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유단의 국왕에게서 받았던 환향의 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을 불러낼 수 있는 성물이며, 이미 성웅이라 불리었던 콜마르 유단을 불러낸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현자 글라우드를 불러내어 그에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환향의 관이 성력을 거부합니다.] [세기의 현자, 글라우드가 부름에 답하지 않습니다.]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되는 바가 업지는 않았지만 명확한 답을 찾아낼 순 없었다.
글라우드 외에도 당시 루시퍼와 맞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영웅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을 불러내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우선 루시퍼의 부활이 언제가 될 지 몰랐기에 성력을 최대한 보존해 둘 필요가 있던 데다가, 실제로 영웅들을 불러내는 건 루시퍼를 맞닥뜨렸을 때를 위해 아껴두어야만 했다.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밖에 불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영웅을 불러내야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인데, 루시퍼와의 전쟁이 그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쩝.”
그럼에도 세기의 현자라고 불리는 이라면 루시퍼를 맞닥뜨렸을 때보다, 그를 위한 대비를 할 때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시도를 했지만, 불발로 끝난 것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병력들을 대비시키고, 섬 인근에 있는 주민들에게 언제든 대피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두는 일 등.
그 외에도 성력을 미리 최대한 끌어모으는 일은 내가 스스로 해둬야 하는 일이었다.
며칠 정도면 다섯 개의 고리뿐만 아니라, 성배까지 성력이 가득 차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때마다 조금씩 성력을 일부러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일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아직 한계치에 도달하지 않은 다섯 번째 고리가 조금씩 확장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고리를 완전히 비우고 처음부터 끌어모은다면 그 성장은 더욱 뚜렷해지겠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루시퍼의 재림을 대비해 그렇게 무방비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니까.
매일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불안함을 끼고 살아야만 했지만, 누구의 앞에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 이미 병사들에게 있어서 나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고, 내가 불안해할수록 모두의 사기가 떨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뭣도 없는 놈이 폼은 혼자 다 잡고 있단 소리였다. 꼭 전생의 나처럼.
꼴에 집도의라고, 자신 없는 수술대 위에서도 결코 내 심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진짜 골때리네.”
사람을 살린다는 작은 틀 안에서 보면 참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큰 틀로 보자면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외에는 접점이 조금도 없었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순간 순간, 전생의 내가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참 많았다. 그건 그만큼 내가 전생의 나를 그리워해서 느끼는 착각일까, 아니면 정말로 비슷한 운명을 지닌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전생의 내가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지, 내가 그리워할 만큼 의미 있는 놈이었을지.
그럴 일은 없지만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세계로 끌려온 것도 내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는데, 보답으로 다시 돌려보내줄 순 있잖아.
당연히 이 세계에서 막 태어난 순간이었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겠지.
이 불편한 옷도, 황족으로서의 허울뿐인 허례허식도, 느끼하다 못해 혀가 마비되는 듯한 음식들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먹던 식어 버린 김치찌개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아, 원래 찌개는 재탕이 더 맛있긴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단순히 볼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도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버렸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겼다.
“관두자.”
아주 의미 없는 고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할 고민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이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때였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장난이면 좋겠네.”
지구에 살 때도 그런 음모론들이 있었다.
지구는 한 생명체의 세포일 뿐이라느니, 우리는 작은 통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실험체라느니.
개인적으로는 믿지 않는 이론들이었지만, 이 세계는 차라리 신의 그런 장난일 뿐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세계가 멸망한다고 한들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을 테니까.
됐다. 집어치우자.
이런 실없는 생각들을 하는 건 그만큼 내 부담감이 커져만 간다는 소리였다.
* * *
나는 성력을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고는 트루드를 불러들였다.
“트루드.”
방금까지도 막 수련을 하다 온 것인지 그녀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씻고 오겠다는 걸 괜찮다고 억지로 불러왔더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확실한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머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습니다.”
트루드는 내가 왜 그녀를 불러들였는지 알고 있다는 듯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루시퍼의 부활을 직감할 수 있는 건, 그와 일부의 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수련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것이고.
