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198)
제198화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 안 되면 어쩔 건가. 우리 같이 힘없는 놈들은 까라면 까는 대로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이러고 있는 걸세. 평생 이렇게 당하고만 살 텐가? 힐데스하임에서는 우리 같은 자들이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성황이 나서서 개혁하고 있다던데. 이참에 우리도 목소리를 내든, 신성 제국으로 도망가든 뭐든 하는 게 맞지 않겠어?”
신성 제국에서 나타난 변화는, 인근에 퍼져 나가면서 낮은 이들도 새로운 생각이 트이게 만들었다.
차별 받는 게 당연하다시피 생각해야만 했던 삶에 고찰을 하게 되고, 불만을 가지면서 실제로 봉기를 일으키거나 성국으로 도주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 방향을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변화하였고, 일부 국가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더욱 강압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걸리면? 우리 다 개죽음 당하는 거 몰라? 우리 같은 놈들은 그냥 흘러가듯 시키는 대로 살다가 곱게 죽으면 그게 최선인 거야.”
그리고 현실은 처참했다. 하층민들 역시 그렇게 사는 게 익숙하다며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새로 부임한 영주가 여기로 온 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았네. 근데 그동안 오른 세금이 얼마야?”
그럼에도 세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하게 오른 한 마을에서는, 계속해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별 같잖은 놈들이 기어와서는. 출신도 없는 놈들이 국왕께 잘 보여서 여기로 왔다더군.”
1년 전, 기존의 영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력들이 이 땅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뭐 하던 자들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어 영지민들도 처음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평민 출신이라면 낮은 이들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려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게다가 최근의 동향 상 정책이 낮은 이들에게 더욱 우호적으로 펼쳐지는 게 일반적이었고.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차라리 전에 있던 놈이 나을 지경이야!”
이전 영주도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1년 만에 세금이 두 배로 늘었다. 제시된 세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매질을 당하거나 가족이 팔려가기도 했다.
“……이 썩을 놈들.”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을 찾기 위해 그들에게 저항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영지민들에게 새로 부임한 영주와 그의 세력들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곳 영주가 영 못살게 구는 모양이오?”
대화를 나누던 영지민들 뒤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천한 이들과는 달리, 목소리가 중후하고 멋스러운 것이 꼭 교육 받은 귀족의 느낌이 나서 순간적으로 놀랐다. 혹여나 영주의 끄나풀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의 모습을 확인한 영지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뭐 하는 분들인지는 몰라도 신경 끄고 가시오. 괜히 알아서 좋을 것 없고, 재수만 옴 붙을 테니.”
어디서 온 건진 몰라도 외지인임은 분명했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헤진 옷을 입고 있는 남자 세 명은, 이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여기서 일 볼 건 없을 거요.”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용병의 차림새였고. 그들을 일거리 찾아 온 용병으로 생각한 영지민들은 그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영주가 영지민들을 닦달하는 것 외에는 나름 평화로운 곳이었다. 마물이나 몬스터가 출몰하지도 않았고, 의외로 치안도 괜찮은 곳이었으니. 용병이 할 만한 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지민들의 말을 듣곤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그쪽들이 도울 일이 있다고 해도 우린 의뢰비를 지급할 만한 여유도 없어. 하루 벌면 세금으로 족족 나가는데.”
영주 얘기를 하다 보니 괜히 열이 올랐던 것 때문인지 외지인들에게 대답이 퉁명스럽게 튀어나갔다.
“뭐…… 의뢰비를 받고 일을 하지는 않는데. 아까 말한 영주 얘기만 좀 더 해 줄 수 있소?”
“됐소. 들어서 좋을 것도 없다니까. 그리고 괜히 일러바쳤다간 우리 목만 날아가는 걸.”
“일러바칠 생각은 없지만 뭐……. 일 년 전쯤 왔다고 했소?”
남자의 말에 대꾸도 않으려다 대충 고개를 저어주었다.
“시기가 대충 맞네. 알겠소.”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른 두 명을 이끌고 사라졌다.
“에이씨. 우리가 한 얘기, 정말로 일러바치는 건 아니겠지?”
괜히 찝찝함만 남았다.
* * *
“소문이 사실이겠습니까?”
방금까지 영지민들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은, 지금은 덕지덕지 수염이 난 방랑자의 모습이었지만 한때는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수십의 기사를 이끌던 성기사였다.
바로 챈슬러.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지.”
마음 맞는 두 명의 기사와 함께 방랑 생활을 한 지 벌써 일 년 가까이 되었다.
