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25)
제25화
전투는 해가 꼬박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신없이 위급한 이들을 치유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오크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현실감이 돌아오며 번뜩 정신이 들었다.
주위의 광경은 참혹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동시에 오싹한 기운이 온몸을 덮치며 소름이 돋았다. 나는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트루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임에도 이런 일에는 나보다 훨씬 익숙한 듯,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었다.
“어, 너도 와 있었네. 뭐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자존심을 부리려 태연한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쩡한 이들은 뒷정리를 하고 있고, 부상을 입은 자들은 후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발칸의 야전 의원들은 확실히 골목에서 봤던 의원들보다는 훨씬 합리적이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 영 거슬리는 부분도 꽤 많기는 했으나, 그래도 전장에 있는 이들이다 보니 기본적인 응급 처치만큼은 능숙했다.
하지만 부상자가 많은 이곳에서 낙후된 의술로는 성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발칸의 많은 병사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유치하네, 진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힐데스하임의 사제들.
하지만 상대 진형의 일을 모르는 체하는 것은 발칸 쪽도 똑같았다.
순수 전투력 자체는 우월한 발칸 쪽의 병사들은 뒤처리까지 끝낸 지 오래. 반면 힐데스하임 쪽 병사들은 오크 시체를 처리하기는커녕 잔존한 오크 무리조차도 아직 다 잡아내질 못했다. 발칸 쪽의 병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토록 비효율적일 수가 없었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저러고 있으니 매일 같이 부상자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발칸 진형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트루드가 얼른 따라붙었다.
“전하.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제게 말씀 주시면 전하의 뜻을 대신하여 전하겠습니다.”
“됐어.”
아까부터 눈에 띄었던 내 또래의 소년이 보였다. 겁이 많은 성격인지 한복판에서 얼타고 있는 것은 영 못 미더웠으나, 의술 실력만큼은 다른 이들과 비할 바가 못 되는 듯 보였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십 시오. 출혈이 심해서 천 밖으로 새어나와 강한 압박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소년이 짐꾸러미에서 꺼낸 것은 지혈대였다. 조악한 나무막대기와 천. 현대에서 보던 것에 비해서 조촐하게 생기기는 했으나 충분히 제 역할은 할 수 있을 거다.
“저놈 저거, 뭐 하는 거지?”
“저 막대기 같이 생긴 건 뭐야?”
다른 의원들은 지혈대의 존재를 모르는 듯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다.
“끄아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
소년이 부상자의 팔에 지혈대를 감싸고 압박 역할을 하는 봉을 열심히 돌리자 부상자가 괴성을 질렀다.
“아파도 참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출혈이 심하여 사망하실 수 있습니…….”
“이 또라이 새끼.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지!”
퍼억.
허나 압박을 가하던 소년은 다른 의원의 발길질을 맞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제야 부상자는 소리 지르는 것을 멈췄으나 압박이 헐거워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른 의원들이 천을 직접 갖다 대어 상처를 직접 지혈했으나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라면 동맥이 절단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일어나.”
내가 넘어져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이 휘둥그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저, 전하?”
낮에 나를 봤던 터라 이젠 구면인 나를 곧장 알아보았다.
“가서 살려내야지.”
소년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와 부상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붙어 있으니…….”
“누가 더 뛰어난지는 알 바 아니고, 네가 안 나서면 죽을 것 같은데?”
소년은 내 말을 듣고도 고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얼간이 취급을 받는지라 나서는 것이 영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거기, 다들 비켜 봐.”
그래서 내가 나섰다.
부상자에게 달라붙어 있던 많은 의원들이 나를 바라봤다. 힐데스하임 쪽의 사제들의 따가운 시선 역시 느껴졌다.
트루드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클레이디크에 있는 사제들이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혹여나 저들에게 용무가 있으시다면 저를 통해 뜻을 전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언제부터였을지 모를 힐데스하임과 발칸의 악연. 묘한 기 싸움. 그리고 고착화된 발칸 제국의 비효율적인 의술.
“내 알 바야?”
괜한 사람이 죽어가게 생겼는데, 그것도 천하의 죽일 놈이면 몰라 성곽을 수비하던 병사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걸며 검을 휘두르던 병사.
“다 비키라는 말 안 들려?”
주춤하던 의원들이 하나둘 물러나며 부상자에게 가는 길이 트였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갔다. 오른쪽 상완에 위치한 동맥이 다친 것을 확인했다.
“지혈해.”
“예, 예?”
아까의 그 소년이 당황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성력으로 치료하려 해도 출혈량이 많아서 상처가 제대로 안 붙을 거야. 직접 지혈로는 피 안 멎을 테니까 팔 위쪽 확실히 압박해서 출혈부터 멎게 해. 근육 찢어져도 상관없다. 지금 그딴 거 따질 상황 아닌 거 알지?”
소년이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짜악.
