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97)
제197화
“……원망하지 않는다라.”
환상에서 벗어난 후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으로 돌아가는 조건을 포기한 내게, 신은 대신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미안해요.’
몰라볼 정도로 나이가 든 아내와 자식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 대해 잘 몰랐던 건, 전부 나 때문이었는데도. 그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떠안았던 것 때문인데…… 그게 오히려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만나보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다.」
먹먹해진 마음을 뒤로하고, 신의 제안에 대해선 거절했다. 정하늘로서 삶은 끝이 났고, 그들을 만나본다면 오히려 미련만 커질 뿐이다.
“하.”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들이 잘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니 한편으론 마음의 짐이 덜어져서 다행이었다.
“고마운 놈들.”
그리고 동료 의사들 역시 여전히 나를 잊지 않은 채로, 내 가족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에휴. 그래도 나름 잘 살았나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던데. 여전히 내 이름이 회자되고 있는 세상을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났다.
이 세상에서도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주겠지.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괜히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던 와중에 챈슬러가 나를 찾아왔다.
기사로서의 품위를 위해 늘 엄중한 표정만 짓던 챈슬러의 얼굴이 묘하게 달라 보였다. 조금은 짐을 내려놓은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두워 보이기도 한 것이.
“성황 폐하.”
무언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듯 보였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 예상은 정확했다. 어쨌든 나는 그게 무엇이든 들어 줄 생각이었다. 챈슬러에게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고, 그가 하는 부탁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 테니까.
“뭔데?”
“……이제 은퇴를 하고 싶습니다.”
세종이 황희 정승의 은퇴를 몇 번이고 만류했다는 것이, 예전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챈슬러는 내게 큰 도움을 준 데다, 여전히 훌륭한 기사였다. 그가 계속해서 성국 기사단의 단장으로 있으면서 큰 도움을 주고, 그만한 권리를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조금 이른 것 아냐?”
우선은 그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경의 마음을 가로막을 생각은 아닌데, 조금 아쉽지 않아? 10년 가까이 나를 도왔고, 이제 내가 성황이 됐으니까 챈슬러 경이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아졌을 텐데.”
“제가 폐하를 따랐던 건 폐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도록 돕기 위함이었고, 이젠 제가 폐하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없긴 왜 없어?”
챈슬러. 그가 투옥되면서 썼던 누명들은 내가 성황이 되면서 완전히 벗겨내었고, 그를 따르기 위해 성기사단에 지원한 인력들만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챈슬러는 그런 그들의 교육과 관리를 도맡아 하면서 병력 양성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것이 다소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이젠 트루드가 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챈슬러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를 어려서부터 보아왔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트루드가 조금은 어린애처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건 내 지나친 생각이었다.
트루드는 현대를 기준으로 보아도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그간 많은 일들을 겪으며 성장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역시 금세 떨쳐내었고.
어린 나이에, 그리고 여자라는 다소 불리한 조건으로도, 기사단 내에서 부단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던 건 그만큼 트루드가 출중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루드가 저를 넘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저는 쇠약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반면, 트루드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챈슬러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기사들의 실력을 평가함에 있어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챈슬러는 이미 결심을 끝내 놓은 듯했고, 차마 그의 결정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뭘 할 생각이야?”
챈슬러는 가족도 없었고, 성국 내의 작위나 영지는 과거 누명을 쓰면서 모두 회수 당했었다.
“영주로서 생활하고 싶다면 적당한 땅을 골라 봐.”
평범한 귀족으로서의 삶. 하지만 챈슬러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기사로서 방랑하면서 살아갈 생각입니다.”
“……방랑 기사?”
성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존재였다. 그건 힐데스하임 내의 풍조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눈에 보이는 선행을 하면서 거들먹거리고, 그에 대한 경의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기존 황족들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었다.
“폐하를 통해 그간 성국에서 신경 쓰지 못했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들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낮은 이들이라고 한들 결코 방조해서는 안 될 테지요.”
챈슬러는 알게 모르게 나를 통해 느껴온 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더욱 큰 일을 하셔야 하는 지금, 그들을 챙기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챈슬러는 보기보다 마음이 깊었다. 안 그래도 대국적으로 정치를 하는 지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불쌍한 이들이 많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는데. 챈슬러가 그렇게 말해 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챈슬러 경의 생각이 그렇다면, 뭐.”
