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9)
제19화
“준비는 모두 마치셨습니까?”
그 말을 하는 파우스트 옆에는 못 보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내 또래 정도로 보였다.
“제 딸입니다. 16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4성의 성력을 지니고 있으며 황궁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장차 전하에게 큰 힘이 될 아이이니 부디 데려가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현자에게 유일한 혈육으로 딸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았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성기사 챈슬러 경을 모시는 스콰이어 트루드입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날카로운 인상이라든가, 싫은 티를 팍팍 내는 말투는 현자와는 영 딴판이었다.
“허허. 전하와는 달리 제 나이대에 맞게 천방지축인 아이지요. 생각이 짧아 전하를 모시는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모르니…….”
“아냐. 얼마나 싫겠어. 한창 기사단에서 이것저것 배워나갈 시기인데 나 때문에 빠져나온다는 게. 경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 굳이 날 따라올 필요 없다니까.”
굳이 나를 따라서 클레이디크로 가겠다는 현자는 결코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미 성황 폐하께 말씀까지 드렸으니 이제는 돌이키고 싶대도 그럴 수 없지요.”
“에휴.”
괜스레 트루드에게 시선이 향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4성의 성기사라니. 정말 아까운 인재인데.
“걱정 마십시오. 재능을 썩히게 둘 마음은 없으니.”
때마침 나타난 성기사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성황이 내게 호위 기사로 붙여 준, 트루드의 마스터였다.
그의 뒤로 말을 타고 있는 열 명의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병사들도 모두 채비가 되었습니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이는 챈슬러였다.
“명을 받아 전하의 호위를 맡기는 하나, 제가 전하의 곁에 있는 것은 황비가 계신 곳에 도달할 때까지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시고, 빠른 시일 내로…….”
“알아.”
내가 챈슬러를 사면한 지도 벌써 7년이나 지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진 여건이 안 됐잖아. 수도에 있으면 보는 눈도 많고.”
클레이디크로 간다면 상황을 엿보다가 어머니가 계신 서쪽 섬으로 향할 기회도 찾아올 것이다.
내 말에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것인지 챈슬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말에 올라탔다.
나는 마찬가지로 말에 오르려 하는 현자를 향해 말했다.
“경도 같이 타고 가지. 트루드도 올라오라고 하고.”
그새 말에 오른 파우스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소인이 폐하와 함께 각지를 누비며 승마를 해 왔던 것이 수십 년입니다. 이 아이 또한 아직은 종자이나 기사단에 들어간 지 어언 3년이 흘렀으니…….”
“그런데 말이 저래서 괜찮겠어?”
모두의 시선이 트루드의 앞에 있는 말에 쏠렸다. 어린 소녀의 체구에 맞게 얼마 자라지 않은 말, 아니 저 정도면 망아지에 가까웠다.
“말로 가도 꼬박 이틀이 걸린다며. 그건 저 망아지도 혹사시키는 거고, 속도도 느려질 거 아냐. 얼른 올라와.”
병사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이틀이나 이동한다는 것은 훈련받은 그들에게도 고된 일. 내심 내 제안에 열렬한 동의를 표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트루드는 현자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대양과 같이 깊은 전하의 사려에 감사함을 표할 뿐입니다.”
병사들의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현자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제 진짜 가볼까.
마차가 덜컹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앉은 트루드는 제 키보다 조금 짧은 검을 만지작거리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가 밉지?”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도 들고, 달래주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말을 걸어 보았다.
트루드의 반응은 썩 만족스러웠다.
“예, 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도로 눈을 피했다.
“4성이나 됐으면 기사단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을 테고. 무얼 하든 수도에 남아 있는 편이 네 미래에 좋겠지.”
“출세하고자 기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구태여 전하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요.”
“헌데 네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도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전하보다 이러한 제가 더 밉습니다.”
현자의 딸인데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탓일까. 보기보다 조숙한 면이 있었다.
“그럴 수 있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어린아이라서 정말 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제부터 함께 지내야 할 처지인데. 최대한 불편한 사이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여긴 수련 중에 다친 건가?”
어깨 쪽에 작게 감아진 붕대. 가죽 갑옷에 가려져 있었으나 피에 벌겋게 물들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 예. 벼, 별것 아닙니다.”
과하게 당황하며 가죽 옷을 치켜올리는데,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 볼게.”
내가 다가가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나는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
피 묻은 붕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자 소녀에게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깊게 베인 흔적이 있었다. 헌데 창상 외에도 그 주변으로 붉게 물든 타박상의 흔적이 가득했다.
“훈련을 원래 이렇게까지 해?”
아무리 기사들이라 해도 그렇지. 훈련 중에, 그것도 애들을 데리고 이 정도는 과하지 않은가.
