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89)
제189화
“믿는다라. 그 믿음이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군.”
루시퍼가 챈슬러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꽤나 불쾌해 보이는 감정이 전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루시퍼에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예 기사들이 루시퍼를 상대하는 동안, 마물들은 다른 인간들에 의해 점차 제거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인간의 시체 역시 쌓여 가고 있었다.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마물이 줄어들고 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다행히도, 사기는 꺾이지 않았고 다들 마물을 상대하는 데 있어 점점 더 노련해졌다.
그런데 불길한 것은 루시퍼의 태연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든 마물이 제거되고, 루시퍼 역시 결국 인간 측의 병력 수를 감장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나…….
왜일까.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멍청한 인간들밖에 남지 않은 세상이, 유지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니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잊고 있었다.
많은 인간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흑마법의 기원이 되는 악마의 힘을 이 세상에 끌어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우오오오.
듣기 싫은 비명이 귓가에 소용돌이쳤다. 마음이 약한 자들은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거북한 소음이었다.
그러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시체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시체는 모두 루시퍼에게로 흡수되어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이미 그가 앗아가 버린 불쌍한 인간들. 루시퍼는 그들을 매개채로 사용할 양인 듯 보였다.
화아악.
역겨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희생된 이들의 시체마저 사라져버렸으니,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위로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눈앞에서 펼쳐지면서, 그런 걱정은 점차 사소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 전하.”
누군가 루시퍼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위험을 감지한 지는 오래였다.
루시퍼에게로 모든 기운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루시퍼보다 수 배는 더욱 강한 기운이 전해지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그는 더욱 강한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칫.”
그로 인해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에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챈슬러가 검을 움켜쥐고는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는 빠르게 그에게 성력을 전달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던 그가, 일순간 순간이동라도 한 것처럼 포착하기 힘든 속도로 움직였다.
콰앙!
그리고 어느새 마왕의 앞에 도달한 챈슬러가 높게 도약한 채로 검을 휘둘렀다.
활활.
모든 성력을 끌어 모은 그의 검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성력의 불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앙!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힘을 흡수하고 있는 루시퍼에게, 챈슬러의 검은 상처를 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의 검이 도달하지도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막 같은 것이 챈슬러의 검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채, 챈슬러 경!”
“괘, 괜찮으십니까?”
“크흐읍…….”
공중에 떠 있던 챈슬러의 몸을, 허공에서 나타난 수십 개의 촉수가 꿰뚫어 버렸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보였던 챈슬러였지만, 목숨을 잃을 수준으로 보이는 치명상을 입은 건 한순간이었다.
스멀스멀 좌절의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기가 꺾이고, 마왕에게 맞서 싸울 마음이 쪼그라드는. 그런 순간에도 마왕은 계속해서 힘을 흡수하고 있었다.
“챈슬러 경!”
그리고 그런 대세를 거부하듯, 트루드는 당장에라도 뛰쳐 나갈 것처럼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들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건, 그녀의 아버지이자 힐데스하임의 현자로 불리는 파우스트였다.
“아버지! 힐데스하임의 성기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해 주십시오.”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악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너는 성국의 성기사이기 전에 전하의 호위 기사다. 모두가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이고, 네가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는 없다.”
트루드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현자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가진 수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힘이 강해진 마왕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애초에 마물과 함께 루시퍼를 상대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병력이 모인 것이 패착이 아니었을까.
과거, 인간들이 루시퍼를 맞닥뜨렸을 때는, 소수의 병력만으로 그를 상대하면서 루시퍼가 강해질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문들이 들었고. 만약 정말로 그랬던 것이라면, 과거 그를 상대했던 성웅을 불러낸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뒤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전하. 환향의 관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뭐?”
환향의 관. 유단의 국왕에게서 건네받았던, 성웅을 불러내는 성물이었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쓸 생각이었고,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여겨지긴 했다.
고리가 고작 2개 남은 현자가 그걸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지만 현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겠지. 현자는 그런 사람이니까.