나는 그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트루드 취임식 준비할 테니까, 혹시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생각해 둬.”
“……알겠습니다.”
“종종 들러서 생사 정돈 확인해 주고.”
“그건 장담 못 드리겠습니다.”
챈슬러가 답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정도 없네. 보아 온 시간이 있는데.”
내가 정이 많은 건지 아쉽기만 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챈슬러는 기사 둘을 데리고 나를 찾아와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이임식도 하지 않은 채로, 아무도 모르게 떠나버렸다.
괜한 정에 휘둘리기 싫다는 그의 의지인 듯 보였다.
많은 기사들이 챈슬러가 떠난 것을 뒤늦게 알고 아쉬워했지만, 누구보다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단연 트루드였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단장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새 단장님을 뵙습니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그녀의 단장 취임식에서, 많은 기사들은 그녀를 향해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비로소 그녀도 이 모든 일들이 실감이 나는 듯 보였다.
* * *
3황자가 성황이 된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이들은 꽤나 많았다. 특히나 떵떵거리기를 좋아하는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3황자의 새로운 방향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실세였으니까. 그는 민심을 등에 업은 채로, 성국 내의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들은 성국 내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다. 그들과는 달리 새 성황의 눈에 띄지 않게 도망쳐야만 하는 세력이 남아있었다.
바로 1황자와 2황자의 유족들.
1황자와 2황자는 죽었지만, 그들의 유가족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특히나 황자의 외가 쪽은 신성 제국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후일을 도모한다. 신께서도 생각을 바꾸실 거야. 저딴 놈에게 저 자리를 주신 게 실수였다는 걸 곧 깨달으시겠지.”
1황자와 2황자의 모친. 그들은 어려서부터 대놓고 3황자를 괴롭히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독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성황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찔리는 것이 있으니 보복 당하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실의 귀중품과 일부 병력들을 데리고 도주했다. 먼 길을 이동해 국경을 넘으며 도착한 곳은 서부에 위치한 한 왕국이었다.
힐데스하임의 국적을 갖고 있으면 누구든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지만, 그곳의 국왕이 현 성국의 지도 세력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허. 신성 제국의 고귀한 황족께서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전대 황비를 본 국왕은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지껄여댔다.
열불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차마 그 태도를 지적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니,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귀중품들을 줄 테니 은거지를 마련해 주시오. 그리고 훗날 국왕께서 신성 제국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가 큰 도움을 줄 수 있소.”
국왕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굴러 들어온 호박을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었지만 신성 제국과 맞서 싸울 힘을 몰래 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며, 그들이 가져온 귀중품들이 탐나기도 했으니.
“외진 땅을 줄 테니 거기로 가서 쥐 죽은 듯 사시오.”
단지 비어 있는 시골의 영주 자리 하나만 내어주는 것 치고는 너무도 좋은 조건이었다.
“……알겠소.”
그리고 그들은 국왕의 건방진 태도에도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들이 아니면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여차하면 신성 제국의 성황에게 이들을 잡아 넘길 수도 있었고.
그렇게 힐데스하임에서 온 황족들에게 비어 있는 영지 하나를 내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지민들에게서 좋지 않은 소리들이 새어나왔으나 국왕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딱히 힘을 모은다든지 하지는 않았지만,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은 남아 있는 듯 영지민들에게 종종 히스테리를 부리는 듯했다.
“……그냥 내버려 둬. 세금은 더 잘 들어오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 영지를 다스리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들어오는 세금의 양은 많아졌으니까.
그렇게 들어오는 세금들은 군자금으로 충당되었다. 더욱 많고, 강해진 병력들을 운용하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다.
“신성 제국의 민심이 좋다고 해서, 그게 결코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건 결과가 보여줄 것이다.”
국가와 황족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고 있으니 무너지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그들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왕국에서는 신성 제국을 잡아먹고 그 위치를 가로채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고.
“신성 제국의 약점은 저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들의 말대로 큰 힘이 될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신성 제국의 황족이었던 자들을 하수인처럼 부릴 수 있게 된 이상. 그리고 그들이 현 성황에게 큰 악감정을 갖고 있는 이상.
국왕은 자신의 계획이 결코 헛된 꿈만은 아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