실제로 트루드는 짧은 시간 만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그녀의 노력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녀 안에 있는 루시퍼의 힘이 점점 방대해져 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악마의 힘뿐만 아니라, 그녀 안에 있는 성력 역시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세균과 항체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듯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악마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 그녀 안에 있는 성력 역시 함께 커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챈슬러 경에게 들은 바로는…… 거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기 직전이라고 하던데. 지금의 챈슬러 경보다도 한 수 위라고.”
“……과언입니다.”
트루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력에 있어 우위를 정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챈슬러가 그 정도로 말했다면, 트루드는 적어도 챈슬러와 호각을 다툴 정도는 된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트루드에게 챈슬러는 그녀의 영원한 우상인 것 때문인지, 그 사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챈슬러 경이 상대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과거의 트루드와 조금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니.”
트루드는 내가 항상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야 말할 것 없고, 그 나이대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기사이자, 모든 기사들이 탐내던 인재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원동력이 주어진 이후부터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더니, 그녀를 탐내던 모든 기사들까지 실력으로 뛰어넘어 버렸다.
“정말 날 지킬 수 있겠어?”
하지만 미안하게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 부분은 있었다. 트루드가 들으면 서운할 말인 걸 안다. 그럼에도 확실히 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
트루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안에 있는 루시퍼의 힘. 그게 이미 그녀를 잠식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힘을 억제하기 위해 최대한 사용을 자제시켰으며, 그녀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실제로 루시퍼의 힘을 활용하고도 어떻게든 제정신을 붙잡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루시퍼가 부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네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그게 네 의지대로 되진 않을 수도 있지.”
처음 그녀가 루시퍼의 힘에 잠식당했을 때도 그랬고. 악마가 재림하고 난다면, 그녀의 안에 있는 힘은 훨씬 더 커질 것이며 그게 그녀를 잡아먹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트루드는 정말 강력한 기사지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녀의 검에 우리 쪽이 베이게 된다면, 유리하던 전세도 확 뒤집힐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말하는 트루드의 얼굴은 확고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녀의 대답은 명확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 역시 그 존재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으니 확답을 내놓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트루드의 눈빛이 한순간에 침울해졌다.
“혹여나 그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즉시 자결하겠습니다.”
지나치게 파격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트루드다운 대답이었다.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예?”
트루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죄책감이라도 느껴지는 것인지 곧장 내 눈을 피했다.
“언제든 내 목숨을 지킬 준비가 돼 있다면서. 네 목숨을 네가 끊겠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것으로 생각하여…….”
“트루드.”
나는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만은 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무책임했던 건 트루드가 아니라 나겠지.
“내가 너를 믿는 만큼, 너도 나를 믿어줬으면 해.”
“……하지만 전하.”
“그래. 좀 웃기긴 한데, 네가 그 힘에 잠식당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야. 너는 할 만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봐야겠지.”
트루드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설령 그렇다고 한들, 해결책이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신이라는 작자가 인간들에게 그런 힘도 쥐여주지 않은 채로 시련을 준 걸까?”
생각해보면 모든 열쇠는 우리의 손 안에 있었다.
“인간은 그 어떤 종족보다도 사회적이고, 응집력이 강하지. 때때로 배신을 하지만, 배신이 두려워 더욱 똘똘 뭉치기도 하고. 특히나 신성 제국은 예전부터 신이라는 존재를 숭배하며 더욱 강하게 결집했어.”
“그게…….”
“그게 전부 신이 의도했던 거라면? 애초에 인간은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는 거라면?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결집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지.”
그리고 트루드가 해야 하는 역할이 있는 만큼 내가 해야만 하는 일도 있겠지.
“너는 싸우는 거야. 어찌 되었든. 설령 그 힘에 잡아먹힌다면, 그게 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주면 되겠지. 그 누군가는 지금 네 앞에 있고.”
상부상조와 분업.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간의 전통이었고, 나는 애써 그걸 신과 함께 묶었다.
그래야 더욱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이 세계의 이치였으니까.
그리고 그래야 트루드는 정말로 나를 믿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정말로 트루드가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랬다. 이미 해결책은 내 손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