생각을 마친 나는 그런 현자를 향해 환향의 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 *
세상에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극소수의 선택받은 당사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 절대 누설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현자 파우스트.
그 역시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전생의 기억을 거머쥔 채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전생에서의 무지함을 자책했던 탓인지, 파우스트는 만사에 대해 고민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늘 사색에 잠겼다.
전생에서의 기억들은 이번 생에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이들이 모르는 사실을 현자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가며 잊혀져 가는 사실들. 현재는 과거를 잊었지만, 현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파우스트가 과거에 대해 결코 누설하지 않는 이유는,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자가 환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이 금기로 지정해 둔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 현자가 보기에, 3황자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임에도 꼭 어른처럼 성숙할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침착하며, 특유의 꼬장꼬장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처음 현자가 3황자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3황자 역시 현자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살다 보니 전생은 점점 잊혀져 가고, 이번 생의 중요도가 훨씬 더 높아져만 갔다. 게다가 3황자와 서로의 비밀을 직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고. 3황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영리하게 위기를 잘 헤쳐 나갔다.
아마 3황자가 황족으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성국의 현자 칭호를 빼앗기는 건 시간 문제였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현자였지만.
3황자가 어느 시기에 살았던 건지는 몰라도, 3황자는 모르고 현자는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고리를 끊어내는 것.
강하게 회전하는 고리 안에는, 그만큼 빠르게 성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리가 회전하는 동안 고리를 끊어낸다면. 안에서 흐르던 성력은 끊어진 틈새 사이로, 순간 폭발적인 성력을 만들어 낸다.
예전엔 상식처럼 전해지는 사실이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혹은 그 밖의 어떤 거사를 치뤄야만 할 때. 종종 고리를 끊어 내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물론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해야 했다. 끊어낸 고리가 다시 복구되지는 못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제들은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을 늘 머릿속에 새기고 다녔다. 성기사들이 암살에 대비하기 위해 품 속에 어울리지 않는 단검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전하. 환향의 관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남은 고리가 고작 두 개 뿐이지만, 환향의 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개의 고리를 동시에 끊어내면, 아무리 5성인 3황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고리가 끊어지면 필연적으로 죽는다.
설마 현자가 그 사실을 잊었을 리는 없었다.
* * *
현자가 들어올린 환향의 관에 새하얀 빛이 스며들었다.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었다.
“……파우스트!”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3황자가 현자를 불렀다. 하지만 현자는 멈추지 않았다.
끊어진 고리와 함께, 현자의 몸은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환향의 관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공간 전체를 성력이 뒤엎으며 장관이 펼쳐졌다. 한쪽에는 루시퍼의 마기가, 한쪽에는 힐데스하임의 성력이. 완전히 그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
가만히 기운을 모으기만 하던 루시퍼가 뒤늦게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했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이!”
루시퍼가 여전히 기운을 모으고 있던 채로 마력을 쏘아댔다.
콰앙!
하지만 그 기운은 3황자가 만들어 낸 성력의 방벽에 의해 막혔다. 비록 방벽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화악.
루시퍼에게로 흡수되던 기운들이 일제히 멈췄다. 루시퍼는 하던 것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중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3황자를 비롯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루시퍼가 손짓을 한 번 하면 그들은 저만치 나가 떨어져 버렸고. 다시 그를 막아설 의지조차 꺾여 버렸다.
그리고 결국에는 환향의 관에 고고히 기운을 모으고 있던 현자. 그와 루시퍼 단둘이 서 있게 되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현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환향의 관에 계속해서 성력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정기가 다 빨린 신체로.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모를 채로.
“네가 뭘 하는지 모를 것 같느냐!”
루시퍼가 소리를 쩌렁쩌렁 질렀다. 지금까지 보였던 것 중 가장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루시퍼가 손을 펼쳐 마기로 된 검을 만들어 내고는 현자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앙!
굉음이 나며 연기가 일었다. 시야가 연기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런데 자욱한 연기가 사라지고 나타난 광경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