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94)
제194화
시간이 흘러가면서 신성 제국에서 나타나던 변화는 점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제가 아닌 의원들이 대부분의 치료만을 담당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중환자를 사제들이 담당하면서 신분이 낮은 이들도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우리 같은 놈들도 살아날 구석이 있었다니…….”
천한 이들은 죽어야 마땅하다. 신께서 일찍 부르심이니, 순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편견들은 차츰 무너지고, 잘못된 사상들이 바로잡혀갔다.
하지만 제국과 황족이 가진 권위는 여전했다.
“성황 폐하께서 이룩하신 기적이니……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이걸 당연하게 여길 날이 오겠지. 그래도 최소한 다음 세대까진 모든 걸 기억해야 해.”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서들은 성황에 대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적었다. 와전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성황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면서까지 샅샅이 적을 정도로 사서들은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역사서의 편찬을 황족의 압박 없이 진행할 수 있는 건 결코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건 적지 말라니까!”
그런데 종종 성황이 역사서를 훔쳐보고는, 민망한지 종종 토를 달고는 돌아갔다. 성황에 대해 좋은 내용밖에 없는데도.
“역시 성군이시라니까.”
사서들이 볼 때는 그런 성황의 모습마저도 흐뭇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는 영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세대까지는 평화가 유지될 거라 바라보는 시선들이 대다수였다.
대륙 내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두 국가, 힐데스하임과 발칸의 군주가 같은 마음이었기에. 둘은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었고, 종종 만나서 대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언젠가, 평화는 깨질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서, 혹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가 유지될 필요는 있었다.
그 방편 중 하나가 마력이었다.
힐데스하임의 모든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버릴 순 없었지만, 일부가 마력을 익히면서 성력을 대체할 힘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었다.
성황을 통해 알려진 사실, 성력은 결국 생명력을 갉아먹는 사실 때문이었다. 성기사나 사제들의 수명이 유독 짧은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국에서 마력을 익히는 데에는 발칸에서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반대급부로 성국에서는 발칸에 한층 고차원의 의술을 전파해주었다.
“……평화라.”
살아남은 흑마법사 무리는 그런 평화가 달갑지 않았다. 흑마법의 정수라 불리던 이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이들끼리 다시금 힘을 모아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흑마법사들이 제물로 사용할 인간들을 구하기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럼에도 흑마법사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결국 영생을 얻었으니.
그리고 영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의 악성 또한 불멸이다.
잠자코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 * *
“성황도 슬슬 혼사를 구해야 하지 않겠소?”
발칸 제국의 황제도 지긋지긋한 소리를 해 왔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특히나 어머니가 닦달했다.
이미 혼인을 할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군주에겐 보좌할 여인이 당연히 필요한 법이다.
…아주 그냥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글쎄요.”
하지만 딱히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새로 태어난 마당에 전생의 와이프가 마음에 걸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생에선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워낙 치열하게 살아왔다. 게다가 전생에서처럼 세상을 이른 나이에 뜨게 된다면 남은 내 가족에겐 그만큼 큰 불행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전생의 가족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전생에서만큼, 혹은 전생 때보다 더욱 해야 할 것이 많은 지금은 그만큼 가족들에게 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으로는 딱히 결혼을 해서 가족을 만들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면 성국의 뒤를 누가 잇는단 말이오?”
발칸 제국의 황제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꼭 내 뒤를 내 혈육이 이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황족이나 귀족에 대한 편견들이 많이 바뀐 와중에, 조금만 더 인식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황족이 아닌 이가 성황이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믿었다.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으니까, 그거야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성황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하는 과정은 정말로 지독했다. 나는 내 자식에게 차마 그런 과정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조차도, 인생 2회차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다. 물론 지금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만큼 힘든 과정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순조롭지도 않을 거다.
“……뒤를 이을 사람이 많단 말이오? 그게 진심이오?”
발칸 제국의 황제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깨어 있는 그로서도,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인 듯 보였다. 심지어 나를 제외한 모든 황자들이 죽었으니, 대를 이을 만한 황족을 찾으면 아무래도 직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따.
