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자신의 이름을 칼로스라 소개한 소년.
그는 공교롭게도 오늘이 성곽으로 나온 첫날이라고 했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칼로스는 조금이나마 나를 덜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에 들어서고도 한참을 더 지나서야 칼로스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호위 겸 따라온 트루드가 문밖을 지키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웬 노파가 몸을 일으켰다. 칼로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나를 보곤 당황 이상의 경계심을 보였다. 내가 힐데스하임의 황자라는 사실까지는 모를 테고, 단지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꺼리는 것이었다.
“……이분께서 오늘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나자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를 어찌해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칼로스의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나를 보며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겐 하나뿐인 혈육이자 제 몸으로 직접 낳은 아들이라 더욱 애정이 가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여나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이제라도 전장에서 이놈을 빼 내 주시면…….”
“어머니! 전하,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어머니, 제가 나서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네깟 놈이 거길 가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고 그러는 게냐? 하다못해 네 아비처럼 수십 년을 연구해 온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익힌 기술도 없으면서 대체 뭘…….”
“도움은 충분히 될 수 있지.”
“……예?”
“오늘 칼로스가 죽을 뻔한 병사 한 명을 살려냈어. 익혀 온 기술이 없었다면 더욱 놀라운 재능이군.”
그 말에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칼로스를 바라봤다. 칼로스는 부끄러운 듯 그 눈을 피했다.
“칼로스가 소중한 목숨을 구했다는 건 극명한 사실이니 부정할 필요 없다. 그 병사 역시 누군가의 자식일 것이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나선 자였지. 덕분에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거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미 된 저로서는 그닥 달갑지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생활을 한 탓에 본성이 이토록 이기적으로 변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지.”
전생에서 나 또한 애 아빠가 되어 가면서 아이를 위해 이기적으로 변하는 순간들을 겪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감정에는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이기적이라 이런 특출난 놈은 놓치고 싶지 않아.”
“전하께서는 힐데스하임 소속이신데 어찌하여 이 아이를 필요로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힐데스하임 소속이라고 해서 의술의 효용을 모르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내 대답에 칼로스의 어머니는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역시나 자신의 아들을 전장에 밀어 넣는 것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내가 장담하고 이 아이의 안전을 보장해주도록 하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힐데스하임 신성 제국의 명예와, 성력을 내려주시는 신의 가호를 걸고.”
어차피 내가 데려가지 않는다고 해도 칼로스는 스스로 전장에 나설 것이기에, 이런 내 제안이 그녀에겐 달갑게 들릴 수도 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칼로스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드립니다. 그렇게라도 거짓을 보태시어 어머니를 설득해 주셔서.”
“거짓을 보탠 것은 없는데.”
“……예?”
“그것보다, 제대로 의술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나?”
“의술을 제대로 배우는 이는 아무도 없지요. 전장에서, 혹은 마을의 치료소에서 수발을 들며 곁가지로 배우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술은 마땅한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으니.”
“그럼 지혈대는 어디서 난 것이지? 다른 의원들은 그 용도조차 모르는 듯하던데.”
“……그것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칼로스가 방의 모퉁이로 가더니 벽으로 보이던 곳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웬 통로가 생겼다.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로스가 초에 불을 붙이자 실내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나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낮에 보았던 지혈대를 포함하여 의료기기로 추정되는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 중에선 용도를 알 수 없는 희한한 것들도 있었고 낮에 보았던 지혈대처럼 다소 조잡하지만 꽤 유용해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네가 만든 것들이냐?”
“저희 아버지께서 남겨 놓은 것들입니다. 돌아가신 지는 10년이 넘었지만 직접 사용해 본 것은 며칠 전이 처음이었습니다.”
천천히 의료기기들을 살펴봤다. 10년이 넘었음에도 관리는 꾸준히 해 온 듯 쇠붙이는 예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녹은커녕 먼지 한 톨조차 없었다.
그리고 작게 ‘귀스트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아버지와 가까운 친우분의 성함이신데 당시 유명한 대장장이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곤 행방이 묘연해지셨습니다.”
솜씨가 꽤 쓸만한 것이 어쩌면 내 손에 딱 맞는 도구 제작을 의뢰할 법도 할 듯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헌데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치고는 상태가 훌륭하군.”
