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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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성국의 실질적인 성황 대행 역할을 하고 있다 알려진 3황자. 그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몸을 억압하는 것 같던 흑마력의 기운이 사그라들고, 포근한 감촉이 모두에게 다가왔다. 자연스레, 그 힘의 발원자인 3황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3황자와, 그가 이끌고 온 성국의 기사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3황자를 보면서 마음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황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뒤에 있던 여기사가 마물을 향해 달려나갔다.
사악.
그녀의 새하얀 검이 마물을 베어내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랬듯 마물은 다시금 재생되려 했지만, 신기하게도 마물을 완전히 소멸시킨 건 성력이 아니었다.
여기사의 검에서 타오르던 새하얀 오러가, 순간적으로 검붉은 기운으로 바뀌며 마물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마물들은 꼭 강자 앞에 무릎 꿇듯 자연스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그녀의 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새하얀 오러를 발산하고 있었다.
여기사 뿐만 아니라, 3황자가 이끌고 온 성기사와 사제들이 일제히 마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웬만큼 강한 성력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소멸되지 않던 마물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황자가 이끌고 온 사제와 성기사들의 재량이 상상 이상인 줄 알았으나, 뒤늦게서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검에서 타오르는 성력. 그건 그들이 보유한 성력이 아닌, 3황자가 하사한 은총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화르륵.
3황자의 성력은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마물들을 상대하며 기세가 꺾여버린 이들도, 자신에게 전해지는 성력이 수 배는 강해졌음을 깨닫곤 의지를 되찾았다.
“다 죽여버려!”
“우와아아아!”
“악을 베어 넘겨라! 승리는 힐데스하임의 뜻이니!”
* * *
물밀듯이 들이닥치던 마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3황자, 그 한 명의 등장이 이토록 두드러진 변화를 만들어 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걱, 서걱.
“이거, 죽이는구만!”
“나도 힐데스하임에서 태어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3황자는 사제들의 신성력을 한 데 모아, 더 많은 성력으로 증폭시키며 모두의 힘을 강화했다. 몸도 마음도, 성력을 통해 강해진 병력들은 마물을 훨씬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둘째치더라도, 성국의 병력들은 3황자라는 정신적 지주가 될만한 존재의 등장으로 큰 사기를 얻었다.
“……전하께서 직접 나타나실 줄이야.”
“이 위험한 곳에 어찌 직접…….”
말은 그렇게 해도 모두가 3황자의 등장에 퍽 감동하고 있었다.
“역시 신께서 우릴 버리지 않으셨군.”
“전하로 하여금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키려 하신 게야.”
성국의 병력들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무엇보다 더욱 큰 힘이 되었고, 그 밉음은 성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큰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챈슬러만큼이나 강한 존재감을 뽐내며 전장을 날뛰는 여기사는 순전히 무력만으로 이 상황을 뒤집어엎는 중이었다.
카앙, 캉!
막대한 신성력과, 재빠른 몸놀림, 섬세한 검술 실력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여기사는, 모르는 이들조차 황자가 아낄 만한 기사라고 유추하기에 충분했다.
“……전하께선 뭐라시던가. 별 일은 없으신가?”
그리고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마물을 헤집고 트루드에게 다가가 물은 것은 챈슬러였다.
그들은 여전히 시선은 마물에 고정하고, 검을 휘두르는 채로 대화를 나눴다.
“힐데스하임을 포함하여 전 대륙에서도 마물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만만치 않아, 각국의 지원 병력의 규모가 생각보다 적을 듯합니다. 성국 역시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니…… 이곳의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셨습니다.”
“……그렇군.”
3황자가 그렇게 판단했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그의 결정에는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챈슬러는 슬쩍 고개를 돌려 3황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존재가 있었다.
“현자께선 어째서 함께 오셨는가.”
현자에겐 서운한 소리일 지 몰라도, 전장 속에서 현자가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었다. 예전 겔리두스가 황자일 때라면 몰라도, 성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지금의 현자는 전장 속에서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다.
“……전하의 판단이신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아버지께서 참전하시는 것을 만류하셨으나, 아버지께서 고집을 피우셨습니다.”
트루드는 그런 현자의 선택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한 눈치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이가 들 대로 든 아버지가 이 위험한 곳에 오겠다는 건 자식 된 입장에서 달가울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챈슬러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현자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가 아는 현자는 괜한 고집을 부릴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 테지만…….
“전하께서는 반대하셨다라…… 어떤 분의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가 궁금하군.”
챈슬러가 보았을 때는 현자만큼이나 현명한 사람이 3황자였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늘 옳은 선택을 하여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3황자와 현자. 그 둘의 선택은 지금까지 갈린 적이 없었고, 틀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갈렸다니, 과연 누가 옳은 것이었을지 아직까진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이곳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지만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니…….”
