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90)
제190화
새하얀 빛무리. 이전에 공간을 맴돌던 한낱 신성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본질’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빛무리를 목격하고 피부로 느끼면서 모두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힐데스하임, 신성 제국에서 주신으로 모시는 존재였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게 깔았다. 성국의 황족이나 귀족을 마주할 때처럼 형식적인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심지어는 신성 제국민이 아닌 자들도 인간으로서 신에게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
하지만 인간 중에서도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모두가 신을 영접하는 와중에 성국의 3황자만이 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달려간 곳에는 쓰러져 있는 현자 파우스트가 있었다. 그 누구도 파우스트가 쓰러진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주신 앞에서 현자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것이 심히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만약 파우스트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며, 신을 인간계로 불러들이며 바친 값진 희생이었다. 현자 역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터였다.
3황자는 파우스트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퍼뜨린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의술과, 신성력을 모두 사용하면서까지 살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이미 목숨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
그리고 신께 예의를 갖추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가 있었다. 3황자의 충직한 기사이자 현자의 딸 트루드였다.
보는 이들이 감히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의 상태가 걱정되면서도 앞에 신을 두고 3황자처럼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듯 보였다.
“일어나.”
3황자는 신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트루드를 곧장 일으켜 세웠다. 엉거주춤하던 트루드가 반강제적으로 현자에게 끌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오열하기 시작했다.
고요하다 못해 신성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던 침묵 속에서,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잘 들릴 수밖에 없었다.
3황자는 트루드의 손으로 현자의 눈을 감겨 주었다.
여전히, 트루드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자 그녀 역시 신에게 예의를 차릴 생각은 더는 하지 못했다.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싸우던 기사의 모습과, 아버지를 잃은 지극히 평범한 딸아이의 모습은 도무지 맞물리지 않았다.
그리고. 신은 그런 그들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기는커녕,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아.”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았다. 이번에도 3황자가 틀리지 않았다.
* * *
드디어 신이라는 작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로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물어야만 할 것들이 있었다.
“정말로, 이게 최선이었습니까?”
신성력이라는 것.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신성력에는 인간의 생명력이 들어가며, 신을 소환하기 위해 현자는 자신의 고리 두 개를 불태우면서 목숨까지 바치게 되었다. 정말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느냐 묻고 싶었다.
트루드는 현자를 부여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자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헙.”
돌발적인 내 행동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렇게 무례하게 대했다가 신께서 노하신다면. 꼭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모두가 눈치를 보며 슬쩍 나를 말리려 들던 찰나.
「……가엾은 자여.」
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결코 강요한 적이 없다. 그의 선택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모두를 구원코자 했다. 또한, 어차피 수명이야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대에게 그를 살릴 방법이 있지 않은가.」
소생의 권능. 다섯 개의 고리를 비로소 완성하며 얻었던 기적적인 권능이었다. 하지만…….
「그리고 그만한 대가가 따르겠지.」
신이 말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자를 살리면 내가 죽는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이기적이게도,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 수명이 많이 남았다. 또한 내가 남아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젠장.”
구질구질하게 그런 것들을 따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럴싸한 이유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현자는 내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지만, 내 목숨을 바쳐 그를 살려내자니 망설여졌다.
“어째서 세상을 이렇게 둔 겁니까. 인간들에게 힘을 주되, 그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았죠?”
따지듯이 물었다. 그가 정말로 인간들을 위하는 신이라면, 고지를 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이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인간들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인간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로소 신에게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자율성을 가진 인간들이 선택한 결과다. 진실은 숨겨졌고,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의 권위가 올라갔지.」
애초에, 인간들 역시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이었다. 신성력을 페널티 없는 막강한 힘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사제와 황족들의 권위를 올리기 위해서.
겔리두스 이전에, 이미 인간들은 타락했었다는 소리였다.