성기사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고만 여겼던 과거, 그게 부끄러울 만큼 가치 있는 일 년이었다.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우면서, 성기사로서 진정 명예로운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름 있는 성기사들의 행동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뭐 어떻겠어. 죽일 놈이라던데.”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뢰를 받기도 하고, 소문을 따라 움직이기도 하면서 많은 선행들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성황이 황자이던 시절 하던 일들이었다. 성황으로서 직접 할 수는 없는 일들이었으니, 이젠 챈슬러가 대신하기로 했다.
이곳저곳에서 소문을 캐다 보니 세상에선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그러다 이런 변두리 영지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챈슬러로서는 결코 못들은 체 할 수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진위여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냥 내버려 두기는 힘든 영주인 건 분명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먼저 봐야겠지.”
영주가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과거를 뉘우친다면 조용히 끝낸 채 향후 행동을 지켜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소 과격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과격한 방법을 써야만 했다.
불쌍한 이들을 돕다 보면,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과 대립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신성 제국 내의 세력이나 권력 따위는 전부 내려두고 왔으니, 일개 영주라고 하여도 챈슬러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검을 들어서 무력으로 정리하는 게 불가피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웬 놈들이냐.”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썩 꺼져라.”
영주의 저택으로 다가서려던 챈슬러와 기사들을 본 호위병들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여상한 태도였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보고는 다소 경계하기도 했으나, 행색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영주님을 좀 만나 뵈어야겠소.”
챈슬러가 병사들에게 그리 말하며 다가가자, 그들은 검을 꺼내들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너희 같은 놈들을 만나실 정도로 시간이 많은 분이 아니다.”
챈슬러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쭉 걸어갔다. 그러자 병사 두 명이 검을 뽑아 든 채로 달려왔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챈슬러는 그들을 본 체도 하지 않고 쭉 걸어갔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챈슬러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병사 둘을 기절시켰다.
병사들의 움직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빠른 탓인지, 차마 움직이는 게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검 손잡이에 목을 얻어맞은 병사들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버렸다.
그동안 챈슬러는 당당히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도 곳곳에 배치된 병사들이 이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네.”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도 종종 범상치 않은 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본 적 있는 듯한 익숙한 검법.
챈슬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전파한 신성 제국식 검술이었으니까.
“……무슨 소란이야?!”
그리고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듯한 이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챈슬러는 비로소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음성의 여성. 그녀가 챈슬러를 보자마자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쓰러지더니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오, 오지 마!”
한때 신성 제국의 1황자의 어머니이자, 황비였던 자였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하는 듯했다. 성황이 보내서 그녀를 처단하러 온 것으로.
“성황 폐하의 곁을 떠난 지는 조금 됐고, 얘기나 조금 해 보러 왔습니다.”
예전의 정은 뒤로하고, 그녀에게 잘못을 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 생각을 한다면 얼마든 용서할 생각이었다.
챈슬러의 말을 들은 황비가 챈슬러를 위아래로 훑었다. 예전의 찬란했던 성기사단장의 모습이 아닌 것을 뒤늦게 알아채곤 안심한 듯한 눈치였다.
애써 억지 미소를 자아낸 그녀가 챈슬러를 따뜻한 어조로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요, 챈슬러 경. 예전에 경이 나를 지켜준 적도 있었죠. 오랜만에 옛날 얘기도 좀 하고 좋겠네요. 안에 들어갈래요?”
황비가 챈슬러를 안에 있는 접견실로 들였다. 그를 앉혀 둔 황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챈슬러 경을 보면 반가워할 얼굴들이 많아요. 불러올 테니까 잠깐만 차 한 잔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챈슬러는 그렇게 나가는 황비를 붙잡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가 병력을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들에게 당할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챈슬러의 실력을 알고 있는 그녀가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1황비뿐만 아니라, 2황비를 비롯한 다수의 황족들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차피 1황비만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모두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한 데 모여서 하면 훨씬 수월할 테고.
챈슬러는 앞에 놓인 차를 물을 마시듯 벌컥 벌컥 들이켰다. 옆에 있는 두 명의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찻잔을 놓은 챈슬러를 빤히 바라보던 기사 한 명이 폭소를 터뜨렸다. 챈슬러가 의아해하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황비께서 참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여유가 사라진 것 때문일까. 황비에게서는 예전에 느껴지던 황족으로서의 품격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챈슬러에게 대하는 태도 역시 이렇게 비굴한 것은 처음 봤고.
“그런데 문득 챈슬러 경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불과 일 년의 시간이었지만. 황비는 많이 변했고, 그건 챈슬러와 두 명의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께서 차를 이렇게 급하게 드시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예전에는 차 한 잔 비우는 데 한 시간 가량이 걸렸던 걸 보면, 본인이 생각해도 참 많이 바뀌긴 한 것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