마물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챈슬러는 알고 있었다. 더 큰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마계와 연결된 차원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등장하는 마물의 위험도 역시 따라서 올라가고 있었다.
챈슬러는 다시금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겔리두스가 기적을 만들어 냈던 그때와 같은 비장함을 느끼며, 성력을 발산시켰다.
그의 검에서는, 과거와 같이 막대한 양의 성력이 피어올랐다.
화아아악!
가로로 길게 그어낸 검을 따라, 신성력이 비행하며 마물들을 갈라내었다.
챈슬러는 잠시 옆을 바라보았다.
전장을 날아다니는 듯한 트루드의 몸놀림이 눈에 띄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챈슬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저 정도라니.”
지금의 챈슬러에는 못 미치지만, 트루드의 기사 경력을 보았을 때 앞으로도 발전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난다면 챈슬러를 뛰어넘는 건 시간 문제처럼만 보였다.
3황자도, 트루드도. 여전히 계속 성장중이었으며, 과거 겔리두스 성황과 챈슬러가 기적을 만들어 냈던 때와 비교하면 이 둘은 훨씬 더 수준이 높았다.
“시대가 바뀌긴 했군.”
챈슬러는 뒤바뀌게 될 신성 제국의 모습에 대해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도 했다. 3황자 역시 겔리두스처럼 변절하게 될 것에 대해. 하지만 금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과거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 있는 자를 의심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성 제국의 황자이며, 그의 충실한 기사이지 않는가.
챈슬러는 불길한 생각 따위는 집어던지고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기로 했다.
3황자가 성황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과도기. 그 과정을 잘 넘겨드리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그 이후의 문제는 3황자와 트루드가 알아서 잘 해결할 문제였다.
* * *
“……크윽.”
“이쪽으로 좀 붙어!”
마물의 수가 줄어들면서 상황이 썩 좋아지는 듯 했으나, 그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등장하는 마물이 훨씬 더 강해지면서, 마물 하나에 기사가 둘씩 붙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했고, 게다가 아무리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는다고 한들 육체의 피로를 온전히 씻겨주지는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상황에서, 마물의 위력이 강해져 간다는 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진 5개의 고리와, 성배, 그리고 모든 사제들의 성력을 끌어모아 최대한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 했음에도 쉽지가 않았다.
내가 성력으로 직접 마물을 제거하는 건 효율이 좋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성력을 전달하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은 성력이 소모되었고, 장기전으로 가게 된다면 금세 성력은 바닥이 날 것이 분명했다.
“…….”
모두가 분전하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며, 고민이 들었다. 최선의 판단이 무엇일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내 옆에 있는 현자 역시 마땅한 답을 모르는 것인지 뭐라 조언을 해 주지는 않았다.
유단의 국왕에게서 받은 환향의 관. 그 권능을 통해, 과거 세계를 구원했던 성웅 중 한 명을 불러낼 수 있었으나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워낙 많은 신성력을 소모하는 탓에 리스크가 컸고, 지금 아직 대악마가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우웅.
“……!”
썩 좋지 않은 균형이 유지되는 도중, 누군가 가슴팍을 망치로 때린 듯한 울렁거림이 전해졌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회전하던 고리가 억압을 받는 것처럼 답답해짐과 동시에, 엄청난 존재감이 차원 너머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얼어붙어 있었다.
마물과 싸우던 성기사도, 그들을 지원하던 마법사와 사제들도,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혀 대던 마물들도.
저만치 열려 있는 새까만 차원이 크게 일렁거렸다. 지금껏 보았던 것 중 가장 큰 비틀림이었다.
그 차원을 뚫고 누군가 나타나고 있었다.
「모습은 비록 왜소했으나,」
다른 고위 마물들에 비해 덩치가 크지는 않았고,
「눈은 살기 어린 안광을 내뿜으며,」
새빨간 그의 눈은 모두에게 살기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머리 위에 달린 세 개의 뿔은 세 군단의 마물을 합친 것보다 큰 위세를 뽐냈고,」
세 개의 뿔. 그곳에서 막대한 악마의 힘이 전해지고 있었고,
「그를 마주한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심적으로 그에게 굴복했기 때문이리라.」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얼어붙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악마 루시퍼.
그의 모습은 역사서에 서술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역사서에 적힌 게 전부 다 거짓은 아니었네.”
그를 본 순간, 나 역시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위안이 드는 점이라면,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듯 보였다.
모두가 그를 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사제와 성기사를 상대하던 마물들이, 루시퍼가 등장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그는 시시하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소름 돋게도, 그 시선이 내게 향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루시퍼의 시선이 정확히 내게 꽂혔다.
이윽고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