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22)
제22화
챙!
멍하니 서 있던 챈슬러는 저만치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트루드가 복면을 쓴 다른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놈도 단원 중 한 명이 분명해 보였으나 실력이 아주 높은 놈은 아니라 트루드가 간신히 검을 받아낼 정도는 되었다.
파악!
빠른 속도로 달려간 챈슬러가 다리로 남자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남자가 신음성을 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트루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저분은 분명…….”
챈슬러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복면을 걷어 올렸다. 남자의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
“……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하고 넘어갈 셈이었겠지.”
허나 부당한 명을 대차게 거절했던 챈슬러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퍽, 퍽, 퍼억.
주먹으로 쉴 새 없이 단원의 얼굴을 후려쳤다. 진작에 의식을 잃은 남자의 얼굴은 피떡이 되어 있었다.
그런 챈슬러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겼다.
“비켜 주십시오.”
트루드였다.
이성을 잃은 그녀가 자신의 검으로 남자의 목을 내려찍으려 했다.
터억.
“안 된다.”
“……비키십시오.”
어린아이라 그런 걸까. 아니, 챈슬러 역시 하나뿐인 혈육을 잃을 뻔한 상황에 처했다면 똑같이 미쳐버렸을 것이다.
허나 조금이나마 이성이 있는 그가 말려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한참 뒤에야 이성을 되찾은 트루드가 고개를 숙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째서 성기사들이…….”
“알 것 없다. 우리의 명은 전하를 안전하게 중립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니, 그것에만 집중해라. 중립 지역까지만 간다면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될 터이니.”
“……아버지를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예?”
“황자 전하께서 행하신 일이니 평생 잊지 말고 모시거라.”
트루드는 쓰러져 있는 황자를 바라봤다. 2황자와는 달라도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을 편견으로 오해했던 것인가.’
그에게 품었던 마음에 대한 죄책감이 사무쳤다. 트루드에게는 많은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한편, 3황자 일행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잉그리드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갑작스레 몰려드는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마지막 일격이라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드러누운 건 본인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만큼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크흑.”
간신히 쥐어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쫓던 3황자 일행은 온데간데없고, 함께 온 부하 녀석이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몸을 움직이다 문득 쓰러지기 직전에 보았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분명 꺼져가던 챈슬러의 검이 문득 성력으로 불타올랐다. 챈슬러는 그럴 수 있는 성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터인데.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연유를 알아챈다 하여도 성황에게는 핑곗거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콰앙. 쾅.
분노에 휩싸인 잉그리드가 검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쉈다. 그마저도 힘이 빠져 금세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저만치 날아간 성검 아룬다이트가 바닥에 박혔다.
‘제아무리 뛰어난 검이라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능을 보인다.’
챈슬러, 그 꼰대 같은 놈이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 성검이 저토록 초라하게 바닥에 박혀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말이 떠올라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일어나 이 새끼야!”
그 화를 애먼 데에 푸는 잉그리드였다.
* * *
곧장 황궁으로 돌아간 잉그리드는 성황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거짓으로 말을 꾸며낸다고 한들, 성황의 능력에 의해 모든 것이 들통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검을 갖고도 이기지 못했다…….”
성력 뿐만 아니라 성검까지 꺼내어 썼으니 정체가 들통난 것은 물론이요, 시킨 임무마저 수행하지 못했다.
당장 단장의 자리, 아니 그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잉그리드는 초조하게 성황의 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성황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부단장이 그토록 강력한 기사던가?”
“아, 아닙니다. 이길 수 있었습니다. 분명 챈슬러 역시 마지막 일격에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마지막에 쾅 하고 터져 나왔던 출처를 알 수 없는 성력. 성황이 믿을 리는 없었지만 사실대로, 본 그대로 진술했다.
그러자 성황은 도리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쓸 데가 있는 놈이었군. 어쩌면 그놈이…….”
혼자 중얼거리던 성황이 다시 단장을 바라봤다.
“혹시 그 근처에 3황자가 없었던가?”
“예?”
“성력이 터져 나온 순간에. 3황자는 어디쯤에, 얼마나 떨어져 있었냐는 말이야.”
“그, 그것이 워낙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경은 쓸모가 없군, 그래.”
“죄, 죄송합…….”
“됐으니 가서 근신하고 있게. 아, 성검은 여기 두고 가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생각해보겠어.”
“저, 혹시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쫓아가 확실히 입막음을 하고…….”
“이미 클레이디크로 도착했을 터인데 무슨 수로? 중립 지역 내에서 칼부림을 벌였다가 그 사실이 퍼져나가게 된다면 그땐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 텐데?”
신성 제국과 발칸 제국의 경계선.
기나긴 전쟁 끝에 공동 관리로 하여 중립 지역이 된 클레이디크 내에서는 성황마저도 함부로 무력을 쓸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다시 그 지독한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인 잉그리드는 다행히 예상외로 별 탈 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
당최 무엇이 성황의 기분을 그리 만족스럽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잉그리드의 목숨을 살려준 꼴이나 다름없었다.
* *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힐데스하임을 벗어나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여러 사람이 와서 호들갑을 떨고 간 뒤에야 현자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
“한꺼번에 너무 과한 성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현자의 잔소리는 계속해서 길어졌다.
“이전처럼 단순히 보유하고 것을 모두 탕진하신 것이 아니라 고리를 허용 범위 이상으로 쥐어 짜내신 겁니다. 그건 정말 전하의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자중하셔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경은 기절해 있어서 몰랐겠지만.”
