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79)
제179화
흑마법사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때를 기다리는 것.
이들은 정확한 시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에 맞서 싸울 인간들은 정확한 시기를 알지 못했다. 인간들은 언제든 대비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려 노력했으나,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분께서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외곽을 경계하던 인원들도 전부 전투에 투입될 거다. 그 틈을 노린다.”
모든 인원이 마군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할 때, 흑마법사들은 이동하는 병력들을 습격하고, 허술해진 경비를 뚫고 대악마 쪽으로 붙을 계획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할 필요까지는 사실 없었다. 대악마께서 부활하신다면 아무리 인간들이 똘똘 뭉친다고 한들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흑마법사들이 무언가라도 하기 위해 이토록 안간힘을 쓰는 이유.
“루시퍼께서 우리의 공로를 인정해 주실 것이다.”
뭐라도 할 말이 있어야만 했다.
일전에 루시퍼의 부활을 앞당기려다 실패했고, 힐데스하임 놈들에게 본거지를 빼앗겨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악마를 모시는 주제에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왔으니 그분께서도 마땅치 않을 게 분명했다.
“릭투스.”
흑마법사들의 수장은 한 남자를 불렀다. 흑마법사들의 무리에 합류한 지 가장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은 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하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물들어 버린 인간이었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아도 그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힐데스하임의 사제는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수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 어떤 다른 흑마법사들보다 강력한 자질을 보였다.
“네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번을 기회 삼아 그가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수장은 아직도 처음 릭투스라는 사제를 보았을 때가 생생했다.
생체 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 하필이면 거사를 치르고 있을 때, 놈을 보았다. 힐데스하임도 아닌 외딴곳에서 사제는 방황하고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다고 확신한 것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던 공허한 눈빛. 그건 결코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제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장은 그런 릭투스의 눈빛에서, 숨겨져 있는 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복수심과 원망감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성국을 향한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장은 그를 흑마법의 길로 끌어들였다.
하얀 도화지를 까맣게 물들이는 것. 자신들을 선한 인간이라 포장하는 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단지 그러한 이유들 때문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수확이 들어왔다.
사제로서 억눌려져 있던 무언가가 폭발하듯, 릭투스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했다. 사제로서의 위치가 어떤지는 몰라도, 흑마법사로서의 재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진정한 너의 신께서 도래하실 날이 머지않았다.”
지금은 온전한 흑마법사로서의 릭투스만이 남아 있었다. 릭투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빛엔 묘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흑마법사들은 그를 믿지 않는 듯싶었다.
릭투스가 가장 먼저 자리를 뜨고 나자, 남은 흑마법사들이 수장을 향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대장님.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성력의 고리를 남겨두고 그 위에 흑마력을 얹어두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뒤통수를 칠지도 모릅니다.”
“……저게 연기로 보이나?”
수장은 돌아가는 릭투스의 뒷모습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방금까지 수장을 바라보던 눈빛이 생생했다. 누구보다 흑마법사에 가까운, 흑마법사다운 얼굴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의심할지언정, 수장만큼은 그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사제라는 자들이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지라, 구태여 위험 요소를 남겨두실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맞는 말이죠. 머릿수 하나 준다고 해서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저놈이 지금 어떤 놈이냐는 건 뒤로 하고라도, 사제로 살았던 과거가 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오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무참히 찢어 죽이는 놈들이 구역질이라니. 피식 웃은 수장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이 두려운 건 저놈의 과거가 어땠느냐는 것보다도, 저놈만이 과거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 아닌가?”
수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흑마법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과거의 기억이 점차 지워지게 된다. 그 전에 어떤 인간이었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심지어 어쩌다 흑마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는가까지도.
릭투스 역시도 이제는 자신이 사제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에 남은 성력의 고리는 모두에게 다시금 그의 과거를 상기시켰다.
분명히 그게 배가 아픈 것도 있을 것이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너희들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고.”
수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잊혀지는 과거는 자꾸만 미련을 남긴다. 그게 뭐라고…….