“예. 황궁의 성기사가 되려거든 이 정도는…….”
“거짓말하지 말고.”
트루드가 또다시 움찔했다. 저렇게 순수한 걸 보니 애는 확실히 애였다.
“저, 정말입니다.”
“밖에 호위 기사한테 물어봐도 되지? 저 아저씨도 황궁 소속이라고 했으니…….”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트루드가 다급하게 달려들어 온몸으로 나를 막았다. 훈련을 빡세게 하긴 했는지 작은 체구임에도 몸이 바위처럼 단단했다.
순간 느껴진 고통을 삼키며 트루드를 바라봤다. 역시 정상적으로 난 상처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얘기해 봐.”
“아버지께도…….”
“아무한테도.”
몇 번이나 주저하던 트루드에게서 나온 이름은 내게 상당한 충격을 전했다.
“2황자 전하와의 대련 중에 난 상처입니다.”
2황자, 바스티안. 그 쓰레기 같은 새끼. 어찌 보면 첫째보다도 더욱 악질인 면이 있었으나, 황궁 기사단으로 들어가 볼 일이 없어졌었는데. 그 성격은 역시 어디 가질 않았다.
“대련 중에 난 건 맞아?”
그놈이라면 무슨 더러운 수를 썼다고 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
“예?”
“그리고 무슨 견습 기사끼리 대련을 이렇게까지 해? 참관인은 가만 보고만 있었던 거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대련이었습니다.”
그 말을 절대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었으나 그 이상을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아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2황자와 볼 일도 거의 없어졌을 테니까.
“근데 치료는 왜 안 한 거야? 기사단 내에 사제도 있고, 너도 이 정도는 치료할 수 있잖아?”
“영광스러운 상처이기에…….”
“개뿔이나. 그것도 2황자가 한 소리지?”
역시나 그런 듯 트루드는 부정하지는 않았다.
“날 싫어할 만도 했네.”
그런 2황자의 동생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본다면 나도 비슷한 놈일 거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려서 상처 난 거 그냥 두면 나중에 흉터 남는다.”
트루드의 상처에 신성력을 덧씌웠다. 상처가 깊은 것은 아니라 금세 치료되었으나, 그간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이리라.
아무래도 트루드와의 관계 개선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할 필요가 있을 듯 보였다.
조용해진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주십시오!”
“제발! ……란 말입니…….”
“가야 할 길…… 멀다. ……켜라!”
“인사라도 전……게 해 주십시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마차도 잠시 멈춘 채 이동하지를 않았다.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자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여인이 보였다.
낯이 익은 얼굴.
“무슨 일이야?”
내가 끼어들자 병사들이 여인을 강하게 밀쳐내려고 했다.
“놔 줘. 나랑 아는 사이니까.”
“저, 전하!”
풀려난 여인이 몸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소리쳤다.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앳된 목소리도 따라 들려왔다.
“3,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얼마 전 신전에서 살려냈던 여인과 그녀의 아이였다.
“신전에서는 저와 제 아이를 미물이라 표하며 포기토록 하였습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사경을 넘었을 것입니다.”
울먹거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퍼졌다.
“소인의 추태로 인해 전하께서 클레이디크로 유배를 가게 되셨으니 피로 갚는 것이 마땅하나, 아이가 있는 몸이라 부디 용서하여…….”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내가 구태여 선택한 건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인. 그녀의 얼룩진 얼굴을 본 순간 나 역시 그득해진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종종 그래왔듯, 잠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착해빠진 놈. 너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병원장이 월급 한 푼 더 줄 것 같아?”
“에휴. 남 몸 보살피다가 네 몸이 먼저 가겠다야. 얘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성인으로 이름 좀 날렸을 거라니까?”
그때마다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해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었으니 때때로 진상 환자를 살릴 때마다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딴 거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는,
“가장 낮은 이가 가장 높은 분의 은총에 경의를 표합니다.”
단지 지금처럼 벅차오르는 순간이 끝내주도록 좋았을 뿐이다.
어쩐지 전생보다 이곳이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갈 길이 머니 일어나. 미안한 말이지만 네 남편은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을 대비해 먼 마을로 보냈어.”
“깊으신 전하의 생각과 어진 마음씨에 재차 감사를 표할 뿐입니다.”
나는 도로 마차에 오르기 전, 병사 한 명을 붙잡았다.
“저 여인 데리고 가서 마을에서 이것저것 좀 사다 주고 와. 먹을 거나 생필품들 위주로. 돈은 파우스트 경한테 가서 받아 쓰고. 넉넉히 사주고 와.”
그 말을 하는데, 어느새 병사들과 기사의 시선이 사뭇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트루드에게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다.
“…….”
여태껏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그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