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8)
제18화
헬무트 오베라스.
뭐,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드는 양반이었다. 잘 나가는 공작이라고 얼마나 유세를 떨던지.
그러면서도 제 몸은 아껴야겠는지 다친 곳도 없으면서 수시로 나를 찾아와 성력을 받아 갔다.
“그런 놈 좀 기다리라고 하고 사람 한 명 살린 게 잘못된 일이야?”
“분명 올바른 일을 하셨습니다.”
“근데 왜 다 나한테만 지랄들일까.”
현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평소처럼 언행을 조심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현자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솔직히 살리실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내상이 심각한 아이였으니까요.”
“운이 좋았지 뭐.”
그렇게 얼버무렸다.
분명 운도 따라줬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그 아이를 살려낼 수 없었을 거다.
직접 배를 열고 파열이 된 장기를 봉합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나 그럴 수 없었고, 한 번도 행해본 적 없는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신성력을 통한 내상의 치유.
온몸이 상처투성이라 당최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장 치명적이거나,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을 먼저 손봐야 했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하기로 한 곳은 대장이었다.
“그래. 정말 운이 좋았어.”
내 두 손을 바라봤다. 쭈글쭈글한 대장의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리고 장이 운동을 할 때마다 그 생동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직접 장기를 만지고 치유했던 전생의 기억이 정확히 겹쳐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록 전생에서처럼 두 눈으로 상처 부위를 확인할 수 없었으며, 의지대로 움직이는 두 손 대신 말 안 듣는 성력으로 치유해야만 했다.
그래도 손으로 전해져 오는 압력의 차이를 통해 출혈 부위를 찾아낼 수 있었고, 성력을 잘 컨트롤 해가며 열심히 재생시켰다.
“황자님이 직접 살려내셨고, 황자님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아이라는 건 바뀌지 않습니다.”
현자의 말 역시 맞았다.
내가 이 정도로 성력을 키워내지 않았다면.
전생의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기사의 말대로 살릴 수 없는 환자라 지레짐작하고 포기해 버렸다면.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둔 꼴이 되었을 것이며, 나는 그에 대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뻔뻔하게 살아갔겠지.
그래서,
“나는 후회 안 해.”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덕분에 이론뿐이었던 내상의 치유가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후로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니 이 경험 자체가 내겐 막대한 자산인 거다.
“……허나 전하.”
파우스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어른으로서, 어린아이인 내게 썩어 빠진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유감스러운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현자가 결국 옅게 웃어 보였다.
“잘하셨습니다.”
저렇게 씁쓸해 보이는 웃음은 또 처음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뭐 어쩌겠습니까. 오베라스 공작의 일은 제가 손을 써 보겠으니 전하께서는…….”
“아냐.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나 본데. 나 역시 생각이 있었다.
똑똑.
“전하. 성황 폐하께서 긴급히 호출하셨습니다.”
때마침 도달한 전령이 아버지의 뜻을 전해왔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한 현자의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당사자인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갔다 올게.”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기사 한 명을 붙잡았다.
“지금 하는 거 있어? 있어도 급한 거 아니면 마을 좀 갔다 와라.”
* * *
“3황자가 사고를 쳤다고?”
주교는 성황 겔리두스의 성격을 알기에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허나 막상 성황이 보인 반응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별일이네. 데미안 그놈이 사고도 칠 줄 알고 말이야. 재밌군 그래.”
“예?”
“그렇잖나. 주교 자네는 데미안이 사고를 친 걸 본 적이 있는가?”
“어,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점잖게만 지내 오신 분이라.”
“그래. 위로 두 놈이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다닐 때, 막내 놈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성황의 얼굴에서는 분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워낙에 총명한 분이셨지요. 이번에도 가엾은 평민을 살리다 오베라스 공작 각하의 심기를 거스른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으나, 세상 물정을 모르셨던 게지요.”
“그래. 주교의 말대로 일방적으로 막내 놈의 잘못이라 밀어붙일 수만은 없는 일이지.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주교는 성황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원하는 대답이 있을 것이다.
‘성황 폐하께서는 3황자 전하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던 건가?’
허나 그것을 알아채는 건 쉽지가 않았다.
3황자는 2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성황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도 1황자와 2황자에게만 시키고 있었다.
명분이 없어 3황자를 직접적으로 내치지는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황궁에 데리고 있는 처지일 터인데.
‘용서하실 생각인 건가? 어째서?’
주교가 대답을 망설이던 중 어느새 3황자가 나타나 있었다.
주교를 바라보던 성황이 시선을 3황자에게로 옮겼다.
“오베라스 공작과 잡아둔 약속을 어기고 애먼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어느새 성황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 역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는 3황자를 시험하거나 혹은 벌을 내리기 위함이 분명했다.
“애먼 곳에 시간을 버리지도 않았고, 약속 시간에 고작 오 분 정도 늦었습니다.”
3황자는 무서운 기세를 보이는 성황을 상대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돌하게 받아쳤다.
주교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대답 하나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망설였거늘. 타고난 기백이 과연 성황 폐하의 핏줄임은 분명하구나.’
아주 잠깐이지만 성황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주교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3황자 전하께로 마음이 기우신 건가? 허나 타고난 성력 때문에 한계가 있으실 터인데.’
그건 어찌할 수 없었다. 신성 제국에서 2성의 군주가 탄생한다는 건 고위 사제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기를 쓰고 반대할 일이었다.