「나로선 개입할 여지가 없었고, 그대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신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선택이 옳았지. 그대는 타인의 희생에 공감할 줄 알고, 권위를 남용하지 않으며, 신성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얼추 예상은 하던 부분이었다. 그 많은 의사들 중, 하필 왜 나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다지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힐데스하임!”
그때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들려왔다. 대악마 루시퍼가 힐데스하임의 등장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무책임하지만 그대에겐 이 세상을 올바로 돌려놓아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군.」
힐데스하임은 그런 루시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내게 부탁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엔 단지 내 목숨이나 부지하고 싶었고,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이 좀 더 커졌다. 사실, 원래부터 내 욕심은 그만큼 컸을지도 모른다.
의사로 살 적에도 나는 내가 맡은 환자들만 잘 치료하면 된다는 마인드로 나를 포장했지만. 사실은 혁신적인 치료법이나 의료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 수혜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능력을 알기에, 비록 동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불렀음에도 사실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천재들이 많음을 알기에. 현실적으로 내가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
이건 내게도 꿈을 실현시킬 기회였다. 신은 나를 필요로 했지만, 나 역시 이런 세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파아악.
루시퍼가 달려들며, 그의 주변으로 수십, 혹은 수백 개의 날카로운 창이 솟아났다. 새까만 마기를 띤 창이었다.
그리고 창들은 제각기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대다수는 힐데스하임을 향해, 그리고 일부는 멍하니 있는 인간들을 향해.
“으악!”
“도, 도망쳐!”
“신이시여, 부디 인간을 가엾게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나를 바라보던 힐데스하임은, 악마의 창이 그녀에게 도달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수백 개의 창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 섰다.
「루시퍼.」
그녀가 악마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흑색의 창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또한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불길한 느낌의 마기 역시도 소멸했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젠장. 힐데스하임! 언제까지고 이 땅이 무사할 것 같으냐!”
루시퍼가 손에 흑색의 창을 소환하며 힐데스하임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그가 찔러 넣은 창을 힐데스하임이 손으로 가볍게 쳐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힐데스하임이 서 있는 주변의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렇진 않겠지. 인간들을 자율적으로 둔 건 나도 종종 후회하는 부분이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으니까.」
힐데스하임이 말하는 대로, 신성 제국은 겔리두스로 인해 완전히 타락한 곳이 되었고. 만약 내 위로 있는 형들이 황위를 물려받기까지 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리라.
어쩌면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는 정도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인간사에 위기는 늘 반복되어 왔지. 너는 매번 그 위기를 틈타 암약했고.」
루시퍼가 부활했던 적아 이미 수 차례 있었다는 것을 역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인간들이 전체적으로 타락했을 때라는 것은 방금 안 사실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지? 넌 늘 인간들에게 패했어.」
“……닥쳐!”
루시퍼가 굉음을 질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그가 도약하며 힐데스하임을 향해 창을 내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실현되지는 못했다.
힐데스하임이 가볍게 손을 내뻗자 그는 공중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리고 인간들은 다시금 올바른 길을 걷게 될 거다. 올바른 지도자가 생겼으니.」
힐데스하임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해 내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가 준 기회를 걷어찰 생각은 없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내가 늘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돌아가라, 루시퍼.」
힐데스하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하얀 섬광이 주변에서 몰려들며 얼어붙은 루시퍼에게 달라붙었다. 새까만 기운을 내뿜던 그가 곧 하얀 기운에 휩싸이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앙.
그리고 그 빛무리가 사라지자, 루시퍼가 있던 공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조금은 시원하면서도 허탈했다. 이대로 끝이라니.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 공식적인 힐데스하임의 성황 후보인 1황자도 있었고, 발칸 제국의 황제도 있었다. 그리고 각 왕국의 주요 세력들도 있었다.
신이 원하는 건 어떤 것일까. 내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명쾌한 답이 딱 주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힐데스하임은 그에 대한 힌트는 주지 않았다. 단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만으로 그대의 선택에는 값어치가 있을지니. 잘못된 선택일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게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