에 사무치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봐야겠지.
그리고 얼마 전 어쩌면 큰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황궁을 포함하여 수도 인근의 주요 시설들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하여 간신히 얻어낸 고서 하나가 내 손으로 들어왔다. 루시퍼의 부활에 대해 다룬 서적이었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여타의 서적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책을 들고 온 이도 입맛을 다시며 그리 말했다.
「현자 글라우드께선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니.」
그런데, 못 보던 이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루시퍼에게 대항하는 데 있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적혀 있었으나, 세세한 내용들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글라우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내겐 무엇보다 큰 정보였다.
그에게 직접 들어보면 그만이었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