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20)
제20화
황궁의 접견실에 오래간만의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오베라스 공작이었다.
“식사는 입맛에 맞는가, 오베라스 공.”
성황의 질문에 공작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예. 폐하가 드시는 음식들이니 하나 같이 끝내주는군요.”
“그렇군.”
사실 오베라스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목구멍으로 무엇이 넘어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째서 성황이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저 늑대 같은 양반이 무슨 속셈이지? 혹시…… 그래. 이제 와서 잘 지내보자는 거군.’
신성 제국의 공작. 그것만으로도 성황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였으나, 오베라스는 공작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 권력의 유래는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었다.
500년 전. 초대 성황이 신성 제국을 건국하기 위해 벌였던 대통일 전쟁. 그곳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것이 오베라스 공작가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오베라스 공작가는 힐데스하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오베라스가 세웠던 공이 워낙 유명한지라 여론 역시 좋은 편이었다.
신성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오베라스가 신성 제국의 공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황가를 모독했더군.”
허나 성황의 말투는 그러한 공작을 대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예?”
포크를 들어 올리던 오베라스의 손이 멈췄다.
“3황자를 자네의 시종마냥 불러내어 시도 때도 없이 성력을 받아 갔다더군. 별다른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종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깟 일로 3황자를 벌하라고 탄원서를 그리 넣었는가? 자네의 눈에는 3황자가 만만해 보였겠지. 그러니 1황자나 2황자가 아닌 3황자에게 매일 같이 찾아간 것이고.”
만만해 보였다.
그 말은 오베라스의 정곡을 찔렀다. 뒤를 봐주는 세력도 없으면서 제 아비인 성황에게까지 버림받은 자식. 그렇기에 3황자를 개인 사제마냥 찾아가기는 했다.
3황자는 제 주제를 아는지 별말 없이 성력을 주입해 주기는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작은 그것을 당연스런 권리라 여기게 되었고, 고작 평민 한 명 때문에 권리에 지장이 생기자 발끈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3황자의 일로 성황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걸까. 분명 내다놓은 자식일 텐데.
잠깐 생각에 빠졌던 오베라스는 아차 싶었다.
“공으로 인해 3황자가 클레이디크로 떠난 걸 모를 리는 없겠지. 나 역시 공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 이 정도면 만족하는가?”
성황은 3황자를 클레이디크로 보내면서 아쉬운 마음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른다.
“황자가 클레이디크로 갔다는 건 역사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일세. 정녕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까지 해야만 속이 시원했냐는 말이야!”
헌데 성황이 이렇게까지 성을 내고 있는 건……
‘젠장. 잔대가리 굴리는 건 여전하군.’
역시나 오베라스 본인을 견제하기 위한 계책이었던 거다. 성황 입장에서는 안 아픈 손가락을 내주고 큼지막한 먹잇감을 물은 셈이었다.
그리고 오베라스가 그 먹잇감이 되었다. 스스로 호구에 들어간 꼴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찌할 수는 없지만, 더 말 나오는 일은 없을 거라 믿겠네. 설령 이렇게까지 하고도 황가의 권위에 더욱 도전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그땐 여론과 치안을 생각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두게.”
이런 잔꾀가 성황의 머리에서 나왔을 리는 없었고, 대체 누구의 짓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주 빌어먹을 놈인 건 분명했다.
“젠장!”
어쨌건 3황자 때문에 많은 것이 망가지게 되었다.
황궁을 서둘러 빠져나오려는데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잠깐 나 좀 보지.”
1황자였다. 고집 세고 멍청한 놈.
그런 놈의 뒤를 봐주는 건 단순히 5성의 성력 때문이었다. 차기 성황의 가장 유력한 후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헌데.
“공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체 일을 왜 이렇게 만들어서…….”
그 뭣도 없는 19살짜리 꼬마가 훈수하는 꼴을 보니 역겨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젠장할!”
“뭐, 뭐라고 했어 지금! 감히 내가 누군 줄 이, 잊은 거야?!”
“경애하는 1황자 전하. 오베라스가 누굴 밀어줄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소.”
콰앙!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되는 일이 없었다.
* * *
한편 오베라스를 내보낸 성황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놈의 말대로군.’
수십 년을 겪어왔음에도 항상 골머리를 썩히는 것이 귀족 정치였다. 그런데 고작 16살짜리의 머리에서 나온 묘수로 한동안은 공작이 꼼짝 못 하게 되었다.
꼭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파우스트.”
겔리두스는 막내 황자로 태어나 성황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에 가장 큰 공을 올렸던 건 역시 현자 파우스트였다. 마치 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듯한 지혜로움은 현 성황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성황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로도 겔리두스의 피 묻은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가 황자에서 성황이 되도록 도왔던 수많은 재상과 기사들. 대부분이 토사구팽당했다.
그리고 그 유일하다시피 한 예외가 현자 파우스트였다.