하지만 그런 권위의식에 찌들어 있는 황족들을 말한 게 아니었다. 예컨대 챈슬러라면 정말 훌륭히 신성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니 그는 후보에서 제해야겠지만.
물론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그러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굳이 내 아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때가 되면 조금 더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다.
“내게 여동생이 있소. 혼기가 가득 찼음에도 마땅한 신랑감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번 기회에 성황과 정략결혼이라도 한다면 제국 간의 평화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고 또 신성 제국에도 마땅한 후계자를…….”
발칸 제국 황제에게는 본 계획이 따로 있었는지 아쉬운 얼굴로 슬쩍 이야기를 꺼내 보았으나…….
“정략결혼이라면 더욱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번 만나라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싫습니다.”
나는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정략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건, 아직까지도 현대인의 마인드가 남아있다는 발로였다.
* * *
“……트루드 경?!”
기사 한 명이 트루드를 멈춰 세웠다. 다급한 표정의 기사를 본 트루드는 괜히 불안감이 차올랐다.
“무슨 일이야.”
방금까지 수련에 열중이던 트루드가 검을 집어넣으며 기사에게 물었다.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조금은 휴식을 취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간 너무 쉴 새 없이 달려오셨지 않습니까.”
기사의 말대로였다.
언제고 신성 제국에는 끊임없이 위기가 닥쳤고, 기사들은 불시의 상황을 대비해서 가혹하게 몸을 굴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최악의 위기는 종결되었고 간만에 찾아온 평화 속에서, 재정비를 위한 휴식 또한 필수였다.
그럼에도 트루드는 조금도 수련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그녀가 그래온 이유가 있었다.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마주했던 벽.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는 일정 수준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에 대해 선배 기사들은, 인간으로서 점차 발전이 더뎌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트루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던 대악마 루시퍼의 힘. 루시퍼가 힐데스하임에게 소멸하면서 그녀 안에 있던 힘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퇴보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녀는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더 큰 힘이 필요한 법이야.”
“하지만…… 단장님의 명령입니다.”
그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걸 트루드 또한 알고 있었다. 오래도록 검을 쥐기 위해서는 순차적이고 점진적인 발전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었다.
그러니까 챈슬러도 트루드를 만류하고 있었던 것일 터.
“그리고 단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알겠어.”
트루드는 방으로 돌아가 땀에 젖은 수련복을 갈아입었다. 그녀의 손은 여인의 것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거칠었다. 하지만 훌륭한 기사로 인정받기엔 충분한 손이었고, 트루드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단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트루드가 챈슬러의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그는 이제 신성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트루드가 부단장이라고 한들, 챈슬러와의 격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충분한 예우를 갖출 필요가 있다 여겼다.
그 때문일까. 트루드는 챈슬러를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챈슬러는 오히려 트루드를 더욱 친근하게 대했다.
“부단장이라는 자리에 너무 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챈슬러는 트루드가 그 어느 때보다 심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실력이 퇴보할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황 폐하께서 실망하시진 않을 거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 거고,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네가 따르지도 않았겠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트루드는 성황의 눈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게 그녀를 더욱 채찍질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챈슬러가 하는 말대로 성황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불안함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파우스트 경의 공백을 내가 채우기로 한 이상 나는 너를 한 사람의 기사로만 바라볼 수 없다.”
챈슬러가 그 날 이후로 유독 트루드를 챙기는 이유. 트루드는 스스로 자신이 성숙해 졌다고 생각했지만, 챈슬러는 아직 트루드를 어린 아이로 보는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생긴 아버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챈슬러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기사로서 너는 충분히 할 만큼 해 왔다. 너를 여인 취급하는 걸 싫어하는 것 알지만, 마땅한 짝을 찾을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챈슬러는 과거 사랑했던 이를 불의의 사로로 잃게 되었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기사로서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
그런 챈슬러의 충고였다.
하지만 챈슬러에게는 미안하지만 트루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오랫동안 사람을 원망하는 법만 배워왔다. 그럴 만한 사람들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갖게 된 건 성황과 챈슬러 뿐이었다.
그리고 기사로서, 그녀가 지켜야 할 대상 외에 누군가에게 애써 호의를 갖고 싶지도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