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88)
제188화
쿠웅.
압도적인 존재감을 선사하는 마물. 그것이 대악마 루시퍼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재림할 거라는 사실은 3황자 덕에 귀가 닳도록 들었으나, 정작 정말로 그를 마주하자 아무런 실감이 나질 않았다.
쿠웅, 쿠웅.
덩치가 크지도 않고, 위협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소년의 모습에, 머리에 뿔이 달리고 어깨에 날개가 달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가 한 걸음씩 걸어나갈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듯, 가슴으로 큰 울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마저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흑마법사가 말한 대로, 대악마도 결국엔 이들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루시퍼가 향하고 있는 곳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서 모두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악마에게 완전히 마음이 꺾여 버린 모습이라니.
“……!”
루시퍼는 3황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3황자라면. 모든 것을 알고, 모두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던 그라면 루시퍼를 상대할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대가.”
3황자 앞에 멈춰 선 루시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에 속삭이듯 똑똑히 들려왔다.
“그대가 힐데스하임이 선택한 자로군.”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3황자는 태연한 얼굴로 루시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 사도들에게 모든 걸 들었을 텐데. 마음이 바뀌지 않았나? 그대들의 신이 그대들을 속이고,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건가?”
“……글쎄.”
3황자는 루시퍼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사도라면 흑마법사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놈들한테 들은 건 전부 다 개소리던데 말이야.”
“재밌군.”
그 순간 루시퍼의 기운이 수 배로 더욱 강해졌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자들도 더이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만이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고, 그중에는 3황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토록 어리석은 모습이라니. 정말로 그대들의 신을 믿는 건가?”
신이란 뭘까. 힐데스하임과 루시퍼의 차이가 뭘까.
루시퍼를 앞에 둔 순간 모두가 그런 고민이 들 정도로, 루시퍼에게서는 강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루시퍼 역시 신과 같은 존재처럼만 보였다.
그런 루시퍼를 앞에 두고도 3황자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그다지.”
“……뭐?”
“그다지 신을 그렇게 믿은 적은 없어. 나는 늘 나를 믿었지. 믿음을 가지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게 잘 안 되더라고.”
루시퍼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3황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그러면서 힐데스하임의 사제로, 그의 힘을 계승하고 있는 거지?”
“알 게 뭐야.”
“……푸하하하하.”
잠시 멍하니 서서 3황자를 바라보던 루시퍼가 폭소를 터뜨렸다. 배를 잡고 웃어대던 그가 일순간 웃음을 멈춘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재밌는 놈이군. 마음 같아선 내 뜻을 따르게 하고 싶지만, 그럴 생각은 없겠지?”
“절대.”
3황자의 대답에 루시퍼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렇군. 내 사도가 될 생각이 없다면 아쉬울 따름이야.”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3황자가 아닌 그의 옆에 있던 여기사 트루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사도여.”
“……!”
루시퍼가 트루드에게 한 말을 들은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대악마가 어째서 힐데스하임의 성기사에게, 자신의 사도라 칭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대가 믿고 의지하던 인간이, 여생까지 그대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닌가?”
3황자와 트루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지금 상황을 차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루드는 루시퍼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성검을 손에 넣으며 얻었던 대악마의 힘. 자의에 의해 얻었던 힘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 힘을 몇 번이나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 자위하고 있었지만, 늘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고고한 힐데스하임의 신도로서, 악마의 힘을 손에 얻었다고 한들 그것을 사용하다니. 그리고 그 힘에 먹힐 뻔한 전적도 있었기에……. 만약 3황자가 그녀를 이해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응? 그렇지 않느냐 물었다.”
트루드는 루시퍼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었다. 루시퍼라는 존재를 막상 눈앞에서 목도하자, 그의 존재가 너무도 커 보였다.
3황자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인간들의 힘만으로 루시퍼를 상대할 수 있을지… 3황자에게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인지……. 불안함이 차올랐고.
동시에 그녀의 가슴에 있는 악마의 힘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 힘을 직접적으로 사용했던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만약 악마의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더라면. 그에 조금이나마 적응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과거에 겪었던 것처럼 그녀는 악마의 힘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3황자에게로 향했겠지. 모두가 바라보는 이 순간. 가장 치욕적인 장면이 될 것이었다.
“검을 들어라, 나의 기사여.”