“역시 죽였어야 했나.”
그리고 3황자가 제안했던 묘수가 현자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은 며칠 전에 확인한 사항이었다.
“막내 놈한테 붙어 있다기에 말년에 우둔해진 줄 알았거늘…….”
이제보니 3황자는 예상외로 비상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현자가 3황자에게 붙은 것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 수 있었다.
허나 성황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진짜 그런 거라면 현자의 지능도 세월과 함께 늙어빠진 거라 볼 수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고작 2성의 성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터.
“그럼 이제…… 늦게라도 정리할 사람은 정리부터 해야겠군. 3황자의 잠재력도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고.”
성황은 성기사단장을 불러들였다.
“해야 할 일이 있네.”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3황자의 뒤를 쫓게.”
“예?”
“왜. 하기 싫은가? 내가 자네를 단장으로 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며, 명대로 하겠습니다. 허면 3황자 전하를 시해하면 되겠습…….”
“제정신이 아니군. 3황자는 두고 현자의 시신을 거두어 오게. 방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 이상 죽여도 되고.”
“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절대 신원을 드러내지 말게. 성력도 사용하지 말고.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황송하오나 병사 열에 성기사 한 명이 지키고 있다고 하니 홀로는 벅찰 수도 있습니다. 발 빠르고 입 무거운 이로 한 명만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성황에게 현자는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죽였어도 진작 죽였어야 할 것을 여태껏 살려두고 있었는데 주변의 칭송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궁을 벗어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현자의 선택이 틀리는 꼴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겠군.”
3황자를 따라 나선 것은 현자의 선택이 스스로를 사지로 내몰 것까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을 터.
그리고 3황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진정한 군주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확인해 볼 만은 했다.
* * *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계속해서 고리를 혹사시켰다.
이런다고 해서 성력이 확 늘어나는 수준은 이미 지났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영겁의 성배.
3성이 된 뒤로 가슴 속에 있는 성배에 일정 수준까지 성배를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가득 채우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리지만, 지금 내 수준으로 쥐어짜 낼 수 있는 성력보다도 더욱 많은 양을 저장해 둘 수 있었다.
힐끔.
내가 뭐하는 건가 궁금한 것인지, 트루드가 살짝 시선을 주었다. 처음보다는 조금 경계가 풀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괜히 흐뭇한 미소가 그려지려는 걸 참으며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나가고 날이 컴컴해질 무렵.
“…쫓아라! 저기에 있다!”
“병사 열 명과 기사 한 명뿐이다.”
“……를 맡을 테니 너희가 병사를…….”
“마차를 지켜라! 진형을 유지하고…….”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차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끼고 밖의 상황을 지켜보려 할 때.
스릉.
맞은편에서 트루드가 검을 뽑았다.
“전하. 산적이라도 맞닥뜨린 모양입니다. 위험하니 안에 계십시오.”
그리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16살짜리가 시키는 대로 안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슬쩍 밖의 상황을 지켜보자 칼부림이 일고 있었다.
챙. 챙.
복면을 쓴 사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검이 부딪힐 때마다 노란 불빛이 일었다.
“으악!”
“억!”
고작 두 명뿐인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검이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며 병사들을 덮쳤다.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쾅!
그나마 남은 것은 고리가 4개라던 성기사뿐. 허나 혼자서 한 명을 상대하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그리고 더욱 불행한 것은 상대는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슈웅.
나머지 한 명의 사내가 성기사를 지나쳐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파우스트를 관통한 것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파우스트 경!”
“아버지!”
나와 트루드가 동시에 소리질렀다. 트루드가 재빨리 현자에게 달려들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쉽사리 이성을 찾지 못했다. 눈앞에 적을 두고도 피를 뿜어내는 파우스트를 부축하러 달려들었다.
“기사의 기본도 안 되어 있군.”
파우스트를 찔렀던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검기가 곡선을 그리며 트루드의 목을 향했다.
콰앙!
반원으로 뽑아낸 내 성력과 남자의 검이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전력을 다해 내려친 검인지 남자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놀랍군. 소문이 거짓이었던 건가?”
놀랍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동안 모은 건데.”
애써 축적해 둔 성배 내의 성력이 대거 사라졌다.
“저, 전하. 아버지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 그리고 상처도 너무 기, 깊습니다.”
파우스트에게 성력을 쏟아붓던 트루드가 울먹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비록 트루드가 4성이기는 하나, 그녀는 사제가 아닌 성기사. 치유 능력은 아주 기본적인 상처 정도만 해결 가능할 터.
그녀 역시 제 힘으로는 파우스트를 살릴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 조금만 끌어줘. 각자 잘하는 거 하자고.”
내 말을 이해한 트루드가 검을 들고 일어났다.
“부디…… 아버지마저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눈물을 닦은 트루드가 손에 힘을 쥐었다.
화아악.
새하얀 검기가 그녀의 검에서 불타올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