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86)
제186화
서쪽 섬에는 많은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힐데스하임의 성기사와 사제들을 제외하더라도, 왕국과 발칸 제국에서 지원한 소수의 병사들. 그리고 오우거들과 베이언의 기사들까지.
그리고 이들의 총괄을 맡은 건 베이언에서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챈슬러였다.
“……성국의 실권은 3황자께서 완전히 거머쥐신 모양이군.”
성국 외의 출신들이 모인 곳에서 성국에 대해 나누는 대화들은 결코 좋은 뉘앙스가 아니었다. 사실 완전히 드러내진 않았지만 다들 속으로는 어느 정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먹고 씻지도 못하는 외딴 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이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다 못해 서로에게 그걸 드러낼 정도가 되었다.
“솔직히 뭐 하는지 모르겠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버림받은 황자니 뭐니 하던 사람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 사람 밑에 있는 기사가 우리를 통솔한다는 것도 그렇고.”
챈슬러.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에 내뱉는 말들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눈에는 모든 게 결코 달갑지가 않았다. 변방에서 단장 노릇이나 하던 촌뜨기 기사가, 자신들을 이끈다니.
“일이 나기는 무슨 일이 난다고 호들갑인지……. 그리고 애초에 성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우리까지 나서는 게 맞는…….”
“듣기 참 불편하네.”
그리고 막사 앞을 지나가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신성 제국의 성기사가 끼어들었다.
화들짝 놀란 왕국의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 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제복 위, 견장에 성국 직속 기사의 상징이 달려 있었다.
“그렇게 불만이면 그대들의 상관에게 따졌어야 할 문제 아닌가?”
“……미안하오.”
신성 제국이 아무리 예전과 같은 위상이 아니라고 한들, 독립 왕국에서 가벼히 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발칸 제국이 신성 제국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지만 고개를 숙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신성 제국민들은 지독하리만치 정당성을 따지는 자들이었다. 앞에 있는 기사를 자신의 논리로 설득시킨다면, 불이 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허나 우리는 늘 신성 제국을 존중해 왔소. 우리는 힐데스하임을 모시는 신도는 아니나, 그대들의 신을 가벼이 본 적이 없단 말이오. 우리가 그대들을 존중하는 만큼, 그대들 역시 우리를 존중해야 마땅한 일 아니오?”
그렇게 나선 기사를, 주변의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입을 틀어막고 성국의 기사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국의 기사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떻게 존중해 주길 바라오? 그대들을 괄시한 게 있다면 말씀해 보시오.”
“괄시라고 하기는 뭐하나, 우리는 당신들의 신이 어떤 말씀을 하셨든 상관이 없소. 그분의 뜻을 위해 어찌 우리까지 나서야 한단 말이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개소리라고 일축해 버리고 싶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서쪽 섬에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로 개고생을 해 왔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렇게 과격하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일개 기사로서, 황자가 내린 명령을 바꾸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이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막말로 우리에겐 신의 뜻이라는 게 마냥 허황된 소리일 뿐이오. 그렇다고 우리가 당신네들 앞에서 신을 무시한 적이 있었…….”
“허황된 소리?”
그리고 잠자코 듣고 있던 성기사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에 왕국의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왕국의 기사들은 기본적인 교양도 갖추지 않는 모양이군. 신의 뜻은, 늘 성국에 국한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소. 각국에 닥친 위기를 점지해 주었고, 성국은 모른 체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소.”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국에서는, 제국이 주인공이 된 역사를 전파하길 꺼려했으니까. 하지만 성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큰 말실수를 한 것이었다.
성기사의 말의 진위를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성 제국이 역사적으로 여러 왕국들의 중재자 역할을 해 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렇게 된 데는 성기사의 말대로 신의 뜻이 인간의 평화를 가리키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소.”
무엇보다 성기사가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터. 왕국의 기사들은 일제히 성기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에게 남은 불만들이 있었다.
이들의 고충이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헌데…… 우리가 성국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전혀 관여할 바가 아니나, 그렇다고 한들 3황자께서 사령관으로 임명하신 분의 재량이 적절한지는 여전히 의문이오.”