처음 기사의 검격을 받아내는 데 성배에 담긴 성력의 절반을 사용해야 했으며, 현자를 살리기 위해 나머지 절반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역설의 권능」을 통해 챈슬러에게 ‘신탁’을 전달하고, 그의 검에 의지를 실어주는 데 내 가슴 속에 있는 성력이 전부가 빨려 들어갔다.
“이후 상황은 챈슬러와 트루드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땐 저를 포기하셨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하께서 옥체를 보존하시고, 더욱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경을 살리지 않았다면. 나 때문에 경이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트루드나 챈슬러가 진심으로 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보는데.
물론 지금도 온전히 내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들을 비췄을 때, 확연히 달라진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빛들.
그렇게 그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가는 것은 내겐 필수적인 과정이라 볼 수 있었다.
“……이젠 정말 전하를 언변으로도 이기지 못하겠군요.”
현자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챈슬러와 트루드를 나와 동행하도록 한 것은 현자의 뜻이었으니까.
‘그 둘은 장차 전하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결코 저와 친분이 있다고 하여 품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그 검을 길들이는 것은 제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도록 하시는 것은 순전히 전하께서 해내셔야 하는 몫입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챈슬러는 신성 제국에서 유일하게 5성의 성력을 보유한 성기사였으며, 트루드 역시 그에는 미치지 못하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4성의 수습 기사였다.
클레이디크에서 내 신변을 보호해주기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텅 빈 고리를 쥐어짜 내는 일만은 다시는 없도록 해 주십시오.”
현자는 내게 확답을 받고 나서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굳이 현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자중해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역설의 권능」을 통해 내 뜻을 신탁으로 전달하고, 그것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은 내 몸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꼬박 이틀을 의식을 잃게 할 정도로. 그리고 깨어나고 나서도 고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게 할 정도로.
고리가 성장할 때 느껴졌던 ‘성장통’과는 확연히 다른, 불쾌하면서도 텁텁한 감각이었다.
어쨌거나 부족한 성력에 대한 부분은 이렇게 내가 가진 권능과 성배로 보충할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되었고.
“전하, 어딜 가시려고…….”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트루드가 깜짝 놀라며 따라붙었다.
“멀리까지 왔는데 거리나 둘러보려고.”
“시간이 늦었으니 날이 밝을 때 둘러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클레이디크의 야경만큼 아름다운 게 없다더라.”
“그럼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꼭 붙어서 전하를 보살피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길은 좀 알아?”
“전하를 보필하기 위해 이틀 동안 외워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 역시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나는 트루드와 함께 클레이디크의 거리로 나왔다.
“여기 야경이 아름답다는 게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네.”
검푸르게 깔린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 광장에는 그 풍경을 구경하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낭만도 있고 좋잖아.”
힐데스하임의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밤은 신께서 내려주시는 휴식 시간이니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안에만 있어야 한다나.
참 개소리였다.
“이들은 성력을 누리지 못하니 그런 것이지요. 성력의 광채는 별의 수 배는 되며 그 아름다움 역시 감히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리고 트루드 역시 개소리의 열렬한 신봉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감명 깊게 하늘만 보는 것 아닌가, 한마디 해 주려다 어린애 상대로 내가 너무 유치해지는 것만 같아 넘기기로 했다.
어쨌든 힐데스하임과는 달리 밤에도 장사를 하는 상점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생각보단 돌아다닐 만했다.
뭐 이런 거나 보려고 나온 건 아니고.
광장을 걸으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웬 어두컴컴한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비좁은 골목 사이로 참 많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저긴 상점이 다 닫았나?”
“……그런 듯합니다.”
“그래도 한번 가보자.”
“저긴 안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
트루드의 반응을 보니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골목 내에 위치한 건물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알고 있는 거 있어?”
“그것이…….”
“힐데스하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곳인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클레이디크에는 발칸 제국에만 존재하는 것들이 암암리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내가 찾는 건 역시.
“의술을 행하는 곳들인가?”
트루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것을 어찌…….”
평범한 힐데스하임의 거주민들은 한 번도 듣기 힘든 단어였다. 그들에게 의술은 성력의 대체품도 안 되는 엉터리였을 테니까.
허나 내 생각은 달랐다. 성력으로 어찌하기 힘든 부분은 분명 의술로 메꿀 수 있었고, 의술과 성력이 상호 보완하여 더욱 발전할 수도 있었다.
“안내해.”
그러니 나로선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의 의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주저하던 트루드가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보기엔 캄캄하던 것과 달리, 안에는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전하. 비록 전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질 수 있으나, 이는 암암리에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정치적으로 얽힌다면 발칸 제국과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차라리 보지 않고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트루드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설득했다.
황자인지라 이런 부분에 더욱 민감할 테고, 사람을 성력 이외의 것으로 치료하는 걸 묵묵히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렇게 오해를 하는 듯했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있으시오. 이러다간 상처가 더 벌어질 수도 있으니.”
환자 한 명을 눕혀놓고 칼을 들고있는 남자가 보였다. 하얀 가운을 입지는 않았으나 이 세계의 ‘의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환자를 치료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나와 트루드를 발견하곤 당황해했다.
“다, 당신은 분명 엊그제 왔던 힐데스하임의 기사로군. 그 옆에 계신 분은……?”
“예를 갖추어라. 힐데스하임의 3황자 전하이시니.”
“아, 아이고 저, 전하. 소인이 미처 몰라뵙고…….”
“됐으니 병자나 봐.”
“예?”
“하던 대로 해 봐. 어떤지 보려니까.”
환자의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그 외의 것에 신경 쓰는 걸로 봐서, 우선 첫인상은 불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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