그런 트루드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퍼는 계속해서 트루드에게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걸 듣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이, 트루드가 루시퍼의 사도라는 걸 듣고 있었다.
그런 루시퍼의 말대로 행할 수는 없었다. 결코…….
하지만 그런 트루드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높이 들린 그녀의 검에서는, 새하얀 성력과 더불어, 칠흑과도 같은 불길한 기운이 섞여서 잿빛을 만들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두 기운의 오러는, 아마도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증명하라. 그대의 주인이 누구인지. 신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루시퍼의 시선은 3황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트루드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음에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완전히 잠식되어 버렸다.
‘안 된다고!’
이럴 수는 없었다.
그녀를 진정한 기사로 바라봐 주었던 유일한 황족이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걷게 해 주었던 성인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챈슬러를 구원해 주었고, 성황에게 버림받았던 현자를 위로해 주었던 분이다. 트루드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했던 자들을 쓰다듬어 주었던…… 지금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된 것이 3황자였다.
“트루드.”
3황자는 그런 그녀를 작게 불렀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믿는다는 듯. 그러다 정말 잘못될 텐데. 차라리 지금 그녀를 처리하는 것이 그에게 안전한 길이니 그렇게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3황자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으며, 트루드의 검은 3황자를 향해 올려져 있었다.
“트루드! 정신 차려라! 기사로서 긍지와 사명감을 잊은 게냐!”
챈슬러와 현자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트루드 역시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게 정말 신의 뜻이란 말인가. 신이란 힐데스하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대악마도 해당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푸욱.
트루드의 검이 일자로 직진했다.
“……!”
하지만 3황자는 멀쩡했다. 그녀의 검이 향했던 건 3황자가 아닌, 트루드 자신이었다.
역수로 잡은 그녀의 검은 자신의 복부를 찔렀고. 상처 입은 복부에서는 마기 섞인 검붉은 피가 분출하고 있었다.
“트루드!”
3황자가 다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성력으로 치유를 했다. 악마의 힘이 잔뜩 섞인 탓에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었지만 과다 출혈로 죽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멍청한 것!”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선택이 심기를 거스른 것인지 루시퍼가 강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기운이 사방에 요동을 쳤다.
“인간들은 하나 같이 멍청하군. 그나마 쓸모 있는 자들을 다 죽여버린 게 너였지?”
루시퍼가 3황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쓸모 있는 자들이라면 흑마법사들을 말하는 건가? 결코 쓸모 있는 놈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내가 처리한 건 맞지.”
“이 버러지가!”
루시퍼가 가볍게 손을 내뻗자, 주변의 공기가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새까만 기운이 자연스레 그의 손으로 모여들며 구체를 형성시켰고, 흉험한 기세로 3황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3황자는 어느새 성력으로 방벽을 만들어 그 구체를 막아내었다.
루시퍼가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루시퍼의 공격을 인간이 막아내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잃어버렸던 사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3황자 전하를 지켜라!”
“마물의 수가 더 늘지는 않고 있다! 지금 나온 놈들만 처리하면 끝이라고!”
“전하를 엄호하고 마물의 수를 줄여나가. 정예는 루시퍼에게 붙는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제야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콰앙! 쾅!
루시퍼는 마기를 쏘아대며 사제와 성기사들을 상대해 나갔다. 정예들이 붙은 만큼 루시퍼 역시 다수를 상대하는 건 어려워 보였으나, 그러는 동안 일반 마물은 점차 수가 줄어갔다.
게다가 각국에서 보낸 추가 병력들이 도착하며, 상황은 확실히 반전이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루시퍼가 남았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아직까지 굵직굵직한 일부 고위 마물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이 있었다.
콰앙!
챈슬러는 가장 선두에서, 루시퍼와 직접 몸을 맞대며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다수의 성력이 자신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덕에 평소보다 수 배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간신히 루시퍼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보조하는 사제들이, 루시퍼의 마기를 맞고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훌륭한 기사군. 저 어리석은 여기사 대신 나의 사도가 될 생각은 없나?”
루시퍼의 같잖은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트루드는 부상을 입은 채로도 싸우려고 했지만, 루시퍼에게 붙는 것은 결코 3황자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까.
“힐데스하임. 그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믿고 따르는 거지?”
루시퍼의 질문. 그에 챈슬러는 짧게 대답을 내놓았다.
“힐데스하임이 아니다.”
“뭐?”
“이제는 사람을 믿는 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