하지만 결국 완전히 잊게 되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과거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듯,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릭투스가 자신의 과거의 흔적을 지니고 있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건 릭투스 본인뿐이겠지. 모든 걸 잊어도,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성력의 흔적이 계속해서 미련으로 남은 채 그를 괴롭힐 테니까.
“그리고 저놈은 우리에게 꼭 있어야만 하는 존재야.”
근본적으로, 수장이 릭투스를 데려왔고, 그의 심장에 성력의 존재를 남겨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흑마법사들에게는 큰 열쇠가 되어 줄 테니까.
“모든 걸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에 관하여 괜한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다.”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의 선택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릭투스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비밀이었다.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한 결정적인 비밀이었으니까.
릭투스는 흑마법사였지만 여전히 사제였다. 흑마법사들은 릭투스가 사제였던 과거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의 심장에 박혀 있는 성력은, 이따금씩 그에게 호통 치듯 번뜩 정신을 들게 했다.
그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가, 좌절감에 빠지며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까지 할 것은 아니었는데, 성국에 대한 반발심에 넘어서는 안 되는 산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신이시여.”
그리고 홀로 방으로 돌아온 릭투스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울음을 참았다. 혹여나 누군가 들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 이런 처지가 스스로 생각해도 가여울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흑마법사로, 모든 죄의식을 내려놓은 채 살아가고 싶었지만. 가슴 속의 성력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흑마법의 경지가 높아지면서, 성력은 미약해져만 가고 있었고. 사제로서 살아가는 시간은 드물어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흑마법사로 살아가야만 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릭투스는 결코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제로서 있는 지금,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의 비밀과 계획. 최근 들어 더욱 중요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고, 인간들이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제로서의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작당했다는 것 자체로,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만큼이나 필체도 휘청거렸다. 곧 넘어질 것 같은 글자들이 기록되고 있었지만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기회였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점점 정신이 까마득해져 가고 있었다. 릭투스는 얼른 책을 덮은 채, 아주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또 다른 자신이 찾아낼 수 없을 만큼 깊숙한 곳에.
화악.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릭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앉아서 졸았던가?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흑마법의 부작용 중 하나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몸이 점차 흑마법에 적응해 나가는 중인지, 그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릭투스는 침대에 눕기 전 팔에 선 하나를 새겨넣었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몸에 선을 새기는 것은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과거의 기억. 그에 대한 미련이 남긴 것 중 하나였다.
물론 그때가 그리운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거를 잊은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참 아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복수해야만 하는 대상조차 잊게 될 것 아닌가.
신성 제국의 몰락. 그걸 바라보며 진정한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몸에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된 지 며칠이 지났는지를 기록해 둔 선들은, 매개체가 되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었다.
“……쳇.”
릭투스는 문득 아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수장을 제외한 흑마법사들은 여전히 그를 고깝게 대하고 있었다.
밥맛인 놈들이지만, 힐데스하임에서 받아 왔던 대접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흑마법사들은 이런 거사가 아니라면 혼자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다보니, 이번 일만 넘기면 될 터였다.
똑똑.
막 침대에 누우려던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좀 걷지.”
흑마법사들의 수장이었다.
릭투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 나섰다.
* * *
줄지어진 별들을 바라보며 쭉 걷다 보니 수장을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과거의 기억들 중, 신기하게도 가장 생생한 기억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흑마법을 손에 얻기 전 기억 중 가장 최근이었으니 생생한 건 당연한 일인가. 그걸 감안하더라도 유별나기는 한데.
릭투스가 그런 실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릭투스가 조용히 아까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흑마법사들이 어째서 릭투스를 그리 대하는지.
뭐, 그런 이유 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 릭투스는 형식적으로나마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어째서 너를 그대로 두었냐는 것이야.”
수장이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든 흑마법사들이 의아해하던 부분이었다. 심지어 릭투스마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깔끔하게 성력을 제거하는 것이 나았을 터인데.
그에 대해 물어봐도 수장은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알려줄 때가 된 모양이었다.
“네가 열쇠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