챈슬러라는 기사. 그는 다른 기사들을 훈련시키기만 할 뿐, 스스로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왕국에도 종종 보이는 유형이었다. 권위는 있으나 실력은 없는, 빈 껍데기 같은 기사. 그에 대한 반감은 앞에 있는 성기사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베이언의 기사들은 다소 실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성국 직속의 기사들은 하나 같이 괴물 같은 실력을 뽐내는 자들이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기사 같지도 않은 기사들을 멸시하는 건 분명히 같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재량? 지금 그분을 의심하는 것이오? 그대들이 말하는 재량이 어떤 것이길래.”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우선 뱉은 말은 끝까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로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이토록 많은 인원을 통솔할 만한 지도력이 있으신 지도 잘 모르겠소. 또한…….”
“무지한 건 죄가 아니나, 그 무지를 남에게 자랑하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성기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해져 있었다.
“그대들이 나와 대련을 한다 치면 이길 수 있겠소?”
왕국의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궁 직속의 기사들은, 왕국에서는 찾아보기 드물 정도의 인재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발칸 제국의 정예 기사들 정도가 와야 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발칸의 기사들은 결코 정예라 볼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사실상 저들이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봐야만 했다.
“기사로서 검을 대 보지도 않고 승패를 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나, 솔직히 자신은 없소.”
그리고 왕국의 기사는 자존심이 허락하는 안에서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챈슬러 경은 과거 우리를 이끌던 단장이셨소. 누구보다 대담하고, 누구보다 용맹하며, 누구보다 지혜로우셨지.”
그렇게 말하는 성기사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비록 누명을 뒤집어쓰신 탓에 경질되셨으나, 가히 비할 바 없는 최고의 기사시다. 나 같은 놈 열 명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되겠지.”
성기사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 말을 들은 왕국의 기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기상! 모두 무장하고 마물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라!”
“마물들이 침공하고 있다. 당황하지 마! 모두 미리 갖춰둔 대형으로 이동해!”
까마득한 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해 지기까지 한 서쪽 섬에서 소란이 일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들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재빠르게 무장했다.
밖으로 빠져나와 상황을 살핀 이들은, 아직까지 마물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허나, 평소와는 달리 훨씬 더 많은 차원에서, 셀 수도 없는 수의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미 이 땅 전체가 마물로 뒤덮였으리라.
횃불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새까만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둘 덮쳐오기 시작했다.
서쪽 섬은 원래부터 마물이 출몰하는 지역이었고, 이미 한 달간 마물의 공포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채라 큰 혼란이 일지는 않았다.
휘익.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러 마물의 형체를 갈라내었다. 검에 도포되어 있는 사제들의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수월하지도 않았으리라.
새삼 놀라웠다. 사제들의 힘은 일반 마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아마도 신성력이라는 것 자체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지라 더욱 그렇게 느낄 지도 몰랐지만, 마물을 상대하는 데 있어 신성력은 기적과도 같은 힘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파스스.
사제들은 신성력으로 마물들을 녹여내는 동안 성기사들은 커다란 신성력으로 덮인 검을 휘두르며 마물을 종잇장처럼 갈라내었다.
우오오오오!
마물들이 비명을 질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듣기 싫은 소리였다. 오금이 절로 저려 왔다.
하지만 확실히 이번에 나타나는 마물들은, 그간 상대해 왔던 놈들과 달랐다. 막 구겨 놓은 것 같은 형체가 두 배는 더욱 컸으며, 신성력으로 잘라내어도 스스로 회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마물의 수가, 줄어드는 수보다 더욱 많았다.
“제, 젠장.”
모두가 점점 당황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사제와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라면 해법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한 듯.
그런 사제들의 반응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점점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으…… 으으…….”
얼마 전 마물에게 영기가 전부 빨려, 해골 같은 몰골이 되어 버린 동료 기사가 떠오른 나머지 한 기사가 검을 놓아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좌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손을 치우고 고개를 올리자, 하늘에서 커다란 마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악!”
도망칠 의지조차 잃어버린 채로,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는 듯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물은 공격하지 않았다. 분명 앞에는 커다란 인기척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이상함을 느낀 기사가 손을 치우고 실눈으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라.”
마물에 커다란 선이 하나 그려지고, 갈라진 마물의 형체 사이로 새하얀 빛이 발산했다.
신성하다. 정말로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파스스.
마물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물 뒤에 서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사령관을 맡은 챈슬러라는 성기사였다.
그는 안쓰러운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더니 몸을 틀었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정신 차려! 버티면, 버티면 황자 전하께서 구하러 오실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챈슬러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챈슬러를 구하러 오는 게 황자라니.
대체 그가 어떤 존재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