“아버지께서 워낙에 관리에 민감하셨던지라, 돌아가시면서 제게도 부탁을 하고 가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군. 아버지에 대해 더 아는 바가 없나?”
“제가 7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얼굴조차 기억에 남지 않지만 활동 당시 꽤 많은 이를 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의원들은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
“의술은 인간의 영역이라 완벽하지 않습니다. 의원끼리도 수도 없이 의견이 충돌하고는 합니다. 제 아버지의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만은 없지요.”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의술을 검증하는 것은 역시 직접 실험을 해보는 것.
하지만 해부조차 금지된 이 세상에서 어떤 의술을 입증할 만한 표본을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치료 방법이 옳았다고 해도 환자를 살리지 못한 경우도 있을 테니 검증은 더욱 어려울 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한숨부터 나왔다. 뜯어고치기엔 너무 많은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내가 너를 도울 테니 너도 나를 도와.”
“예?”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힐데스하임의 황자인 내가 지금 당장 발칸의 의술 체계를 뜯어고치는 건 힘들 거다.
그럼 어쩌겠는가. 나라도 제대로 된 방식을 행하는 수밖에.
물론, 이 녀석과 같이.
“앞으로 나와 함께 병자들을 치료하는 건 어떠냐? 오늘처럼, 아니, 때로는 네가 주가 되어 치료를 집도할 일도 있을 거다.”
“제가 어찌 감히…… 또한 저는 발칸의 사람인지라 전하께서 저 같은 것과 함께 구휼하시는 걸 보면 명성에 해가 가실까 두렵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씨익 웃었다.
칼로스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 * *
3황자가 떠나고 나서 성곽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간신히 오크 무리를 소탕한 힐데스하임 쪽 병사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부상자는 모두 치료가 끝나기는 했으나 저 많은 오크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지는 일이 남아 있었다.
“어째 우리만 이렇게 매번 늦는 거요! 저 발칸 놈들은 매번 후딱 끝내고 먼저들 사라지기 일쑤고. 아주 약 올라 죽겠소.”
“저들은 마력을 쓰지 않느냐. 대신 우린 성력이 있고. 다쳐도 금방 금방 낫게 해 주니 저들 입장에선 우릴 부러워할 거다.”
탈진해 있던 병사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득 발칸 진형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웃기는군. 우리가 너흴 부러워한다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
발칸 놈들이 대화를 엿듣고 하는 소리였다. 또 되도 않는 시비를 걸러 온 것이 분명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말했건만 녀석들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말이 심하시네. 일찍 퇴근하고 싶거든 그런 말 할 힘으로 마무리하고 가겠다.”
그러더니 반으로 갈라놓은 선을 넘어와 오크의 시체를 어깨에 둘러메는 것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의중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저들이 선량한 마음으로 힐데스하임을 도울 리는 없었다.
“뭐, 뭐 하는 거냐?”
“보면 모르오? 시간이 좀 남아 불쌍한 당신네들 도우려고 그러지.”
“너희가 우릴 돕는다고? 차라리 고블린이 오크 목 따는 소리를 해라.”
“우린 빚진 건 바로 갚아야 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저놈들이 우리에게 빚을 졌다고?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성력이라는 거, 꽤 쓸 만하더군. 인정하마.”
그제야 발칸의 병사들이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황자 전하께는 감사하다고 꼭 전해 드려라. 너희한테 고마운 건 없으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
그러곤 휙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오크의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벙쪄 있던 힐데스하임의 병사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놈들한테 손을 벌릴 순 없지.”
하나둘 일어난 힐데스하임의 병사들이 남은 힘을 쥐어 짜내어 뒤처리에 가담했다.
“어이, 생각보다 힘이 좋은데? 힐데스하임에 약골만 있는 건 아니었군.”
“누가 할 소릴.”
평소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던 힐데스하임과 발칸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오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 황자라는 분은…… 끝내주시더군. 다른 귀족들처럼 이상한 허영심이나 까탈스러운 면도 없고. 침착하게 치료도 잘하시는 듯하던데. 방해나 될 줄 알았거늘.”
“멍청한 놈. 누구 나라 황자님인데?”
그들은 티격대면서도 웃음이 절로 새어 나가려 하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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