따귀를 몇 대 날려주자 소년의 눈빛이 썩 쓸만하게 변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지혈대만 확실히 꽉 조여.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소년이 지혈대를 남자의 팔 깊숙한 곳에 넣고는 봉을 돌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팔이 압박되기 시작하자 부상자가 비명을 질렀다. 지켜보던 이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특히나 나름 짬밥 좀 먹은 듯 보이는 의원들은 자신들의 상식과 다른 치료 방식을 보며 탄식을 내뱉기까지 했다.
“저러다 정말 잘못될 텐데.”
“칼로스라고 했나. 저런 초짜한테 어찌…….”
“신입 때문에 첫날부터 송장 치우게 생겼군.”
“저 황자라는 분도 너무한 것 아닌가. 아무리 아까 낮에 도움 준 게 있다고 해도 그렇지, 저런 말도 훈수를 둔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치료에 집중하고 있어서 안 들릴 거라 생각한 것일까. 허나 그 소리는 똑똑이 내 귓가에 들려왔으니 분명 소년도 들었을 것이다.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이놈에게 생각 외로 마음에 드는 면이 있었다. 의술을 행하고 있는 와중에는 다른 것에 전혀 휘둘리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덤벙대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
녀석이 지혈하는 동안 나는 팔의 세포가 괴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력을 계속해서 주입했다.
“……다 된 듯합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가 어느새 조금씩 새어 나오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직접 확인해보니 지혈대 안으로 손가락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충분히 뻑뻑하게 조여 있었다.
“네 손 좀 줘 봐.”
소년의 고사리 같은 손이 피로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성력으로 그 손을 깨끗이 소독한 뒤 거즈 역할을 할 천을 쥐여 주었다.
“빠를수록 좋다. 네가 잘 도와주면 더 빨라지는 거고. 피가 오랫동안 안 통하면 팔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 안 되는 건 바로 물어봐. 네가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내 보조를 볼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우선, 그 천으로 피부터 깨끗이 닦아내. 육안으로 안을 확인할 수 있게.”
“안을 확인한다 하심은…….”
“동맥, 아니 혈관을 직접 접합할 거야. 성력으로.”
“그, 그런 게 가능한 일입니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없다. 이해됐으면 피부터 닦고 그 천으로 상처를 벌려. 안에 있는 혈관을 직접 확인할 거니까.”
“예, 옙!”
소년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시를 보는 것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닌데 내 의중을 정확히 이해하곤 시킨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소년이 조심스레 팔의 상처를 벌리자 그 안에 찢어진 동맥이 드러났다. 제대로 지혈이 되어 피가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딱 좋으니까 그대로 있어.”
혈관의 크기가 워낙 작다 보니 이렇게 미세한 상처에 성력을 집중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허나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 온 것이고,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내상을 감으로만 치료해 내기도 했다. 이 정도는 훨씬 더 수월했다.
찢어진 동맥혈이 성력에 의해 빠르게 재생되었다. 양쪽으로 갈라져 있던 동맥은 금세 달라붙어 다시 피가 다닐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천천히 지혈대 풀어봐.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소년이 지혈대의 막대기를 돌리며 압박하던 부위를 점차 헐겁게 했다. 소년이 긴장한 얼굴로 계속해서 지혈대를 풀어나가던 순간.
꿈틀.
동맥이 꿈틀거렸다. 방금 접합한 부분으로도 정상적으로 피가 운반되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부분도 없이 완전히 복구된 동맥.
“되, 되, 된 것 같습니다!”
소년이 환희에 젖은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 얼굴을 보자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렸을 때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며, 몇몇 인턴, 전공의 놈들도 간혹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다.
뿌듯함, 희열감, 성취감.
결국 그런 놈들은 대부분 쓸 만한 의사가 되었었지.
잠시 회상에 잠기다 문득 주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마 가까이로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이 허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살려낸 거지?”
“출혈이 심했어. 지혈을 해도 피가 멎지를 않았는데…….”
“과연 성력이 정말 우리 의술보다 뛰어나단 말인가.”
그 소리를 듣고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감사합니다. 저희 발칸 쪽에 신의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절반은 네가 한 건데 뭘 그렇게 처져 있어?”
“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술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발칸의 병사를 살린 것은 전하의 신성력입니다.”
“멍청한 놈.”
“예?”
“네가 가진 재주가 얼마나 뛰어난 건지도 모르면서.”
소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전하의 깊고 넓으신 아량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냥 한 말 아닌데.”
결코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 때문에 이들은 의술의 잠재력도 모른 채 전부 포기하게 생겼다.
“아니, 됐다. 오늘 저녁엔 뭐 할 생각이지?”
“……아마 집에 들어가서 쉴 듯합니다.”
“그럼 같이 가서 나랑 얘기나 좀 나누지.”
“예에?”
소년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혈대를 가진 걸로 봐선 이놈이 그 외에도 어떤 쓸만한 의료기기를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과는 별개로, 의술로 사람을 살리다 보면 결코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상황이 자주 주어진다.
꽤 쓸만한 조수를 찾았는데 아무런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