그게 설령 인품이 자자하고 머리가 비상하기로 유명한 3황자 데미안이라 하여도.
“오 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늦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보다 사사로운 일에 나서 중대한 일을 그르친 것은 변함이 없다.”
“중대한 일을 그르쳤다는 것이 권력 다툼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황자로 태어남에 있어 무엇보다 중대한 일은 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것이라 배웠고 그 말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허.”
성황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주교가 보건대 그건 분명히 감탄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주교 역시 황자의 말을 듣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성력을 갖고 태어나 저 철칙을 들었던 것이.
그리고 또 언제였을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배웠던 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결국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
비슷한 생각이 든 것인지 성황은 말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원칙에는 언제든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다. 네 일로 인해 오베라스 공작이 황가에 도전할 명분이 주어지고, 그로 인해 실제로 황실의 권위가 추락한다면 그는 국가적인 손실로 이어질 것이다. 황가를 비롯하여 신전 전체의 영향력이 약해지겠지. 그렇게 신전에서 살릴 수 있는 병자의 수가 줄어들게 될 터인데.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느냐?”
주교가 듣기에 그건 분명 억지가 담긴 소리였다.
아무리 오베라스가 힐데스하임의 권위 있는 공작가라고 한들, 고작 그런 일로 황가에 덤벼들지는 못할 터.
허나 그에 대한 반박이 결코 옳은 대답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짧았다고, 다음에는 더욱 더 깊게 생각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상황은 꽤 괜찮게 넘어갈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3황자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더욱 빳빳하게 들었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나, 혹여나 제가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다면 마땅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해 두었습니다.”
“각오라. 설령 클레이디크로 보낸다고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예?!”
자신도 모르게 되물은 것은 3황자가 아니라 옆에 있던 주교였다.
“폐, 폐하. 클레이디크로 보내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성황에게 발언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이어 3황자가 입을 열었다.
“예. 제가 클레이디크로 떠나겠습니다. 그러면 결코 오베라스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못하겠지요. 저야 2성으로 태어난 것부터가 황가의 위상을 떨어뜨릴 대로 떨어뜨렸으니, 클레이디크로 간다고 하여도 그 이상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고요.”
“……허면 네가 그렇게 벌을 받고 끝내겠다는 셈이냐? 그렇게 하면 무엇이 남느냐. 고작 죽을 뻔한 평민 한 명의 목숨?”
“그 어떤 목숨도 고작이라 할 수 없지요. 게다가 그를 살려내며 얻은 경험과 성취감은 평생 제게 남아 있을 겁니다.”
“아둔하군.”
“또한 저를 클레이디크로 보내는 대신, 그를 명분으로 오베라스에게 엄포를 해 두십시오.”
“그게 어찌 명분이 된단 말이냐.”
“황가의 핏줄이 클레이디크로 유배를 떠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지요. 그런 엄중한 형벌에 오베라스가 관여한 이상, 아버지께서 강하게 나가시면 오베라스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흐음.”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오베라스 공작가에 대한 견제까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위기 상황에 묘수를 떠올리는 것이 꼭 네 어미를 꼭 닮았군. 좋다. 클레이디크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알고 있을 터.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당장 오늘도 떠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뒤다. 기사 한 명과 병사 열 명, 그리고 추가로 따라가길 원하는 이들을 붙여주마.”
고개를 끄덕인 3황자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성황이 뭔가 떠오른 듯 다시 그를 붙잡았다.
“참. 기사에게 마을의 평민 한 명을 매질 하도록 시켰다지. 어째서 그랬느냐.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신전의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보느냐? 그런 부정한 폭력까지 사용해 가면서?”
“이번에 제가 살린 아이가 고작 다섯 살짜리였습니다. 그 어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비쩍 마른 상태였지요. 헌데 둘 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작자가 행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 생명이 죽을 뻔하기까지 했으니 다시 재발하는 일을 막고자 마땅한 벌을 내린 것이지요.”
“……네 나이가 몇인지 아느냐.”
“올해로 열여섯입니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군. 홀로 떨어져 있어도 잘 살겠어.”
성황의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위로 두 황자를 훈계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
“어찌 되었든 그건 잘한 일이 맞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허나 상은 이미 내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해할 거라 믿는다.”
주교는 성황이 무슨 상을 내렸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대체 뭐가 감사하시다는 거지?’
잠시 눈치를 보던 주교는 재빨리 황자의 뒤를 쫓아 나왔다.
“헉, 헉. 전하. 3황자 전하.”
“주교? 무슨 일이야.”
“성황 폐하께서도 전하의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풀리셨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클레이디크로 가겠다는 말을 철회하시옵고…….”
“아냐, 괜찮아.”
주교가 측은한 마음에 계속해서 3황자를 설득했으나 3황자는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어서 건데 뭘.”
둘러대는 말인 줄 알고 측은함이 더욱 몰려들었으나, 3황자의 표정은 정말이지 신이 난 듯 보였다.
수많은 사제들의 유배지이자 발칸 제국과 맞닿은 중립 지역 클레이디크.
……어쩌면 수도에서 수없이 견제를 받는 것보다 그곳에서 입지를 키워나가는 것이 낫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주교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결코 만만치 않으실 텐데.”
신성 제국의 사제들이 성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동안, 발칸 제국의 야만인들이 요상한 잡기로 사람을 죽여간다는 곳.
“그 잡기의 이름이 의술이랬던가…….”
아무튼 그런 곳이 기회의 땅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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